설교자료/마태복음

[마2:13] 그리스도의 나심과 그 반응 / 박조준 목사

'코이네' 2016. 3. 2. 17:49

그리스도의 나심과 그 반응

마태복음 2 : 13 - 18

설교 : 박조준 목사


 어제 우리는 기쁜 크리스마스를 보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기적 중의 기적이요, 축복 중의 축복이요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장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반응이 세 가지입니다.


 1 . 하나는 헤롯 왕의 반응입니다.


 헤롯 왕은 새 임금이 나셨다는 소문을 듣고 미움과 적의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새 아기가 자기의 생활에 간섭이 될까봐서 자기의 위치와 자기의 세력과 자기의 영향력에 어떤 침해를 당할 것이 염려가 되어서 두려워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된 대로 “빛이 어두움에 비칠 때 어두움이 빛을 깨닫지 못했고 어두움은 빛을 싫어할 정도가 아니고 빛을 미워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의를 행하는 사람이 핍박을 받습니다. 조금도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죄를 범하는 사람은 의를 행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부정만 자행하는 공무원이 있는 곳에 양심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끼어 있으면 자연히 미움을 받습니다.


 전에 정 포은 선생의 어머님의 유명한 시조가 생각납니다. 그 당시의 간신들은 모사를 꾀하고 있었는데 정 포은 선생을 불러 냅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명예와 영달을 위해서 산 사람이 아니라 그때로 말하면 나라와 임금을 위하는 충신이었습니다. 이때 정 포은의 어머니는 그에게 이런 시를 들려 주었다고 합니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노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조이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불의로 더럽혀진 심령들은 공의를 위해서 깨끗하게 사는 사람을 싫어 합니다. 미워 합니다. 죽입니다. 헤록이 왜 새 아기의 나심을 두려워 하였습니까? 왜 죽이려고 하였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불의한 생활, 어두움의 생활을 하기 원하지만 그리스도는 그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인간이 하고 싶어하는 욕망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쓸모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욕망을 위하여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처럼 방해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2천년 인류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자기의 욕망대로 살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핍박과 멸시와 천대와 죽임을 당하여 왔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애가 역시 그러합니다. 세상에 독재자들 치고 그리스도인을 좋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물론 교회가 타락해서 세상의 정권과 야합하여 교회가 양심과 빛의 사명을 하지 못할 때는 별문제이지만 그래도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해 볼려고 말씀 가운데 서 있을 때 모든 독재자들은 교회를 여지없이 핍박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나신 곳이 마굿간이었습니다. 만왕의 왕으로 예수님을 어두운 이 세상은 알지도 못하였고 그래서 푸대접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나신 그 이튿날 멀리 애굽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에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수고와 어려움이 많았습니까? 그의 평생 어느날 좀 편한 날이 있었습니까? 악한 세상은 의로우신 왕을 핍박하였습니다. 오늘도 불의를 행하는 통치자들은 헤롯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무서워하여 죽이려고 한 것처럼 기독교를 미워하고 없애 버리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합니다. 북한을 비롯한 모든 공산권의 나라들이 다 그런 형편에 있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꼭 공산권의 나라가 아니더라도 독재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는 곳에서는 모두가 기독교를 싫어합니다.


