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생활에 참여합시다
본문: 사도행전 4: 23-31
설교 : 김창인 목사(광성교회)
교회를 공동체라 합니다. 생명의 공동체라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 중심으로 모였기에 생명의 공동체라 그럽니다. 믿는 사람들만이 모였기에 신앙의 공동체라고도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 몇 번은 나올지 모르나 여기에 참여를 못합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을 서로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운명을 함께 하는 운명공동체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신령한 모임이요 신령한 공동체입니다.
I. 은혜의 공동체 생활 (23-26)
은혜 받는 자리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임을 통해서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 그 장면을 친히 목도한 사람들이 500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너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까지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끝까지 기도하며 성령 충만 받고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120명밖에 안됩니다. 그 나머지는 참여하지 아니했습니다. 은혜 받는 자리에 빠지면 은혜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 참여한 사람으로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참여하지 아니한 사람이 은혜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였다 하면 은혜 받고 또 은혜 받기 위해서 모임에 빠짐이 없어야 됩니다.
본문 23절에서 26절까지를 보면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 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도다 하신 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설명하면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데 오후 세시였습니다. 우리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해야됩니다. 새벽기도의 시간을 정하거나 그 시간을 정할 수 없으면 저녁에 나오기도 하고 또 한 낮에 집에서 하기도 하고 시간 정해놓고 기도하면 좋습니다.
두 사도는 시간을 정해 놓고 꼭 예배당에 나가서 기도하는데 성전 문밖에는 나면서 앉은뱅이로 평생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행하게 젊음의 세월을 다 보냈습니다. 그런데 한 푼 달라고 구걸을 합니다. 구제는 안 해주는 것보다 해주는 것이 낫지만 그 때뿐입니다. 근본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두 사도는 그의 손을 붙잡고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사람이 일어나 성전 안으로 뛰어들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찬송하며 기뻐합니다. 이 사건을 보고 저마다 예수 믿겠다고 모여와서 5천명이 되었다는 겁니다. 유대인관원들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공회의원들은 속이 상하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없애면 다 흩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5천명의 교인은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에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왔습니다. 목에 칼을 대고 다시는 전도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관원들이 협박했습니다. 계집종에게 끌려 다니면서 한 번만 살려달라고 사정하며 예수님을 저주할 때 같으면 모르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너희가 전도하지 말라고 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들의 말 듣는 것이 옳은가? 어림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목숨을 내 놓고 대답할 때 저들도 어찌할 수 없어서 석방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동료에게 가서 이 말을 하는데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그 말을 들었던 모든 사람들이 일심으로 하는 말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하나님은 과연 하나님이시다."고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이 체험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 은혜에 참여했다는 겁니다.
