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에베소

[종려주일설교] 예수님 십자가 질 때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코이네' 2014. 3. 13. 21:12

종려주일설교,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가 서 있어야 할 바로 그 곳


에베소서 1:1-7

오늘은 종려주일로 성찬식을 거행하며 앞으로 한 주간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또 그 고난에 동참하는 생활을 익혀 가는 주간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3년을 마치시고 그 동안 수없이 반복하여 말씀하셨던 최후의 죽음을 맞이하시기 위하여 드디어 죽음을 5일 남겨 놓으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게 되었을 때 제자들과 군중들이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흔들며 주님을 환영했던 역사적 사실로 이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다음날부터 바로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렇기에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엄청난 환영을 받으며 들어오는 기쁜 날이지만, 동시에 십자가를 지기 위한 고난의 걸음을 그렇게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한 주간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예루살렘의 길은 위기와 영광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길에는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위기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체포당하시고 고난 당하시고 죽음을 당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실제로 이 길을 위험한 위기의 길이며 피해야 할 길이라고 말씀하시거나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왜 신앙의 삶 속에서 믿음과 기도로 사는데 위기가 오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라… 살아나리라"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위기는 결코 어두움만이 아니라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위기 속에 감추어진 영광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영광은 없습니다. 위기가 어렵고 아프고 힘들고 오해가 있을지라도 위기 속에 있는 영광을 보고 그 위기를 극복하면 참다운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암이라는 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 당하고 있습니다. 암 때문에 죽은 사람도 많지만 암을 극복한 사람들이 모여 "희망의 전화"를 만들어 암에 걸린 환자들을 도와주는 모임이 있습니다. 이들은 "암은 난치병이지 불치의 병이 아닙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암을 극복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위기라고 하는 것은 상황이 조금 어려울 뿐이지 결코 오르지 못할 산, 결코 건널 수 없는 강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극복 할 수 있을까요? 우선 우리는 위기를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그곳에 본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길에서 고난 당하고 능욕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다고 하신 말씀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인정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위기를 인정하십시오. 그런데 인정을 하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암 환자가 암을 인정은 하지만 포기하면 그냥 죽는 날을 기다리는 겁니다. 위기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자들은 두 가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데 첫째 먹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둘째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신앙의 위기도 똑같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위기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면 영적으로 영양실조에 걸리게 되고 하나님의 일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면 무기력하게 됩니다. 원망만 남게 됩니다. 우리가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의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포기하지 않고 예루살렘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게 조용히 던져지는 엄숙한 물음을 경청할 줄 알아야 하고 또 그 물음에 정직하게 대답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그 때 거기에 너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 있었느냐는 것일까요?

기도 동산 거기 너 있었는가?

평소에도 새벽 미명에, 혹은 밤을 새워 기도에 힘써오신 주님이지만, 주님의 최후의 주간 목요일 밤은 그에게 있어서 기도의 절정을 이룬 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매번 그렇게는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날 밤만은 마땅히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기도의 동산 겟세마네에 있었어야 옳습니다. 나를 위한 기도에 내가 외면할 수 없는 일이라면 제자들도 그날 밤 주님의 기도 동산 거기에 있었어야 옳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저들 중에 주님의 기도에 함께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기도 동산 거기에 너 있었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십자가 언덕 거기 너 있었는가?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던 기적의 자리에는 수만 명의 무리가 있었고 떡을 먹여 주시던 벳새다 광야에는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었건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 거기에 저들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따르던 군중은 물론이요, 사랑하며 가꾸어 놓은 열 두 제자 마저도 요한 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십자가를 회피하고서는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주님이 그 나무 위에 달릴 때, 해가 그 밝은 빛을 잃을 때, 주님을 그 무덤 속에 뉘일 때, 주님이 그 무덤에서 나올 때 그때 거기 너 있었느냐고 물으신다면 신앙고백적인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죽음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서서히 죽어 가야 하는 것이 십자가에 달린 자의 운명입니다. 세상에 이 십자가 형틀만큼 무서운 고문이 어디 있으며 십자가의 죽음만큼 잔혹한 죽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로마의 시세로(Cicero)는 십자가를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죽음"이라고 말했습니다.

필리핀에 있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직접 체험해 보겠다고 자기 손에 못을 박았다고 합니다. 발에는 박지 않고 양손에만 박았는데 그는 못을 다 박기도 전에 그만 까무러쳐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정신이 흐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명 한 마디 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고통을 안으로 흡수하면서 홀로 그 모든 고통을 견디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모든 고통을 그렇게 감내할 수 있게 만든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강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고통 할 때 비명을 지를 수 있지만 사랑 때문에 고통 당하는 사람은 비명을 지르지 않습니다. 사랑 없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까무러칠 수 있지만 사랑 때문에 고통 당하는 사람은 까무러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려 있게 한 것은 철 못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데 성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것입니다. 숨이 끊어지는 마당에도 "아, 이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되었구나. 이 죄인들이 드디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되었구나. 이 사랑 때문에 이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받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서 마음속에 기쁨이 샘솟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쳐다보는 나무가 아닙니다. 하도 오래되어서 나무처럼 느끼실 지 모릅니다. 이 나무는 우리가 주머니에 가지고 올 수 있는 나무가 아닙니다. 이 속에 달린 예수그리스도는 이천 년 전에 지나간 사건이 아닙니다.

