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11;23] 모세 부모의 믿음과 짐승의 표 / 강기원 목사

'코이네' 2016. 3. 12. 20:42

모세 부모의 믿음

(히11:23)

 

 

믿음이 뭔지 다시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왜 냐 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온 믿음에 대한 교 리적, 전통적, 신학적인 가르침을 신뢰할 수가 없 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 로 시인하면 믿음이 있는 것으로 너무도 쉽게 알 아 왔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 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할수 없다는 바울의 가르침 도 너무 쉽게 넘어가고 있다. 그래서 침례교회에 서는 예배를 끝내기전에 초청을 하는 순서가 있 다. 많은 증인들 앞에서 예수를 개인적 그리스도 로 믿고 시인하고자 결단하는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이다. 이 초청에 많은 사람이 강단앞으로 나아 간다. 그리고 목사가 하라는 대로 따라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ㄷ노라고 선포한다. 그리고 이런 식의 믿음을 정말로 믿음인줄로 알고 있는 사람 이 거의 99% 이상이 되겠지만 그렇다면 예수께 서 "인자가 올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라는 한탄 을 왜 하실까? 그 99%의 기독교인이 알고 있는 그 믿음과 예수께서 보시기를 원하시는 믿음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게 아닐까?

 

내가 지금까지 교회생활을 한다고 하기는 했 는데 그래서 성경공부도 해 보고 교회에서 시행 하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기도 하고 나름대로 신앙이 성장하여 헌금도 했고 봉사도 했고 인정도 받아보기도 했지만 그러한 믿음의 생활을 예수께서 인정하시지를 않는다고 한다면 그래서 "인자가 올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는 한 탄을 나를 향해서도 쏟아내신다면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 놈이고 얼마나 한심한 놈이고 얼마나 통탄할 노릇일까? 애석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99% 이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 에이, 설마...!" 하실 분들에게 특별히 다음의 말씀을 기억하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생명길로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하다, 그래서 찾는이가 적다, 그러나 멸망의 길은 넒다, 그래서 그길로 가는 사람은 수태게 많다."(마7:13,14)

"귀 있는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는 말씀을 들어라." (계2:11)

 

노아의 홍수때에는 지구상에 사람들이 쫙 깔 릴 정도로 많았지만 단 8명만이 구원을 받았고 소돔과 고모라가 뒤집어 질때에도 롯의 가족 3명 만이 간신히 목숨을 보존했고 최소한 2백만의 이 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40년간 유리했으나 달랑 2 명만 가나안에 들어갔죠? 과연 당신이 구원받은 8명 혹은 3명, 혹은 2명 중에 한명이 될 확율이 얼마나 될까...를 한번 생각해 볼 용의가 있으셔?

 

만약에 당신이 한국에서 대학입시시험의 경 험이 있다면 더 이해하기가 좋겠지? 기껏해야 10:1 이나 20:1 의 합격율에도 당하지 못하고 미 끌어진 경험(합격한 천재들을 빼놓고...) 이 있으 시겠지? 취직 시험은 어떻고? 500:1 혹은 심지어 1000:1 까지도 되는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 한 사람은 빼고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쓰라린 경 험이 있는 분들이시여...! 어찌도 그리 쉽게 천당 의 합격을 낙관하시는가 그래...! 죄인이여 다 와 라, 값없이 물을 마셔라, 사랑, 사랑, 사랑... 하니 까 뭐 천당이 무슨 피잣집 정도로 뵈나 봐...?

