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8:1] 사랑과 믿음 / 박조준목사

'코이네' 2016. 3. 2. 17:53

사랑과 믿음

마태복음 8 : 1 - 17

설교 : 박조준 목사


 그동안 우리들이 삼일 기도회 시간에 공관복음을 강해하였습니다. 이제 두달만 있으면 만 3년이 되겠습니다. 공관복음을 강해한 첫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복음서 가운데는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된 것이므로 마가복음부터 생각하였고 지난 주간까지는 누가복음을 예수님의 수난기사를 남겨 두고 19장까지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수난기사는 수난기간을 앞두고 생각하기로 하고 오늘 저녁부터는 마태복음에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강해 때 다루지 않은 것을 빼어서 하나씩 생각하며 기도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몇해 전에 마태복음 5, 6, 7장 산상보훈을 생각한바가 있으므로 그 다음 장인 8장을 읽었습니다. 복음서의 기자인 마태는 거의가 순서적으로 기록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는 복음서 내용의 자료를 되는대로 배열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가지 일을 기록하였으면 그 다음에 기록된 기사가 반드시 먼저의 것과 연결이 되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그 전형적인 예가 오늘 저녁 읽은 8 장과 전에 생각한 산상보훈은 말하자면 예수님의 설교입니다. 영어로는 “The Sermon on the mount” 산상설교라고 합니다. 즉 마태복음 5, 6, 7 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8장에서는 예수님의 행함을 기록하였습니다. 산상보훈에서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8장에서는 행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은 기적의 장입니다. 오늘 본문만 읽더라도 나병환자를 깨끗케 하신 일,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일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일과 많은 귀신들린 사람을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 내시고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도 기적이려니와 이 기적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병자하나 고친 것, 그것이 전부라면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 그 이적 배후에는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오늘 저녁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예수님께서 병고치신 일을 통해서 의미를 찾아 생각하고 기도하십시다.


 8 장 1 - 4 절은 나병환자를 깨끗케 하신 일입니다. 앞으로 10 년만 있으면 한국에도 나병환자가 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 있습니다. 의학의 발달로 나병도 고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에는 병 가운데 나병은 가장 무섭고 비참한 병이었습니다. E. W. G. 매스터맨이라는 분의 기록에 보면 “인간을 그처럼 여러 해 동안을 시달리게 하고 썩게하는 병으로는 나병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나병은 일종의 궤양을 일으키는 것으로 적은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 궤양은 점점 심해서 썩은 냄새를 냅니다. 눈섭이 빠집니다. 눈알이 이상해집니다. 그 다음엔 성대 (Vocal chords) 가 헐어서 목소리가 못쓰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숨이 거칠어집니다. 손과 발이 궤양을 일으켜 무즈러집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처음에는 아픈 것을 모르나 점점 고통이 가해 옵니다. 평균적으로 이렇게 심해지는 데는 9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나중에 정신적으로도 쇠역해져 혼수상태에 빠지고 궁극에 가서는 죽게 된다고 합니다.


 나병은 우리 몸의 어떤 부분이 감각을 잃어버리는 데부터 시작이 된다고 합니다. 신경이 마비상태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점점 심해지면 손가락, 발가락 뿐만 아니고 손과 발 전부가 무즈러져 없어진다고 합니다. 죽음을 향해 한치 두치 걸어나가는 것과도 같은 비참한 병입니다. 빨리 죽지도 않고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스스로 보면서 살아간다고 할지 죽어간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 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이렇게 나병은 육신적으로 괴로움도 비참하지만 또 다른 괴로움이 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나병환자는 결국 죽은 사람과 같이 취급하였습니다. 진찰해서 나병이라는 것이 판명되면 죽은 사람을 멀리 묘지에 안장하는 것처럼 땅에 묻어 버리지만 않을 뿐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멀리 떨어져 있게 내어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레위기 13 : 46 절에 “병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한 것이라 그가 부정한 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율법으로 정해 있습니다. 나병환자는 헤진 옷을 입어야 하고 머리카락을 빗지 말고 입술을 가리고 어디가나 꼭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년에 나병환자가 되면 제사장은 그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교회에 와서 그를 위해 장례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 때 팔레스틴에서는 나병환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담을 두른 동네에서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회당에는 특히 나병환자가 혹시 깨끗해지면 진단하는 곳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10자 높이, 6자 넓이의 mechitsah라 이름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특정한 곳이 아닌데 일반 가정집에 나병환자가 혹시 들어가게 되면 그 집은 지붕이나 석가래까지도 더러워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일반 사람이 나병환자를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경우에 가까이 할 수 밖에 없을 땐 적어도 4규빗 이상 떨어져야 하고 나병환자가 있는 방향에서 바람이 불땐 적어도 100규빗은 떨어져야 한다고 규칙이 있었습니다. 나병환자가 지나간 거리에서는 계란을 먹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 없고 사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가 지나가면 담이나 바위 뒤에 숨곤 하였습니다. 자, 얼마나 끔찍한 병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끔짝하고 더러운 나병환자에게 손을 댔습니다. 신약성경 가운데 비록 짧은 말이지만 유대인을 놀라게 할 절수가 바로 마태복음 8 장 3 절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저가 누굽니까? 문둥병자 아닙니까? 가까이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더러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오셔서 손을 대신 것입니다. 구원하신 것입니다.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여기에 나병환자의 자세를 보세요 !


