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사도행전

[행 7:54] 우리도 그와 같이 _ 이득희 목사

'코이네' 2024. 1. 8. 20:36

우리도 그와 같이 

본문 : 사도행전 7:54~60

설교자: 이득희 목사

 

 

오늘은 남선교회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 교회 부흥과 남선교회와의 관계는 서로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게 됩니다. 사도들은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고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수천명씩 교회로 몰려들고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의 수를 날마다 더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부흥 가운데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지다 보니까 구제 문제에 있어서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6:1절에 보면 헬라파 유대인이 히브리파 유대인을 원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흥하는 교회에 큰 위기가 닥쳐오고 복음에 장애물이 생긴 것입니다. 교회 안으로부터 생긴 시험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 밖에서 오는 시험은 오히려 교회를 더 하나 되게 하고 강하게 만들지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시험은 교회를 분열되게 할 우려가 많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는 이 문제를 지혜롭게 처리합니다. 일곱명의 집사를 세워서 그 일곱 집사로 하여금 구제와 공궤를 담당하게 하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을 전담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이 일곱명의 집사를 선출한 것이 결과적으로 교회에서 남선교회가 조직되었던 최초의 기록으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행6:7절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로 기록합니다. 이것은 곧 남선교회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초대 교회가 단순히 남선교회가 구성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회의 갈등이 해결되고 부흥하는 것은 조직의 존재 유무가 아닙니다. 위원회가 많다는 것은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닙니다. 교회는 그 덩치가 크기 때문에 또는 조직이 여럿 있기 때문에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구성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가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초대 교회 남선교회 회원들, 그들은 가슴속에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일곱집사 모두에게 언급되는 공통된 특징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믿음이 신실하고, 사람들로부터 칭찬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 일곱명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오늘 본문에 순교자로 소개되는 스데반입니다. 그는 일곱집사 중에 맨 먼저 명단이 올라 있습니다. 특히 스데반은 다른 사람에 비해 그의 인품, 설교, 죽음의 순간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교회의 봉사자로서, 전도자로서, 철저한 신앙인으로서, 또한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자로서 우리 남선교회와 성도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

하나님께서 스데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앙인의 모습은 먼저 성령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55절에 스데반이 성령 충만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6:5절과 6:10절에도 성령의 사람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군의 자격은 성령충만한 자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가장 먼저 필요했던 것이 성령의 도우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위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들의 행진도 성령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분부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였습니다.

성령이 역사 해야 하고 성령이 아니면 안되기에 가장 먼저 성령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령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남선교회의 리더는 성령이셔야 합니다. 성령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생명력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재능이 필요한 사람을 뽑습니다. 어제 잠시 TV를 보는데 슈퍼탤랜트를 뽑고 있었습니다. 주로 보는 것이 외모와 연기력이었습니다. 모두다 자신의 재능을 뽐내는 것뿐이었습니다.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이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힘 없이 자신의 힘으로 재능으로 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무리가 생기고 부작용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사명은 성령과 그분이 주시는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되지만 하나님의 신으로는 가능합니다. 주님께서도 성령의 능력을 덧입기 전에는 자신의 성역을 조용히 기다리셨습니다.

먼저 일부터 저질러 놓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입니다. 아무리 계획이 좋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부분은 조용히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를 숙이고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는 것이 성령의 능력 분양 0순위에 해당되는 일입니다.

 

개척한지 3년이 되는 어떤 교회가 있었습니다. 불과 3년안에 교인수가 늘어서 1,2부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결국에는 교회 부지를 구입하고 새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감격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건축위원을 어떤 사람으로 뽑을까 하는 문제였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합니다. 부동산에 밝은 사람으로 할 것인가, 사회적으로 발이 넓은 사람으로 할 것인가, 돈이 많은 사람으로 하면 결정적 순간에 좀 도움을 얻지 않을까? 교회의 연륜이 높은 사람으로 할까? 김집사가 건축위원 안시켜주면 교회를 떠날 사람인데 그 사람을 할까? 여러가지 인간적인 생각을 접어 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데 건축위원은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세우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첫째 기도하는 사람, 둘째 믿음으로 사는 사람, 셋째 성도들에게 칭찬 듣는 사람, 이렇게 기준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 일곱명을 뽑아서 세웠는데 기대했던 것처럼 이 일곱명이 모두 직장에 휴가를 내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3일동안 금식 기도부터 시작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에게 확신이 생기는데 우리 교회 건축위원 7명은 큰 부자는 없지만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큰 무기는 성령충만이다. 그들은 틀림없이 기도로 교회를 지을 것이고 믿음으로 세울 것이다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으로 부터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 5:32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반드시 성령을 주셔서 그 능력으로 감당하도록 만드십니다. 순종하려고만 해보십시요. 그러면 나도 모르게 힘이 생기고 못할 것 같은 일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행전 6:8이하에 보면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고 사람들 앞에서 담대히 전파합니다. 이러한 이적과 담대함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령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와 지혜의 사람

스데반은 성령만 충만한 사람이 아니라 은혜와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행전 6:8에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6:10절에는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표현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행사할 때는 은혜도 필요하고 지혜도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8을 다시 읽어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며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되어 있고 6:10절을 보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번 잘 보십시요. 두가지 경우가 다릅니다. 앞에서는 표적과 기사를 행하고 뒤에서는 담대히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두 성령의 권능이 역사 하지만 표적과 기사를 행할 때는 은혜가 함께 나타나고 담대히 전할 때는 지혜가 보완되고 있습니다.

