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성도(교회)
사도행전 9: 36-43
설교 : 김창인 목사
오늘은 사도행전 9장 36절에서 43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신령한 성도(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성도라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신령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3장 1절을 보면 바울사도가 세가지 종류의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내 알바가 아니라고 하면서 자기 육의 탐욕을 위해서 살고 또 자기 육적인 것만 찾아서 구하고 그것 밖에 모르는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은 조금 다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교회에 나오고, 세례도 받고, 아내가 사정하여 교구장님이 긍휼히 여겨서 집사 직분을 배급받은 경우입니다. 그렇게 직분을 받다 보니 집사는 쉽게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집사 직분을 하찮게 여깁니다. 그러다보니 주일날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나오기 싫으면 나오지 않습니다. 어느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아서 나중에 알아보면 설악산에 가고 어느 주일에 또 교회에 나오지 않아서 알아보면 대천 해수욕장에 가고 그런가하면 어느 주일날은 교회에 나옵니다. 분명히 믿기는 믿는데 어떻게 보면 안 믿는 것 같고, 안 믿는 것 같은데 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쉽게 말씀드리면 믿기는 믿는데 제 멋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신령한 사람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첫 번째로 말한 육에 속한 사람과 정 반대가 되는 사람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땅의 것 보다 하늘의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가르쳐 신령한 사람이라고 바울사도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다비다라고 하는 여자입니다. 다비다는 아주 신령한 성도로서 살아갑니다. 다비다의 신령한 면모를 오늘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가진 것을 나누는 성도(교회) (36-39)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어느 정도 훈련시키신 다음에 둘씩 짝을 지어서 전도하러 보냅니다. 전도를 하러 나가는 제자들은 걱정이 많습니다. “먹을 것은 어떻게 해결할까요?”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책임을 진다” 주님이 책임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하러 나가다 보면 노자 돈도 있고 비상금도 좀 있어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요?” “돈 걱정하지 말아라 그것도 내가 다 책임지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제자들에게 병자들을 척척 일으키고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온갖 역사를 할 수 있도록 능력까지 주어 보내셨습니다. 몰론 복음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3년 동안 복음을 떠 먹이듯이 가르침을 받았으니 전해 줄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밖에 받은 것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것 중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벌거벗고 쌀 한톨 갖지 않고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이렇게 갖추고 사는 것은 전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죽을 때에는 역시 벌거벗고 죽습니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받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거저 받았으니 거주 주라’ 이것이 사랑 아닙니까? 그런가하면 예수님이 한번 더 심각한 교훈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오늘 친구들에게 대접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내일은 그 친구가 나에게 대접을 해 줍니다. 대접하니까 대접을 받는 이런 대접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네 주위에 지금 끼니가 없어서 점심을 먹지 못하는 이웃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데리고 나가서 점심을 대접하면 그 사람이 너에게 그것을 갚지를 못하지 않겠느냐? 바로 그런 나눔이 뜻 있는 나눔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못 갚을 때 예수님께서 “내가 갚아 주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잠언 19장 17절을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나에게 갚지 못할 사람에게 나누고 베푸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 되어 하나님께서 장부책에 올려놓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것을 갚아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께 돈을 떼인 사람이 있으십니까? 