 

믿음, 내 쪽에서 "믿습니다, 믿슘니다...!" 하 면서 아무리 소리를 크게 지르고 악을 써도 그것 은 믿음이 없다는걸 나타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로 믿음이 있다면 증거가 나타나야 되는데 믿음의 증거가 무엇일까? 먼저 걱정, 두려 움이 없어야 한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백번 죽었다 깨도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돈이 없어서, 병이 들었다고 이런 저런 이유로 걱정과 근심 그리고 두려움이 떠나 지를 않고 그 얼굴은 맨날 쭈구렁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또 다른 믿음의 증거로는 기쁨이 있 어야 한다. 믿음과 기쁨은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어요. 믿음과 걱정은 분리해야 하지만 믿 음이 있다고 하면서 기쁨이 없다면 '로미오'는 읽 었는데 '줄리오'는 않읽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애. 걱정과 근심이 없는 것으로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기쁨이 있어야 한다구요. 그런데 이 러한 믿음을 과연 오늘 날의 교회에서 얼마나 많 이 볼수 있을는지... "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믿음을 가장 잘 가르쳐 주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으로 갑시다. 여기에는 믿음의 정의가 내려져 있고 이 믿음의 정의대로 살아간 실례를 제시함 으로 '믿음이란 이런 것' 이라고 말해주고 있다구 요. 즉 믿음의 조상들이 그들이 당하고 있는 현실 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하면 바로 믿음으로 대처 했는데 그 모습들이 아브라함은 이런 모습으로 이삭은 이런 모습, 야곱은 저런 모습, 에녹, 노아, 모세... 이런 분들이 보여준 그런 삶의 모습들이 바로 믿음의 모습이였다고 말한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들이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이런 유명인사들은 믿음의 조 상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고 익히 존경하기도 하지만 전혀 우리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생각도 하기 어려운 완전 무명인사 한 분이 버젖이 우리 의 믿음의 조상의 대열에 껴 있단 말이예요. 그 분은 (히11:23) 에 나타나신 분인데 이 믿음의 조 상은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누구냐 하면 그 유명한 모세의 부모님이시란 말이지. 모세의 장인 도 그 이름이 '이드로' 라고 알려져 있고 모세의 형도 '아론' 모세의 누나는 '미리얌',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사람의 이름도 알려져 있건만 아 글세 믿음의 조상의 대열에 당당하게 껴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모세의 부모님의 성함은 무슨자를 쓰시 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말예요. 누구 아는 사람있 으면 손 들어 봐.

 

그러면 모세의 부모님께서는 무슨 일을 얼마 나 엄청나게 하셨길래 믿음의 조상이 되셨나? 아 브라함처럼 독생자를 하나님께 드리기라도 하셨 나? 아니면 모세처럼 바로 왕을 혼내 주시기라도 하셨나? 아무것도 하신게 없어요. 그 분들은... 그 냥 다른 히브리 백성과 똑같이 종살이에 지치고 쩔어서 그날 그날을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면 서 사는게 신기한 비참한 생활을 하는 그런 분이 라구요. 그러면서도 불구하고 믿음의 모범을 보였 다는 굉장한 평가를 받은 분이예요. 그 이유가 뭘 까? 그 이유를 알면 당신이 예수의 보시기 원하 시는 믿음이 없다는걸 아시게 될꺼라구요. 바로 그게 이 글의 목적이고...

 

모세의 부모님의 함자를 편의상 '갑돌이, 갑 순이' 라고 임시로 내가 붙일께요, 갑돌이와 갑순 이는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인데 어느날 사랑 을 했드래요 그래서 결혼을 했었드래요. 그런데 그 당시는 이 신혼 부부를 축하하고 축하받을 정 도로 여유있는 좋은 상황이 아니였어요. 그당시가 얼마나 살벌했었냐 하면 애급왕이 명령을 내렸는 데 모든 히브리인이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면 다 죽여 버리라는 살벌한 명령이예요. 이런 상황속에 서 갑돌이와 갑순이가 만나서 시집 장가를 가는 거예요.

 

히브리인에게 있어서의 아들은 메시야가 온 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타 민족의 그 것과 비교도 할수 없이 중요해요. 바로 이러한 아 들을 죽이라는 명령은 도저히 납득할수도 없고 따를수도 없는 악법이요 있을수가 없는 차별행위 요 히브리족의 씨를 말리겠다는 의도라구요.