지난주간에 중국에 다녀왔습니다. 중국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만 하다가 직접보고 왔습니다. 홍콩으로 해서 남경에 먼저 들어갔습니다. 우리 교단에서 7명이 함께 갔는데 중국 기독교협의회의 공식 초청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 정부도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직업에 "목사"라 쓰고 들어갔습니다. 지금까지 가신 분들은 관광으로 갔기 때문에 목사 신분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모택동이 중국을 공산화시키기 이 전에는 전국에 교인이 70만 명이었는데 공산화되고 문화혁명이 일어나 교회가 문을 닫았다는 겁니다. 교회를 빼앗아 공장도 만들고 창고도 만들고 학교도 만들고 목사들은 붙잡아 고문을 하고 그래도 예수를 믿겠다면 강제노동, 혹은 탄광에 보내고 공장에 보내고 농장에 보내어 중노동을 시켰습니다. 그러다가 등소평이 등장해 개방정책을 쓰면서 교회는 다시 문이 열렸습니다. 빼앗았던 교회를 다 돌려주고 교회는 목사님을 다시 모시게 되었습니다. 십년 동안 모든 교인들이 영적으로 얼마나 갈급 했겠습니까? 안 믿던 사람들까지 믿겠다고 교회를 찾아들었습니다. 십년 만에 늘어난 교인수가 육백만 명입니다. 칠십만이 십년 만에 육백 만이 되었습니다. 교회마다 감당을 못할 만큼 많이 모여왔습니다. 그러나 신학생들을 많이 뽑지 못합니다. 중국 당국의 정책이기 때문입니다. 즉 말려 죽이는 고사정책입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가 부족해서 난리입니다. 무쵸울루교회 한피덕 목사님이 설교를 해달라 합니다. 사실상 모택동 공산화 이후로 한국사람이 중국인만 모인 교회에 가서 공식으로 설교한 것은 제가 처음입니다. 설교를 하는데 삼십 분쯤 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한 시간을 하라는 겁니다. 내가 한 시간 하면 중국말로 통역해야 함으로 두 시간입니다. 그 교회의 교인들이 얼마나 열심인지 열시에 예배드리는데 한시간 전부터 나와 찬송공부를 한답니다. 예배한 시간 전에 갔는데 본당이 다 차고 뒤에 있는 마당까지 의자를 갖다 놓았고 교육관에는 텔레비전을 놓았는데 자리가 없습니다. 한 시간동안 찬송을 뜨겁게 부르고 설교를 한 시간을 하는데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하는지라 그들의 태도가 너무 진지하였습니다. 예배가 끝났는데 갈려고 생각을 안 합니다. 은혜를 사모하고 주일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열심히 모이고 은혜 받습니다. 다음 북경에서 상해로 갔다가 심양에 갔습니다. 심양에는 조선족만 모이는 유명한 서탑교회가 있습니다. 서탑교회 오애은 목사님이 주일날 또 설교를 해 달라고 해서 몇 분이나 할까요. 했더니 세시간을 해달라고 합니다. 처음에 농담인줄 알았는데 참말이었습니다. 설교를 세시간 하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교회에서 부흥회을 해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시간 설교를 했습니다. 서탑교회는 10시에 예배를 시작하는데 9시부터 성경공부를 합니다. 반별로 나누어 공부할 방이 없어서 본당에서 하는데 아홉 시가 되니 벌써 자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문틈으로 들여다보았는데 열심히 성경공부를 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멀리서 오는 사람들입니다. 십리 이십 리를 은혜를 사모하고 왔기 때문에 예배가 끝났는데 집에 가지 않고 저녁예배까지 드리고 간다고 하면서 기다립니다. 그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의 믿음이 순수합니다. 그러나 국법에 의해서 나가 전도는 못합니다. 개인적으로 집에 가서는 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믿고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은혜 받는 자리에는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모이고 불같은 열심으로 모일 때 믿음이 자라서 건강한 믿음이 됩니다. 은혜의 공동체에 빠짐없이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II. 기도의 공동체생활 (27-30)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기도하는 일에 빠지지 말자는 말입니다. 29절에서 31절 상반절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기도 끝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제단을 쌓았습니다. 바알의 선지자가 제단을 쌓아 놓고 불이 내려오기를 기다렸으나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엘리야 차례가 되어서 제단을 쌓아 놓고 장작을 벌리고 제물을 갖다 놓고 기도를 합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끝나자 마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모두 다 태웁니다. 엘리야는 승리하고 바알의 선지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기도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한가지 더 예를 더 든다면 베드로가 붙잡혀가서 옥에 갇혔습니다. 교인들이 밤이 새도록 모여서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같이 석방되었고 그 동안의 간증을 들은 성도들은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은혜 받으면 기도하고 기도하면 은혜 받습니다. 본문의 기도를 뜻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들이 우리를 못살게 구는데 감찰해 주옵소서 우리가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우리 중에 병든 자가 있는데 가난해서 병원에 갈 수 없거나 병원에 가도 못 고치는 병이 있을 때 기도하면 낫게 해 주옵소서 기적과 표적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타나게 하옵소서."라고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였습니다. 