절대 떼이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 즉 나누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십니다. ‘베풀다’라는 것과 ‘나누다’라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교회에서 저에게 생활비를 주는 것은 김창인 목사를 보고 주는 것이지 제 아내를 보고 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목사가 아니라면 제 아내에게 생활비를 줄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생활비를 받으면 아내에게 구제하는 것입니까? 생활비는 내 것이니 당신은 나에게서 구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입니다. 나누는 것은 똑같이 참여할 권한이 있다는 뜻입니다. 즉 공동운영체이기 때문입니다. 내 것만이 아니라 너의 것도 되기 때문에 당연히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베푼다는 것은 다릅니다. ‘베풀다’는 것은 내것을 네게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 성도는 베풀기도 해야 하겠지만 나눔의 정신이 더 귀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이 바로 신령한 성도입니다. 이처럼 나눔의 의미에서 베푸는 것이면 좋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6절에서 39절을 보면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욥바라고 하는 큰 동네에 다비다라고 하는 예수 잘 믿는 신도가 있었습니다. 이 여제자에 대해서 성경은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행과 구제는 조금 다른 말입니다. ‘이 동네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도록 돈 내 놓으라’할 때 다비다가 척척 내 놓았습니다. 선행이라 할 수있습니다. 그리고 아무개가 철이 바뀌었는데도 갈아 입을 옷이 없다고 하면 슬그머니 옷 한 벌을 지어 줍니다. 추운 겨울에 내복도 못 입고 산다고 하면 슬그머니 내복을 한 벌 사다가 건네 줍니다. 그런 선행과 구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다비다라고 하는 여자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왜 그렇게 착한 사람이 빨리 죽는 경우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욥바라고 하는 동네에서 얼마 멀지 않은 룻다에 베드로가 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람을 보내서 베드로를 빨리 오라고 청합니다. 그 사이에 다비다의 시신을 깨끗이 씻어서 다락에다 뉘워 놓았습니다. 베드로가 다락에 올라가 보니 그 동네 많은 과부들이 모여서 얼마나 울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 과부들이 베드로에게 하나같이 자기 겉옷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겉옷과 속옷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비다가 살아 있을 때 우리가 철이 바뀌어도 입을 옷이 하나 없을 경우 다비다가 남 모르게 지어 준 것입니다. 이 속옷도 다비다가 지어 준 것입니다”라고 거기에 모인 많은 과부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비다는 이렇게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다비다가 무엇을 가지고 이렇게 많은 선행과 구제를 했는지 아십니까? 가끔씩 “목사님 제 고향 본 교회가 약한데 십일조는 그리로 보내서 그 약한 교회를 도우면 안될까요?”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내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손을 대면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속한 교회에 십일조는 내야합니다. 그 다음에 본 교회를 돕고 싶으면 십일조 외에 내 것을 가지고 할 일이지 왜 하나님 것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십니까? 그것은 분명히 잘 못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비다는 하나님께 헌금 한 것 가지고 이 사람을 돕고 저 사람을 도와준 것이 아닙니다. 일단 헌금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은 전도하는 일을 위해서 쓰여져야 합니다. 다비다의 선행과 구제한 일은 전부 자기의 것을 가지고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헌금 가지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 즉 전도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구제하는 일은 내 것을 가지고 나누어야 합니다. 자기의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이 신령한 성도입니다. 네가 필요할 때 주머니 끈을 풀을 수 있고 꽉 쥔 손을 펼 수 있는 성도가 신령한 성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가진 것을 함께 나눈다는 자세로 살아야겠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가 먹고 써야만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퍼 주는 것도 내가 누리는 것입니다. 이 말을 쉽게 말씀드리면 이 세상에서 땀흘려 돈을 열심히 벌어서 좋은 일 많이 하고 죽는 것이 너와 나누는 생활입니다. 신령한 성도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까닭에 세상의 것을 가지고 인색하지 않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이 신령한 성도입니다.