 

이 명령을 받은 히브리족은 경악과 놀라움과 공포로 떨었을 꺼예요. 그러나 칼갖은 놈 앞에서 무슨 힘을 써요? 히브리 청년 남녀의 결혼은 애 급의 내무, 치안, 동회에 그대로 보고가 될꺼구, 임신과 동시에 해산날짜를 기다리구 있다가 들이 닥쳐서 아들이면 작쌀을 내는 공포 분위기가 점 점 크게 확산ㄷ다. 히브리 청년들은 결혼을 할수 도 않할수도 없는 기괴한 상황을 맞이했고 임신 이 확인이 되는 순간부터 걱정과 두려움이 시작 ㄷ다.

 

만약에 어떤 부부이든지 아들을 기여코 낳기 를 원한다면 결혼사실부터 숨겨야 할것이고 임신 사실도 말할것없이 만 9달 동안 숨겨야 되고 만 약에 정말로 아들을 낳게 되면 이때부터 몇년동 안을 또 숨겨야 할 것이다. 이게 제대로 숨겨질 까? 주변에 눈치 채는 놈, 고자질 하는 놈, 당국 에 고발한다는 위협으로 돈 뜯는 놈, 결국은 발각 되어 아들은 물론이요 부부도 함께 참살을 당하 는 각오를 해야 할꺼 아니겠수?

 

당신 같으면 이러한 악 조건을 무릅쓰고 아 들을 살려낼수 있겠수? 이런 상황에서 아들을 감 춘다는건 자기의 목숨을 내 놓는 일인데 정말 솔 직히 말해서 당신 아들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기 꺼이 내 걸 자신이 있수? 아 물론 자식을 위해서 먹이고 가르치고 입히는 일이야 누구나 다 하지 머...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고 당신 자신의 목숨 을 줄수가 있느냐고... 응? 게다가 이렇게 악조건 을 무릅쓰고 천신만고 끝에 살려낸 아들녀석이 하라는건 안하고 왠 못된짖 골라가면서 다 할는 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만약에 말이지... 당신조차 이런 악조건을 무 릅쓰고 아들을 살려낼수가 있다면 모세 출생당시 의 히브리민족은 더욱 그랬을 꺼다, 그들은 하나 님을 믿잖아, 메시야가 와서 자기네 들을 해방시 켜 준대매...? 그러면서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목숨을 내걸 지 못했어요. 아무리 믿네 어ㅉ네 하면서도 그게 사실은 껍대기 뿐이라,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목 숨을 걸고 자기의 아들을 자신의 목숨과 바꾸는 행동을 했으면 어떻게 갑돌이와 갑순이만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할수가 있겠수?

 

모든 가정이 다 바로왕의 명령을 따를 수밖 에 없었고 그 결과 아들을 죽여야 했고 아들을 죽인 대가로 공포와 두려움에서 해방될수 있었고 아들을 제손으로 죽인 슬픔은 어느정도 세월이 가면 자연히 잊어지는 거니깐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어쩌구 하면서 현실의 위협에 굴복하는 거라구요, 안그래?

 

모든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단 한 가정, 갑돌이 갑순이 부부는 달랐어요. 출애급 기 2장에 보니 갑돌이 갑순이는 모세를 낳아놓구 3달간을 숨겼다구 했는데 사실은 3달만 숨긴게 아니고 만 9달 동안의 임신사실 자체도 숨겼을 것이고 어쩌면 결혼사실도 숨겨야 했을는지도 모 르지... 하여간 다른 부부들은 현실의 위협앞에 굴 복하여 아들을 낳는 즉시 신고를 하든지 제손으 로 죽이든지 했지만 오직 갑돌이 갑순이만큼은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하지 않고' 아들 모세를 숨겼다 이거야.