천지가 진동할 만한 역사가 일어났다는 겁니다. 모임에 참여했던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덕을 톡톡히 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 장로교 총회에서 전국에 있는 200만성도 오 천교회 살림을 전부 맡아 수고하시는 주계명목사님이 총무이신데 이번에 중국에 같이 갔습니다. 호텔에서 한방에 둘이 지냈습니다. 두 주일을 지냈는데 그 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심양에 갔을 때인데 거기서 두 시간을 차를 타고 가면 싸투재라고 하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해방될 때까지 거기서 지냈습니다. 고향이요 본 교회가 그 곳에 있습니다. 일본이 망하고 해방된 후에 살기가 어려워 평안도 부모님의 고향으로 왔습니다. 평안도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이유를 알아보니 예수를 믿어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공부할 길이 막히고 공부는 하고 싶고 그래서 아버지와 형님의 허락을 받고 월남하게 되었습니다. 남쪽에 가면 작은아버지가 계시기 까닭에 주소만 듣고 떠나 왔습니다. 경상남도 남해라고 하는 섬에서 작은아버지, 주관준 목사님께서 목회를 하시므로 찾아갔습니다. 뜰 앞에서 아이들이 있기에 주관준 목사님 댁이 여기냐 했더니 아이들이 뛰어 들어가 아버지 웬 거주가 찾아 왔어요. 그럽니다. 작은아버지를 보니 눈물이 얼마나 나오는지 울고 또 울었습니다. 작은아버지는 자기를 몰라봅니다. 아버지 이름을 말씀드리니까 너는 내 조카다 하며 들어오라 합니다.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사정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마치고 목사가 되고 해병대 군종감으로 지냈습니다. 또 해군 군종감도 지냈고 지금은 총회 살림을 맡고 있습니다.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아버지의 이름이 그렇게 고마운 것은 평생 처음이었다는 겁니다. 항상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 덕을 톡톡히 봤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의 덕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기도입니다. 아쉬운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덕을 보고 도움을 받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본문에서 오천명 교인들이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밤을 새워 기도했습니다. 진동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은혜 받는 자리에 빠지지 말고 기도하는 자리에 꼭 동참해야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의 고마움을 깊이 체험할 것입니다.
III. 선교의 공동체 생활 (31-)
31절에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중생은 평생에 한 번입니다. 구원은 1회적입니다. 그러나 충만은 계속적입니다. 그래서 재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중생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일입니다. 아들은 한 번 태어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충만은 일하는 것과 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계속 받아야 합니다. 영적 실력자가 되어야합니다. 본문을 가리켜 제 이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평안한 것은 딱딱한 의자보다 푹신한 의자에 앉으면 편안합니다. 편안한 것은 돈이 주는 겁니다. 평안은 푹신한 자가용에 절반쯤 누워 다니면서도 평안할 수도 있고 불안할 수도 있습니다. 평안의 반대는 불편이 아니고 불안입니다. 그래서 평안은 돈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이걸 체험한 사람은 예수를 믿고 전도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전도하라고 해도 못합니다. 이런 평안을 체험한 사람은 전세방이나 십 오평 아파트나 또 궁궐 같은 집에서 산다고 해도 주님으로 만족하고 주님으로 평안함을 얻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라고 담대히 전도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고 열심히 전도하는 일에 빠짐이 없어야 합니다. 전도는 다른 것으로 대신 할 수 없는 사명입니다.
교회는 구원 얻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예배에 출석은 하지만 교회가 하는 일에는 구경꾼 노릇을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먼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는 은혜의 공동체에 빠짐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기도의 공동체입니다. 기도하는 일에 다함께 참여하여 모인 곳이 진동하는 역사를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구원 얻은 성도라면 구원의 복음을 증거 하는 선교공동체에 앞장서서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본문의 가르침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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