둘째, 예수를 보여주는 성도(교회) (40-41)
내가 가진 것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사람이 신령한 성도요, 그 다음에는 자신을 통해서 예수를 보여주는 사람이 신령한 성도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웬 사람이 나타나더니 그럴듯한 말을 가지고 충동질을 합니다. 그 내용은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본래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불러 3년 동안 잘 가르친 다음에 이제는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라 하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 사도인데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적이 언제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가짜 사도라는 것입니다. 말이 그럴 듯 합니다. 이렇듯 항상 충동질하는 사람의 말은 그럴 듯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다메섹 가는 길에서 불렀습니다. “나는 너를 이방인의 그릇으로 택하여 보내노라”하여 분명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보내심을 받은 사도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고린도 교인들은 혹시 그 말이 맞는 것이 아닌가 의아해 하였습니다. 이 때 바울사도가 편지를 하면서 ‘내가 사도라 하는 것을 베드로에게서 추천서를 받아다가 너희에게 제출해야 하느냐 너희 자신이 나의 추천서요, 나의 편지가 아니냐(고린도후서 3장 1절이하)’고 하였습니다. 편지를 보게 되면 그 사람을 알게 됩니다. 가령, 제가 아무개에게 편지를 했다고 합시다. 편지에 저의 주소가 있기에 ‘이 사람은 서울사람이구나’하고 알지 않습니까? 그리고 글씨를 보면 사람의 성격을 알게 됩니다. 글씨를 모나게 쓰는 사람은 영락없이 성격이 모가 난 사람입니다. 글씨를 둥글 둥글하게 쓰는 사람은 영락없이 성격이 둥글 둥글 합니다. 글씨를 자기만 알고 남 모르게 휘갈겨 쓰는 사람은 성격이 엉큼한 사람입니다. 자기 성격대로 글씨를 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글의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배웠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편지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내가 추천서를 받아 올 필요가 뭐가 있느냐? 너희가 바로 내 편지가 아니냐? 너희를 보면 곧 나를 알 것이 아니냐?’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전도를 받았고 바울의 양육을 받았기 까닭에 얼마나 바울을 많이 닮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너희를 보면 내가 누군지 알 것 아니냐? 추천서가 무엇이 필요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의 편지이기도 하지만 예수의 편지다’라고 했습니다(고후 3:3). 너희를 보고 모든 사람이 예수를 읽어 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너희는 예수를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김창인 목사가 여러분들에게 나 자신 즉 김창인을 보여주면 안되지 않습니까? 나를 보여줘서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를 보여 주고 예수를 따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짜 목사가 아니겠습니까? 목사가 이렇다면 여러분들도 세상에 나가서 똑같은 입장에서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보여줘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신령한 성도는 반드시 예수를 보여주는 성도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0절에서 41절을 보면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청함을 받고 빨리 갔더니 다락으로 안내를 합니다. 올라가 보니 시신을 앞에 놓고 그 많은 과부들이 얼마나 울고 통곡을 하는지 기도해 달라고 청해 놓고 왜 이렇게 울고만 있는지 베드로는 답답했습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아서 모두 내어 보내고 베드로 혼자 기도를 합니다. 함께 기도하면 좋은데 왜 나가라고 했습니까? 기도에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기도에 훼방이 되므로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계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철야기도할 때 남에게 기도에 방해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하면서 박수를 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옆에 가서 제가 박수를 한 번 쳐 볼까요? 얼마나 옆의 사람에게 방해가 되는지 아십니까? 어떤 사람은 가슴을 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무릎을 치기도 합니다. 어느 날은 본문의 말씀처럼 나가라고 하고 싶은데 긴 의자 한 가운데서 기도하고 있으니 거기까지 들어갈 수가 없어서 나가라고 하지는 못하고 기도 끝날 때 까지 기다리느라고 혼이 났습니다. 기도하면서 남에게 방해하지 마십시오.
베드로가 모든 사람을 다 내보내고 혼자 기도를 하는데 응답이 왔습니다. 시신을 향해서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말하자 다비다가 눈을 번쩍 뜨더니 일어나 앉았습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앉은 다비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는 욥바에 있는 성도들과 울고 있던 과부들에게 “들어와서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웬 일입니까? 죽었던 다비다가 살아난 것이 우연히 된 것입니까? 베드로가 요술을 부린 것입니까? 분명히 주님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사랑이요, 축복입니다.
‘다비다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라는 말씀은 능력의 주님을 보여 주었다. 축복의 주님을 보여 주었다. 사랑의 예수님을 보여 주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살든지 죽든지 우리 자신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는 사람이 바로 신령한 성도입니다.
