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9:9] 병든 자는 나오라 / 박조준 목사

'코이네' 2016. 3. 4. 11:54

병든 자는 나오라

마태복음 9 : 9 - 13

설교 : 박조준 목사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 혹은 가다라 지방이라고 하는 곳에서 군대귀신이 들려 고생하는 사람을 고쳐주시고 배를 타시고 본동네 나사렛에 이르시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도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올때 (여기에는 이렇게 간단히 기록했지만 마가복음 2 장에 보면 주님께서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 너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틈이 없어서 중풍병자를 집위에 들고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거기에 구멍으로 병자를 메어달아 내려 보낼 때 저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를 고쳐주었음) 여기도 보면 중풍병자에게 한 첫마디 말씀은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기관들의 완악한 생각을 아시고 병고치는 능력보다 죄 사하는 권능이 얼마나 큰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네 침상을 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중풍병이 들어서 움직이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그가 누워온 침상을 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병든 자를 보실 때 그를 불쌍히 여겨서 죄를 사하실 뿐더러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거기서 떠나서 지나가시다가 마태라고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서 세를 받는 것을 보시고 “나를 쫓으라” 하실 때 마태라는 세리는 곧 자기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일어나 예수님을 쫓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태의 집에 가서 음식까지 같이 나누시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야기로 들을 때 별로 이상한 점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이런 일이야말로 참 이상한 일이고 모든 예수님을 모함하려는 사람들의 악선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대로 예수님 때에는 유대나라가 로마에 속국으로 있어서 유대인들의 피를 빨아 로마정부에 바치곤 하는 것이 특별히 세리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정한 세만 받는 것이 아니라 그밖에 과중한 세를 메워주어서는 로마정부에 바치고 나머지 많은 돈을 자기가 착복하여 치부하는 말하자먄 나라 팔아먹는 사람들처럼 유대인에게는 적대시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버텅 멈을 팔아서 사는 창녀와 세리를 같이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물론 가산은 넉넉하지만 유대인들의 천대를 받고 토색하고 불의한 사람들이라고 빈축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마태도 본래 세리였습니다. 멸시받고 죄인시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회개하게 되었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청해서 식탁을 같이하는 즐거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 식탁에는 본래 마태의 친구들이었던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한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광경을 본 바리새인들은 에수님의 제자들에게 추궁했습니다. “어떻게 당신들의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오? ” 사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직접 공격을 하고 싶었지만 그 옆에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도 들으시라고 큰 소리로 추궁한 줄 압니다. 이 말을 듣고 계시던 예수님은 제자들을 대신하여 대답해 주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구약 호세아 6 : 6 말씀의 그 뜻을 다시 한번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렇게 대답하시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무슨 필요있습니까? 병든 사람에게 있어서 의사가 필요합니다. 간혹 병원에 가보면 중한 병든 사람은 의사를 붙들고 간청합니다. “의사 선생님, 저들을 어떻게 하든지 살려주셔요. 이 병을 고쳐주셔요”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며 애원합니다. 병난 자에게는 꼭 의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가운데서 우리가 주의해 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병든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자신을 병든 자를 고치는 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보통 우리들의 보는 눈과는 전연 다릅니다. 흔히 우리는 죄인들을 범법자로 봅니다. 그래서 으례히 처벌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그런 사람들을 대할 때는 찬 눈으로 봅니다. 멸시의 눈 가지고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와는 달리 일반이 그렇게 보는 죄인들을 병든 사람, 앓는 사람, 환자로 보았습니다.


 죄는 한 심령의 병으로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대할 때 멸시와 냉대와 미워할 대신에 긍휼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금년 우리교회 신앙생활의 목표를 기억하시지요? 언제나 그렇게 살아야겠지만 특별히 목표를 정하고 기도하고 힘써보기로 하여 “예수님을 닮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닮으려면 우리가 죄인들을 볼 때 어떻게 봅니까? 우리가 다 이와 같이 예수님처럼 죄인을 대할 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보십니까? 만일에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이 이 교회가 어떻게 될까? 많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자연히 돌봐주고 고쳐주고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순경과 간수가 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죄인들을 환자로, 병든 사람으로, 앓는 사람으로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많이 달라질 줄 압니다. 우리나라의 검사와 판사가 다 이렇게 예수님의 마음같이 죄인들을 병든 사람으로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살벌한 사회가 되지 않을 줄 압니다.


 사실 문화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죄인의 심리를 연구하게 되고 그렇게 할수록 예수님의 이 태도가 얼마나 옳았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도소가 병원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도 사실은 병원입니다.