 1 . 나병환자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시기를 원하시면 하실 수 있을 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이 나병환자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서기관이나 랍비에게까지 올 수도 없었습니다. 만일 가까이 오면 돌로 맞는다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예수님께 가까이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물리치지도 아니하고 환영할 것이고 자기를 깨끗게 하여 주실 것까지 분명히 믿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나는 너무 더러운 인간이므로 예수님께 갈 수 없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 믿음으로 온 사람을 물리친 예가 없습니다. 주님은 ‘내게 오는 자를 내어 쫓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세상의 다른 사람은 나를 도울 수 없으나 예수님만은 나를 도와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분명히 믿고 왔습니다. 세상의 누구도 자기를 깨끗게 할 수 없으나 예수님은 깨끗게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왔습니다.


 2 . 나병환자는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고쳐주시기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말의 뜻은 “주여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람도 나를 위해서 무엇이나 해줄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저는 주님에게 내 유감의 뜻을 나타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믿는대로 주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니 저같은 불쌍한 사람도 돌보시기 원하시기만 하신다면 무엇이나 하실 수 있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께 대한 겸손한 자세입니다. 주님께 맡긴 것입니다.


 3 . 이 나병환자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왔습니다.


 흠정역에는 예수님께 경배, 예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헬라어 동사는 푸로스쿠네인이라고 하였는데 이 단어는 어느 다른 신에게 예배한다는 데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사람이 느끼고 행동하는 것을 나타낸 말입니다. 이 나병환자는 어느 누구에게 예수님께 대하여 말해 본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임재를 알았습니다. 물론 우리도 이것을 신학적 혹은 철학적인 술어를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오로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확신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 환자가 확신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경배하는 자세로 예수님께 나올 때 예수님은 그 더러운 비참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댔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 나병환자를 보실 때 민망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지 않아야만 했습니다. 율법에게 나병환자가 성한 사람에게 가까이 보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펴서 나병환자에게 대셨습니다. 그 당시 의학상식으로 말해도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댔다는 것은 무서운 감염의 위험이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손을 펴서 나병환자에게 대셨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 예수님께 있어서 그 사람을 돕는 것은 생의 의무로 알았습니다. 생의 의무에는 오직 한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그 법칙은 사랑입니다.


 동정의 의무, 사랑의 의무는 모든 규칙과 법률과 규례를 넘어 선행합니다. 사랑은 법칙과 규례 이전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육신적인 위험을 무시하게 하였습니다. 아주 몸서리 나는 무서운 병에 걸린 사람에게 좋은 의사가 되려면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가진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전염병을 가진 어린아이에게 의사가 되는 것은 위험이 아니라 그 어린아이의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그랬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개야겠습니다. 주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건강한 사람에겐 의원이 필요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합니다.’ 중병에 걸린 사람이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대단히 책망합니다. ‘아니 왜 주의하지 않아서 이런 무서운 병에 걸렸어요?’ 그렇다고 그 병이 났습니까? 훌륭한 의사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환자를 고치기 위해서 자기의 최선을 다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봉사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그래야 합니다. 사랑은 규칙과 법률을 넘어섭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율법도 무시하고 무서운 감염도 개의치 않고 나병환자를 보았습니다. “손을 내밀며 저에게 대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실 때 그 즉시로 문둥병이 깨끗하여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하신 일을 퍼뜨리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읽어보면 이러한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잠잠하라고 명령했을까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팔레스틴은 속국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퍽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 즉 선민의식을 잊지 않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인도하여 내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팔레스틴은 세계에서 가장 격분하기 쉬운 나라였습니다. 말하자면 혁명의 한복판에 살고 있었습니다. 지도자가 계속하여 일어나서 영광의 순간을 가졌으나 로마의 권세에 의해서 제거 당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지금 이 문둥병자가 깨끗해진 사실이 예수님에 의해서 된 것이 알려지면 모름지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군대의 지휘관으로 정치적인 지도자로 삼으려고 하였을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5 천 명을 5 병 2 어로 먹인 후 억지로 왕을 삼으려고 한 것을 기억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지휘관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군대의 지휘관으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나라의 왕으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전에 사람들의 마음을 교육해야 했고 그들의 사상을 바꿔야 했고 팔의 힘이 아니라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누구이심을 뭣하러 오신 분임을 알기까지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을 보여줄 때까지도 모든 일을 엄밀히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바른 것을 배워 말하기까지는 조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문둥병자였던 사람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해진 것을 보이라고 그리고 확인서를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문둥병자가 깨끗해지면 반드시 확인을 받아야 한다고 레위기 1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에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새 두마리를 잡아서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선대로 취해서 백향목과 홍색실로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받은 사람에게 일곱번 뿌리면서 깨끗하다 하고 산새는 들에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목욕합니다. 이것은 7 일 동안에 하여 완전하면 깨끗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이런 순서대로 다 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인간이 하는 법대로 다 따를 것을 말했습니다. 인간의 과학과 의학을 통한 치료법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할 것이고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사람이 협력할 때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족이란 그대로 게으른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신앙적인 역사가 협력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심령이 문둥병자같은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킬케콜이 말한 것처럼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적인 병에 걸려 있지는 아니합니까? 신경이 마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손가락 발가락이 무즈러져 나가도 아픔을 모르고 보고만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인의 향기 대신 냄새가 나지 아니합니까?


 고침받은 문둥병자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확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죄의 병을 고치실이는 예수님밖에 안계십니다. 예수님은 능히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겸손히 왔습니다. 무슨 체면이 필요없습니다. 지식도, 권세도, 재물도 내 세울 것 없습니다. 겸손히 와야 합니다.


 예배하는 마음으로 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모든 것을 넘어서 사랑과 능력의 손길을 펴십니다. 더러운 우리에게 손을 대십니다. 깨끗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 오늘 저녁 예수님께 나오실 마음이 있습니까?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