 

히브리서의 저자가 믿음의 조상으로 왜 갑 돌이/갑순이 부부를 꼽았냐? 바로 이 점이요, 임 금의 명령을 무서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요. 갑 돌이/갑순이 부부가 비록 아브라함처럼 독생자를 번제물로 하나님께 바친것도 아니고 홍해를 가르 거나 반석에서 물을 철철 흐르게 한 능력을 나타 내지도 못했으면서도 불구하고 이 부부를 믿음의 조상으로 꼽은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는 그 현실에서 갑돌이/갑순이 만큼은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거요. 바로 이게 믿음의 본보기로 인정된 것이라 그겁 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오래동안 지속이 ㄷ느냐? 그것도 아니예요. 단지 생후 3개월이 지나자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고 아들을 나일강가에 내다 버렸다구요. 그랬는데도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갑 돌이/갑순이의 태도를 믿음이라고 보고 있다구요. 3개월간 기르던 아들을 포기해야 하는 부모의 심 정, 나일강가에 흘려 보내는 부모의 찢어지는 마 음이 오죽했을까? 이럴바에야 차라리 처음부터 숨기지를 말지... 그런데 사실은 갑돌이/갑순이가 모세를 포기하는 순간에 하나님은 바로의 공주를 통해서 일하시기 시작하셨지만...

 

현실은 눈에 보이는 거예요. 이 세상은 현실 을 중요시 여깁니다.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것만 인정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건 인정도 못하고 알 지조차 못해. 그러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보이지 않는 걸 추구하는 눈, 보이지 않는걸 아는 눈이 바로 믿음이고 오히려 보이는 세계를 거부하는게 바로 믿음이예요. 그래서 믿음과 현실은 항상 반대라 구요. 현실이 주는 두려움에 굴복하면 그건 믿음 이 없는 거예요. 현실이 아무리 위협해도 믿음이 있다면 현실을 두려워 하지 않아야 해요. 만약에 당신이 갑돌이/갑순이와 같은 현실의 위협에 두 려움이 없고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 면 정말로 믿음이 있는 거예요. 자신 있어? 당신 이 믿음이 없다는걸 또 하나 말해 볼까?

 

말세론자들이 단골로 끌어내는 성경구절이 있어요. 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의 표'가 그거 유. 그런데 이 짐승의 표는 적그리스도가 발급하 는 건데 만약에 이 짐승의 표 발급받는 것을 거 부하면 일체의 매매행위를 할수가 없게 된다는 거요. 매매행위를 허락받지 못하면 앉자서 고스란 히 굶어 죽는거 외에는 방법이 없겠죠? 그러나 이 짐승의 표를 발급 받으면 이는 적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뜻이며 이는 곧 영원한 지옥행이라고 계시록은 기록하고 있단 말이지. 그래서 말세론자 들이 말하기를 절대로 짐승의 표를 받아선 않된 다고 침을 튀기고 있다.

 

자, 그런데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을 재간이 있 어야지...? 당신 지금 쌀 사서 먹어야지, 옷사서 입어야지, 전기써야지, 휘발유 사서 넣어야지, 컴 퓨터도 사야하고 비누도 사야 하고 지금까지 일 상생활을 하면서 왼통 돈주고 물건 사서 쓰는게 일인데 지금까지 이렇게 매매 행위에 익숙하고 매매행위가 아주 생활화가 되어 있는데, 아니 그 때가서 갑자기 무슨 재주로 짐승의 표를 거절해?

 

지금까지 눈에 보이는 상품을 마다해 본 적이 없 고 유행하는 물건들을 가지지 못해서 안달들을 하고 있잖아? 응? 신형차, 신형 컴퓨터, 새프로 그램을 사지못해서 안달이고, 교회건축할때 얼마 나 많은 건축자재를 샀느냐 말야, 어디 그뿐인가? 물가가 오르니 내리니, 비싸네 싸네 하면서 시끌 벅쩍하게 사는게 우리들 아닌가? 오늘 점심은 '스 시' 가 좋을까? 햄버거가 좋을까? 하면서 돈 쓰는 걱정을 하고 살잖아...? 그런 당신이 아니그래, 그때가서 무슨 재간으로 짐승의 표를 안받아? 우 리는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매매 행위를 통해서 짐승의 표를 받도록 항상 우리도 모르게 훈련되고 있는 중인데 그때라고 뭐 별 달 라?