 다른 말로하면 인간세상에서는 독재란 성경적이 못됩니다. 왜?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보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 는 완전 독재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행사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뜻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그 뜻대로 이루어지고 절대 복종만이 있는 그곳 이상 좋은 곳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인 체제는 독재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여러분은 아마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으로 짐작됩니다. 왜냐하면 조금전에 ‘독재자는 기독교를 싫어한다고 했는데 그것 무슨 뜻인가’ 오해하지 마세요.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완전하신 분의 독재입니다. 하나님의 독재입니다. 하나님의 독재는 우리의 이상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잘되면 좋으나 못되면 인간의 독재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독재자 헤롯은 갖은 만행을 자행했고 자기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이견이 있으면 가차없이 처단했고 자기의 지위가 영향을 받을 우려가 있을 때는 아무런 죄없는 어린이들을 무참히 학살하면서도 당연지사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에서는 여러가지 약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나 불완전한 인간 사회에서는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 장로교 정치가 말하자면 민주주의 체제입니다. 그래서 말이 많을 때는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과히 잘되지도 못하지만 과히 잘못되지도 않는 것이 민주주의 장점이요 약점입니다. 그러나 독재는 말이 없습니다. 그저 따라갈 것을 강요당하고 반대할 때에는 제거 당합니다. 가령 저 북한의 김 일성 독재 체제를 보세요. 거기서 무슨 학생들의 데모를 볼 수 있습니까? 있다면 김 일성 만세 행진밖에는 없습니다. 거기서 무슨 반 체제운운 하며 말이라도 꺼낼 수 있습니까? 거기서 제일 먼저 소탕한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시지요. 교회입니다. 솔직이 말해서 불교나 다른 종교는 문제될 것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공산독재자들에게 눈의 가시입니다. 헤롯의 말로가 비참했던 것처럼 김 일성의 말로도 명약관화입니다.


 2 .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반응입니다.


 이들은 아기 예수가 나신 일에 완전히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은 헤롯 왕의 야단 때문에 성경을 펴고 미가서 5장을 찾아 “베들레헴에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는 예언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나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예식과 율법토론에만 몰두하였지 예수님에 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하였습니다. 성경의 문학적인, 교리적인, 신학적인 토론 때문에 예수님의 정신 아니 예수님자신마저 잊어버리고 있는 신학자나 교회 지도자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아니한가 생각이 됩니다. 혹 어떤이는 자기하는 일에만 너무 몰두하다 보니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전에 눈믈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무릇 지나가는 자여 !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애가 1 : 12) 예수님은 우리 위해 나셨는데 우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니 인간의 비극이 여기에 있습니다.


 3 . 동방박사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값진 선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드렸습니다. 전에부터 사람들은 박사들이 가져온 그 선물이 아주 적합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선물이 예수님의 특성과 그의 업적에 특별히 잘 어울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우연히 준비하였을 그들의 예물이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들고 온 황금은 임금을 위한 예물이요, 몰약은 장차 우리 위해 죽으실 예수님을 위한 예물이었다고 해석을 합니다.


 홀먼헌트의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나사렛 목수집 문에 서 있는 그림입니다. 예수님이 아직 어린 소년시절입니다. 기울어지는 저녁 햇빛이 문에 비칠 때 소년 예수는 일하노라 피곤했던 몸을 펴기 위해 문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문간에 서서 팔을 펴고 기지개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뒷편 벽에는 기울어져가는 석양에 비취어 그림자가 생기는데 그것이 십자가의 그림자입니다. 배경에는 마리아가 서 있는데 그는 그림자를 보면서 다가 올 비극의 공포를 그 눈에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을 위해 살다가 마침내 사람을 위해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자기의 생명과 자기의 죽음을 바치러 오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참 왕이시요, 완전하신 최고의 제사장이시요, 마침내 인간을 위한 가장 높으신 구주가 되심을 예언한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떠나자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헤롯이 아기를 죽이려 하니 일어나 어서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해서 내가 이를 때까지 거기 있으라’ 하셔서 그 즉시 애굽을 향하여 피난의 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피난 이야기 가운데 이런 전설이 있어요.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예수는 애굽으로 가는 도중인데 날이 저물어 쉴 곳을 찾았으나 인가는 없고 피곤한데 동굴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날씨는 대단히 추워서 땅 바닥엔 하얀 서리가 깔려 있었습니다. 한 마리의 거미가 아기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거미는 ‘이 추운 밤에 아기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생각하다가 그는 그가 할수 있는 꼭 한 가지 일을 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것은 동굴 입구를 거미줄로 얽어서 그대로 막을 만들었습니다. 한참 후입니다. 헤롯의 파견을 받은 군대가 어린 아기를 찾아 죽이라는 피어린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뒤를 따라 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동굴까지 와서 누가 그 속에 있지 않나 해서 조사해 보려고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우두머리가 거미줄을 발견하였습니다. 거미줄은 하얀 서리로 뒤덮여 있는 동굴 입구를 가로질러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때 그 우두머리가 하는 말이 ‘여보게들, 거미줄을 보게 만일 누가 이 속에 들어갔다면 거미줄을 걷고야 들어갈게 아니야, 그런데 거미줄이 전혀 상하지 않았어, 그러니 이 속엔 아무도 없다는 거야 그리고는 헤롯의 군인들은 예수님의 가족엔 손을 대지 않고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 트리에 금 은 사슬을 두르는 것이 이 전설에서 유래된 풍습이라고 합니다. 번쩍이는 금 은 사슬의 장식들은 애굽을 향한 길가에 있는 동굴 입구에 펼쳐있던 거미줄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강도 디스마스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갈보리산에서 구원받은 강도와 애굽피난 도상에 만났던 강도는 어떻습니까?