 그런데 이 병원에 참 의사가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또 병원에 가보면 여러가지 병이 있습니다. 피부병, 눈병, 코병, 귀병, 입병, 목병, 폐병, 위병, 심장병, 간장병, 정신병, 부인병, 혈압병, 당뇨병··· 우리의 죄도 그렇습니다. 여러가지입니다. 갈라디아 5 : 19 이하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니 ··· ” 이런 것은 대표적인 것이고 구약 율법대로만 보아도 육백가지가 넘는 죄를 기록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도 통용되는 육법 (六法)이 있는데 이 육법전서에 하나라도 저촉이 되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죄목이 성립된다. 하물며 우리 양심을 통하여 죄로되는 것을 꼽는다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 지체 가운데 병나지 않는 지체가 별로 없습니다. 사지 백체 오장육부가 다 병이 납니다. 그것도 한가지 병만 아닙니다. 눈에 눈병도 여러가지요 귀에 귀병도 수십 가지입니다. 위에 위병도 여러가지입니다. 저는 소화기관이 그렇게 좋지 않아 늘 거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소화 불량이 한 가지가 아닙니다. 가령 얼른 들어봐도 위가 힘이 없으면 위 무력증, 위가 늘어지면 위하수증, 위가 헐어지었으면 위궤양, 산이 많으면 위산과다, 산이 없으면 위산부족, 위가 늘어나면 위확장, 위암··· 마찬가지로 우리 육체로 짓는 죄도 이 육체가 가지고 안짓는 부분이 없습니다. 눈으로 정욕, 입으로 궤술, 손으로 악한 일, 심장으로 시기, 배로는 욕심···


 그런데 이렇게 병은 여러가지이지만 한가지 공통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픈 것입니다. 눈병나도 아프고, 귀병 나도 고통이고, 이빨이 아파도 잠을 못자고, 소화가 안되어서도 괴롭고, 무슨 병이든지 작고 크고를 막론하고 병들면 아픕니다. 괴롭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도 여러가지이지만 한가지 공통되는 것은 고통입니다. 신음합니다. 잠언에 “죄인은 따라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간다”고 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마음이 평안할리가 없습니다. 육신의 병이 생기면 가령 손끝이 곪았으면 성했을땐 몰라도 아플땐 왜 그렇게 거기를 쓰는 일이 많고 또 많이 다치게 되는지. 그것은 거기라고 더 전보다 많이 쓰고 다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프니까 다치게 되고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도 무슨 죄를 마음에 품고 있으면 그것이 자꾸 우리를 괴롭힙니다. 남이 무어라 하지 않아도 깜짝 깜짝 놀랍니다. 고통입니다.

 

 그리고 병의 종류는 여러가지이지만 그 결과는 꼭같습니다. 죽음입니다. 적은 병이라도 장성하면 오래가서 심해지면 죽습니다.


 눈병도 심하면 그로 인하여 죽습니다. 코병도 심하면 그것 때문에 죽습니다. 손가락 하나가 병들어서도 그것이 정 심하면 그로 인하여 죽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감기 같아도 심해지면 폐염되고 더 심해지면 그것 때문에 죽습니다. 죽지 않는 병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도 아무리 적은 것이지만 장성하면 사망입니다. 크던지 적던지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큰 바위를 물에 던져도 가라앉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더구나 병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아무나 병에는 약합니다. 마찬가지로 죄는 믿음이 든든하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위생을 지키지 않으면 병이 납니다.


 그런데 육체적으로 보면 좀 건강한 사람을 만납니다. 얼마 전에 안양 양로원에 갔었는데 은퇴하신 교역자들이 계시는데 대개 90이 넘는 분이고 젊었다(?)고 할까? 연세가 적으신 분이 75세인데 대개 그 어른들 평생 감기 한번 앓아보지 않으셨다고, 이렇게 비교적 건강한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한가지 놀라운 것은 영적으로 죄인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병든 사람, 이 많은 환자를 어떻게 할까요? 그냥두면 그 병으로 말미암아 결국 다 죽을 수 밖에 없는데 어떻게 할까요? 모두가 절망입니까?


 여러분 ! 참 이 큰 병원에 참 의사가 오셨습니다. 이 의사는 우리의 병적인 병을 고칠 수 있는 참 의사입니다. 가짜가 아닙니다.


 여러분 ! 이 의산느 실수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 의사에게 모두 맡긴 사람치고 고침받지 못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더구나 이 의사는 희생적인 의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의사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의사입니다. “천하 인간의 다른 이름을 가지고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꼭 말씀드릴 것은 병원하면, 의사하면 병 고치는 데는 약값이 있어야 하고 치료비가 있어야 합니다. 제일 큰 문제는 돈 문제입니다. 병들어도 돈 없으면 고칠 수 있는 병도 고치지 못하고 희생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예수님 앞에 나아와 병 고침을 받는 데는 돈이 필요없습니다. 오로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고백을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죄가 없으십니까? 여러분의 심령은 병들지 않았습니까? 예수님 앞에 나와서 솔직이 고백합시다. “나는 죄인입니다”고. 그렇게 하면 만병의 의사가 되시는 주님께서 고쳐주십니다. 주님 앞에 나오세요 ! 심령에 병든 자는 서슴치 말고 나오세요 ! 그리하면 삽니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