교회 안에서야 누구인들 신령한 것처럼 못하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 직장 혹은 동네에서 예수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야 다 거룩합니다. 교회 안에서 믿음 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동네에서 믿음을 보면 되고 여러분의 직장, 여러분의 가정에서 믿음을 볼 수 있으면 됩니다. 거기에서 예수를 꼭 보여주는 신령한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영향을 끼쳐 주는 성도(교회) (42-43)
예수님께서 팔복을 가르쳐 주신 다음에 이어서 하신 말씀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이니’라는 말씀은 소금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앞으로 소금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까? 소금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기도할 때 ‘주여!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게 주시옵소서’라고 기도 하십니까? 이미 소금 되었는데 왜 소금이 되게 해 달라고 하십니까?
여러분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될 것입니까? 이미 중생하여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는데도 ‘하나님! 이번 기회에 중생을 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라고 힘주어 기도하십니까? 이미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사람은 중생하는 은혜 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입니다. 벌써 중생했기 까닭에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 아들이나 딸이 책이 필요하면 “아버지, 책을 사야 되는데 돈 삼만원만 주십시오”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버지, 저로 하여금 아버지의 아들 되게 해 주시옵서소”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들이 되었는데 왜 아들이 되게 해 달라고 하십니까? 그러므로 다시는 중생하게 해 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또는 소금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아들 딸 노릇 잘 하게 해 주시옵소서. 소금 노릇 잘 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곰 거리를 사다가 푹 끓였더니 곰국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끓인 곰국이 먹을 만합니까? 먹지 못할 것 같습니까? 그러면 곰국을 끓여서 드릴 테니 먹을만 하면 먹어 보십시오. 소금을 치지 않은 것을 어떻게 먹습니까? 소금을 적당히 쳐 넣으면 제 맛이 납니다. 곰국 맛이 좋다는 소문이 난 음식점이라면 차를 한시간 두시간을 타고 가더라도 그 집에 가서 사 먹습니다. 곰국에는 소금이 들어가야 제 맛이 납니다. 소금이 영향을 끼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금은 절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영향을 받게 되면 자신은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영향을 줄 지라도 받지는 않습니다.
가령 이웃에 믿지 아니하는 친구가 있다고 합시다. 광성교회 교인이 그 믿지 않는 친구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영향을 받았으니 그 교인은 주일에도 설악산에 갑니다. 그 다음 주일에도 보이지 않아서 알아보면 대천 해수욕장을 갔다 왔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영향을 받아 세상에 동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입니다. 믿지 않는 친구에게 내가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나의 영향을 받아 내게 동화를 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그 친구는 주일에 어디를 갑니까? 예배당에 나옵니다. 믿는 사람은 영향을 줄지라도 절대 세상의 영향을 그대로 받으면 안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2절에서 43절을 보면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욥바에 교회가 있었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온 욥바 사람이 다 믿었다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전부 예수 믿고 돌아왔습니다. 누구의 영향을 받았습니까? 다비다가 죽었다 살아나는 사건으로 인하여 성도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믿는 사람의 영향을 받았고 믿는 사람은 그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전부 동화되어서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영향을 주었을지라도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신령한 성도는 영향을 주는 성도입니다. 세상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영향을 받지 마시고 가는 곳마다 영향을 주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령한 성도만이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결론을 짓겠습니다. 신령한 성도는 자기의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의 욕심만 따르기 때문에 절대로 나누지를 못합니다. 신령한 사람은 세상 것에 구애를 받지 않기 때문에 나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을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신 이외에 보여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편지이기 까닭에 예수님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 신령한 성도입니다. 소금은 영향을 줄지라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신령한 성도는 불신자에게 영향을 주어 동화를 시킵니다. 여러분들은 금년에도 좀 더 신령한 성도로 살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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