 그런데 이것 보세요. 아기 예수가 나셨을 때 베들레헴과 그 근방은 울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고 하였습니다. 왜요? 폭군 헤롯이 왕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두 살 아래인 어린애는 모조리 잡아 죽이게 하였습니다. 헤롯은 본래 암살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마자 유대인의 최고 법원인 산헤드린을 근절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300명의 법령위원을 살해했습니다. 그 후 그의 처 마리암을 죽였고 장모 알렉산드리아와 그의 장남인 안티파터와 두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러스를 죽였습니다. 그가 죽을 때는 예루살렘 귀족들을 살해했습니다. 헤롯이 왕으로 오실 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조용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 생각해 보세요. 어머니의 품에 안겨 벙글 벙글 웃는 아이를 빼앗아 땅에 둘러 메치고 창끝으로 찔러 죽이는 것을 제눈으로 직접 보어야만 하는 그 어머니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기자는 이처럼 비통한 사실을 기록하여 내려가다가 갑자기 붓을 멈추고 “이는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고 썼습니다. 슬픔 가운데 잠긴 여인 라헬이 누굽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어머니로 불리우는 여자 야곱의 아내였습니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찢기어 죽었다는 비참한 소식을 들었던 어머니였습니다. 또 이 글이 누구의 글이라고요 예레미야의 글입니다. 이 글은 예수님이 나시기 전 580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서울인 예루살렘이 오랫동안 바벨론 군대에게 포위당했다가 함락되어 버리고 승리한 바벨론 군대의 횡포로 말미암아 그 비참한 정경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참하게 전사당한 아들의 부모와, 오랫동안 포위되어 굶어 죽은 자식들의 부모, 살긴 살았으나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의 부모들이 통곡하는 슬픈 울음 소리가 하늘을 진동케 하던 기막힌 역사였습니다. 먼 이방 나라로 끌려가는 슬픈 포로들이 저 베들레헴 근방에 있는 라헬의 무덤 앞을 지나가던 관경을 그려놓은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은 슬픔의 주인공들, 눈물로 엮어진 역사의 주인공들을 낳은 어머니들의 슬픔을 한 마디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무슨 뜻입니까?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넉넉한 사람들의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슬픔과 불행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모든 슬픔을 무색케 하는 비통한 슬픈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직 하나인 아들을 죽도록 이 세상에 보내신 바로 그 날이 크리스마스입니다. 슬픔과 괴롬과 고통이 가득차 있는 역사 안에 사는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가 슬픔의 주인공으로 오신 날이 크리스마스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고통과 가난과 슬픔속에 죽으려 태어났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슬픈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평안한 자리에서 슬픔을 바라보며 위로한 것이 아니고 슬픈 이들이 당하는 고난 속에 자기 자신이 뛰어 들어와서 함께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슬픔에 잠겨있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새 샘터를 하나씩 마련케 해준 것입니다. 그것은 슬픔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머물게 해주는 새로운 샘 줄기였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우리의 슬픔이 하나님이 당하신 슬픔 안에서 무색해지고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힘이 임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의미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아니 슬픔을 이기는 기쁨을 찾는 길은 오직 슬픔을 안은 채 슬픔 속에 빠지지 말고 저 말구유에 나신 그리스도를 찾는 길입니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