여러분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물을 마시면 갈증이 없어집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물이 흐르는걸 보고 어떤 사람은 물과 대화를 합니다. 물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생명체입니다. 물과 대화를 하다가 거기서 시를 씁니다. 물과 대화를 하다가 그림을 한 폭을 그립니다. 물과 대화를 하면서 노래하나를 만듭니다. 찬송 하나를 만듭니다. 하늘에 뜬 별을 보고 별이라 하지 않고 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엄청난 시를 썼습니다. 시편이 그겁니다. 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고 달과 이야기를 하다가 엄청난 감동을 받고 그림도 시도 작곡도 합니다.

사람과 사람만 대화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과 우리는 대화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대화의 상대자는 오늘 수난절을 시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대화의 상대자는 바로 십자가와의 대화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과 대화하십시오.

십자가는 세상의 죄를 없이 해줍니다. 세상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십니다. 죄를 없이 해주십니다. 죄악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죄인을 구해주십니다. 우리가 믿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화와 생명의 대화의 상대자이십니다. 지금 곧 십자가와 대화를 시작하십시오. 이 대화를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은 혹시 없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태양이 비춰서 좋은 날이지만 내일은 구름이 낄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나간 어제는 이미 우리 것이 아닙니다. 지금 주어진 이 수난의 순간을 여러분의 결단과 대화의 순간으로 삼으십시오. 지금 은혜가 임합니다. 지금 그리스도가 말씀하십니다.

혹시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시면, 사랑의 말을 하고 싶으시면 지금 하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곁을 금방 떠날지도 모릅니다. 부르고 싶은 찬송이 있으면 지금 부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의 해가 서산으로 지면 노래 부를 수도 없습니다. 부르고 싶어도 못 부릅니다. 숨이 있는 동안 기도하십시오 생명이 있는 동안 노래하십시오.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수난의 아픔을 부활 이후로 미루지 마십시오. 그때는 수난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내일은 우리에게 보장되지 않습니다. 수난의 계절이 지나면 부활은 당연히 오는 것이 아닙니다. 수난 속에 부활이 잉태가 되고 뿌리가 되고 나무로 자라서 열매가 됩니다. 수난의 텃밭에 부활의 열매가 자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한편의 작품을 만들면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하십니까? 기획도 해야 하고 생각도 해야 하고 고심하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일단 작품하나를 만들면 그걸 연주하기 위해서 그걸 읽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얼마나 훌륭합니까? 우리의 몸과 마음을 통째로 다 바칩니다.  그림 한 폭도 그렇습니다. 노래 한 곡도 그렇습니다. 시 한 편도 그렇습니다.

에베소서가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만드신 위대한 작품이라고. 하나님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고심하셨겠습니까? 시편 기자 말이 하나님,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지만은 이렇게 저희를 생각해주시고 이렇게 돌봐주시면서 우리를 당신의 작품으로 만드십니까? 작품에는 그 속에 작가의 혼이 들어가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인간 속에 우리 가정 속에 우리 사회 속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혼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10세기경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불렀던 십자가의 찬송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길 잃은 자들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저는 자의 지팡이 입니다. 십자가는 눈 먼 자들의 안내자입니다. 십자가는 약한 자들의 힘입니다. 십자가는 절망에 빠진 자들에게 힘입니다. 십자가는 노예들에게 해방입니다. 십자가는 헐벗은 자들의 옷입니다. 십자가는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치유입니다. 십자가는 물을 찾는 자들에게 샘물입니다. 십자가는 뿌리내린 나무에 부어지는 생명수 물입니다. 십자가는 죄악과 허물에 허덕이는 자들에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죽어 가는 사람들의 생명이요 부활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십자가 종탑은 시카고 템플 교회에 있습니다. 어느 날 수많은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이 탑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번화가 네거리에 이 탑이 있지만 그 동안 쳐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날 따라 주목거리가 된 것은 높은 탑의 십자가에 일군이 매달려 수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빈 십자가는 관심 밖에 있었으나 사람이 달려 있을 때 그 십자가는 세상의 눈길을 모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잘못 지고 있는 자신의 십자가를 이번 고난 주간을 통해 바로 수리(修理)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바로 자기 자신이 달려 있지 아니하면 자신의 가정과 이웃, 그리고 나라 민족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난의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려질 때 가정과 나라 민족이 "나음"을 입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 고난의 잔"은 우리에게 "삶의 치유와 축복의 잔"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받으시는 성찬예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의 잔"에 동참하시므로 여러분의 삶에 "치유와 축복의 잔"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