 

지금현재 우리가 매일매일 행하고 있는 매매 행위 자체가 바로 짐승의 표나 마찬가지요. 지금 당신이 목사고 장로야? 좋아 좋다구, 그래서 믿음 이 좋아서 목사도 되고 장로도 ㄷ다고 믿고 있겠 지? 그러나 당신이 무슨 화성에서 오신 분도 아 니구 이 지구에서 매매행위를 단 한번이라도 한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짐승의 표를 받은것과 다 름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 옛날부터 갑돌이와 갑 순이를 제외한 아들을 죽인 모든 부모들은 이미 짐승의 표를 받은거나 다를 바 없고 재수가 좋아 서(?) 아들을 낳지 않고 딸만 디립다 낳게된 부부 도 마찬가지요. 이런 짐승의 표를 필요로 하는 사 람들은 지금도 엄청 많을 수밖에 없고 여전히 현 실의 위협속에서 임금의 명령을 의식하며 살아가 고 있다. 그러면 매매행위없이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유... 하고 반문하고 싶지? 지금 당장 매매행 위를 하지 말라는게 아니고 이러한 매매행위가 자연스럽게 짐승의 표로 직결된다는 경고를 하고 싶다는 거다 이거유.

 

짐승의 표외에 또 다른 표를 계시록은 제시 하고 있다. 그건 '하나님의 인' 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인'을 이마에 받아야 한다. 이 하나님의 인이 없으면 짐승의 표가 없어서 당 하는 괴로움에 비교도 않되는 큰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하나님의 인'을 이마에 받아야 한다. (계7:3-4, 9:4)

 

그런데 짐승의 표는 현실이며 눈에 보이는 임금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의는 눈에 보이지 않 는 믿음의 표다. 당신이 지금까지 믿음생활을 잘 해 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임금의 명령, 즉 현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았어야 한다. 현실의 위협을 조금이라도 두려워 한다면 당신을 틀림없 이 아들을 죽일수 있는 사람이요, 짐승의 표를 받 는 사람이라고 봐야 되는게 틀림이 없다. 물론 이 말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믿음은 내가 능동적으로 뭐 좀 어떻게 해 보 겠다고 하는 그런게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상황 에 따라 개인에 따라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 그래 서 믿음이 은사라고 하는거다 (롬12:3). 그런데 우 리의 생각과 관심이 세상에 있고 삶의 방식이 세 상에 익숙해 있는데 하나님의 주시려고 하는 믿 음을 감지하고 포착할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산으로 가라' 그래서 선지자 엘리야는 산으 로 갔다,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 바위를 부셔 버리는 강력한 바람을 보내셨다. 그러나 그속에 계시지 않았다. 곧 지진이 일어났지만 지진에서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고 곧 이어서 불이 일어났 지만 불속에서도 기척이 없으셨다. 선지자 엘리 야는 이 공포의 분위기속에서도 정신을 바짝차리 고 있다가 불이 지나간 뒤 세미한 소리를 들었는 데 이 소리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임을 즉각 감 지했었다(왕상19:11-13). 만약에 선지자 엘리야가 바위를 날려버리는 폭풍을 두려워 했더라면, 만약 에 천지가 꺼지는 굉음과 함께 일어나는 지진을 무서워 했더라면, 그리고 맹렬히 붙는 불을 보고 그만 까무러 쳤더라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수가 있었을까?

 

짐승의 표란 무엇이고 하나님의 인이란 무엇 인가? 손등과 이마에 새기기 전에 먼저 마음으로 임금의 명령을 두려워 하느냐 아니면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더 두려워 하느냐하는 사안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위협을 눈에 보이지 않는 하 나님의 명령보다 더 무서워 한다면 이것이 시대 와 상관없이 그리고 겉으로 나타난 모습과 상관 없이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고 있잖어..., 나 라고 별수있나? 그냥 남들처럼 그렇게 사는거지 머...' 하고 고개를 들고 끝까지 버티겠다고 하는 사람들

 

설교 : 강기원목사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