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에베소

[에베소1장] 성숙한 성도

'코이네' 2015. 12. 26. 22:53

 

성숙한 성도

 

성 경: 엡1:15-19

 

 

<서론>

생명이 있는 것은 무었이나 성장하고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신앙은 곧 새생명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성장과 변화와 성숙이 따라와야 정상적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상 교회는 여전히 문제를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 안에는 아직 완전히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있고, 거듭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러가지로 부족한 면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교회는 주님의 진리의 터 위에 존재하면서 진리를 선포하는 주님의 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가운데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열정과 사랑하는 마음을 설명하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주님과 교회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지닌 사람이 되려면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갈때에 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1.교회를 향한 성도들의 바른 자세(15-16절).

 

1)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15절).

 

본문 15절에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에베소 교인들이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들 끼리 서로 사랑하는 일로 바울은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할 때에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는 무리들과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합세하여 일으킨 소요로 인하여 고난을 겪었던 곳이었습니다(행19:23-24). 그러나, 바울이 에베소를 떠난 이후 그곳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믿음이 성장하여 본문에서 보듯이 바울이 그들의 신앙을 칭찬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에베소 교회는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문제들을 안고있었지만 그들은 믿음과 사랑으로 그 문제들을 해결하였던 것입니다. 주를 믿고 진리를 믿고 산다고 하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에게 문제

가 많을수록, 문제가 어려울수록 성도들은 교회를 향해서, 형제된 성도들을 향해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 대한 진실된 사랑의 표현입니다. 교회의 문제를 안타깝게 여기지 않는 마음은 주님을 향한 사랑도 차거운 법입니다.

 

2)교회를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16절).

 

본문 16절에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바울은 이렇게 그가 섬겼던 모든 교회를 염려하면서 언제나 부지런하고도 지칠줄 모르는 기도를 드렸습니다(롬1:9골1:3,9살후1:11) 특히, 그 교회들이 거짓된 교훈으로 유혹을 받아 고난 가운데 있거나, 성도들 사이에 분쟁이 있을 때에 바울은 더욱 애타는 마음으로 권면하고 기도하였습니다(고전1:11빌3:18). 더우기 그가 감옥에 갇히는 처지 이면서도 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은 쉴새없어 기도에 힘썼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에 교역자가 부족하다면 그를 위해서 성도들은 기도해야 할 것이며, 성도들이 부족하다면 그들을 위해서 서로가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 할 때에 주님의 몸된 교회는 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 비난만 한다면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종들과 성도들을 손가락질 하는 일이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다시 손가락을 들고 조롱하고,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무서운 일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성숙한 성도가 되는 길(17-19절).

 

1)하나님을 잘 알아야 성숙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17절).

 

본문 17절에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인간들은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신을 알려고 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해왔습니다. 옛날에는 비, 바람, 천둥, 번개가 무섭고 불이 무섭고 괴암절벽이 무서우므로 그런즉 자연현상들과 자연에 대하여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 종교의 기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면서 하나하나 대자연의 비밀들이 벗겨졌고 그로인해 더 이상 자연이 인간의 경외의 대상이 될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마침내 신은 없다!고 선언하든가, 아니면 새로운 신흥 종교를 만들어 내는 등의 변화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을 알게된 종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하였을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칭찬하시면서도 '이를 네게 알게 한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마16:17).

자연 만물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들이 범죄한 이후에는 그 마음의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하나님을 깨달을 수가 없게되었습니다(롬1:19-2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가득 담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딤후3:15-16). 그러나, 이 성경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우리의 심령에 솟아 부어주시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섬긴다는 이 사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소망의 눈을 가져야 성숙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18절).

 

18절 전반절에서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었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운 사람은 삶에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권력 때문에 눈이 어두워진 나머지 망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또한,돈 때문에 마음의 눈이 어두워진 나머지 소망이 없어지고 허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 때문에, 명예 때문에 인생을 고독하게 끝맺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눈이 제대로 밝아야 참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없이는, 하루를 살았다고 하더라도 실상은 죽은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아람 군대가 포위했을 때 마음의 눈이 어두웠던 게하시는 두려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밝았던 엘리사는 소망 중에 걱정하지 않았습니다(왕하6:14-17).

마음의 눈이 어두웠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곁에 서 계셨으나 알지 못하고 소망없는 자 같이 슬퍼만 하였던 것입니다(요20:14,21:14).

소망 없이 실망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저희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눅24:16-31).

 

3)성도가 받을 기업이 얼마나 영광되고 풍성한가를 알아야 성숙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18절).

 

18절 하반절에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었이며" 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브라함의 축복을 함께 받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잠간 받는 '환난의 작은 것'이 장차 다가올 지극히 영광된 기업과는 족히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죄인된 우리를 성도라고 불러 주신 것만도 황송한데 그 위에 또 믿음의 상급도 후히 주신다니(창15:1눅18:29-30딤후4:7-8히11:6)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가 그 상급과 기업을 생각할 때에 좀더 하나님의 뜻에 가깝게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4)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강력한가를 알 때에 성숙한 성도로 바뀌어져 가는 것입니다(19절).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막9:23절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성숙한 성도가 될 것이냐? 한 달란트주의 성도가로서 현상 유지만 할 것이냐?는 우리의 마음의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마음에 성숙한 성도가 되기를 바라는 열망을 가질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