 

표적과 기사는 성령의 권능입니다.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권능과 힘만 나타날 때는 무모해질 수 있습니다. 권능만 믿고 밀어붙이기 식이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은혜는 부드러움입니다. 사랑입니다. 은혜 없는 권능은 과격해질 수 있습니다. 권능 없는 은혜는 유약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공의가 함께인 것처럼 은혜와 권능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온화하면서도 강한 신앙, 이것이 스데반을 통해 보여주는, 우리의 신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성령과 지혜가 나타나야 합니다. 담대히 전한다는 것은 목소리만 높인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칫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심령을 건드리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말일 수 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하고 분별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다고 하면서 마구 쏟아 내는 말떄문에 그 과격한 언어의 파편에 맞아서 실족하는 사람이 간혹 생깁니다. 결국 능력은 체험했다 하더라도 지혜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특별히 앞장서서 주의 일을 한다는 사람일수록 은혜와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특별히 앞장서서 주의 일을 하고 계시는 여러분! 은혜와 지혜가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의 깊이가 있는 사람

스데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신앙인의 세번째 모습은 말씀의 능력, 말씀의 깊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목사도 아니었고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평신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깊이가 있었는가 하는 사실이 사도행전 7:1부터 53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7장의 내용은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창세기부터 예수의 십자가 사건까지 꿰뚫으면서 기독교의 역사와 복음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는 남선교회원으로서 자기가 맡은 일에도 책임을 가지고 일했지만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 더 열심을 낸 사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선교회가 모이면 주로 정치 이야기이고 여전도회가 모이면 TV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거의 레파토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늘 보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선거 이야기, 비자금 이야기, 여자분들은 TV에서 무슨 바람이 분다는 이야기가 화제꺼리가 되어 있습니다. 시각을 고정시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지금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가장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 안한다는 것은 성경 안 읽는다는 말입니다. 읽지 않으니까 할 이야기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에 깊이 들어가십시요. 가장 좋은 편을 택하는 것은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예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택한 마리아는 주님은 칭찬하셨습니다. 마르다의 열심과 분주함 보다 말씀에 대한 열망을 가지십시요. 말씀에 깊이가 없으니까 가벼워지고 흔들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깊은 곳에 그 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에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세상의 값진 것은 모두 깊은 곳에서 나옵니다. 진주는 얕은 개천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영적 보화도 깊은 말씀의 묵상 속에서 캘 수가 있습니다. 말씀에 깊이 침몰할 때 진한 은혜의 맛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들고 왔다갔다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말씀의 주변을 맴돌지 마십시오. 성경을 열고 그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십시요. 틀림없이 하나님이 거기 계시고 우리를 반갑게 만나 주실 것입니다. 어디서 만나는 하나님이 가장 확실하겠습니까 말씀 속에서 만나는 주님이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의 자랑이 어떤 어떤 사업을 많이 한다는 것 이전에 모든 성도가 말씀에 깊이가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남선교회가 먼저 하는 일이 선교사업 이전에 말씀 속에 깊이 들어가는 일을 먼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스데반처럼 말씀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사의 얼굴을 가진 사람

스데반을 통해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의 네번째 모습은 천사의 얼굴을 가진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행전 6:15절에 많은 사람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하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사의 얼굴은 타고날 때부터 잘 생긴 얼굴이 아닙니다. 인생의 과정 가운데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화장으로 메이크업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인품을 통해서 메이크업됩니다. 그래서 얼굴은 그의 인품이 빚어내는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링컨 대통령이 사람은 사십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 말은 얼굴이 곧 그 사람의 삶과 성품을 대변해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부자가 자기 딸을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자기 딸의 얼굴이 점점 아름답게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어느날 자기 딸을 만나러 학교에 가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자기 딸 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얼굴이 예뻐 보였습니다.

아니 어떻게 해서 이 학교 학생들은 이렇게 얼굴이 빛납니까?” 얼굴에 무엇을 바르는 게 있습니까? 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선교사가 대답하기를 얼굴에 무엇을 바르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의 마음속에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라고 했답니다.

그 마음에 성령이 충만하고 말씀으로 가득찬 사람은 먼저 성격이 변화되고 성품도 변화되고 외모도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과도 같습니다. 마음에 있는 그대로 얼굴에 나타나 있게 마련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습니다. 그래서 늘 얼굴에 광채가 있습니다. 고난과 죽음의 문턱에서도 천사의 얼굴로 보입니다. 스데반이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오히려 잡혀온 자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데반의 향해 비난과 야유를 퍼붓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는 여유가 있습니다.

시기와 미움이 있고 자신을 모함하는 곳에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 사명을 다한 자에게는 얼굴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험악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습니다.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돌들이 무섭지 않습니다. 본문 55절에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얼굴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심어 주고 있습니까? 화장을 한 얼굴 말고, 화장을 지운 얼굴에 천사의 얼굴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예수 믿는 기쁨이 얼굴에 드러나고 있습니까? 옆집 사람이 내 얼굴을 보고 달라졌다고 하던 가요?

어떤 광고에서 회사 동료가 친구에게 자네 요즘 달라졌어 매사에 자신이 있어 보여!” 라고 인사를 건냅니다. 그때 친구가 동료에게 그래, 생명보험에 가입했거든이라고 대답합니다. 생명보험에 가입하고 나서 걱정이 없어졌고, 얼굴이 달라지고 자신이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생명보험에 가입하고도 얼굴이 달라지는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생명보험 아니라 영생 보험에 든 삶입니다. 당연히 달라져야 합니다. 생명보험은 절대로 그 생명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자기 죽은 후에 보험금이 나옵니다. 오히려 죽을 때까지 보험료 내다가 죽은 후에는 자기를 위해서 한푼도 쓸 수 없습니다.

보험 때문에 얼굴이 달라진다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보험에 가입했으니 당연히 얼굴에 기쁨이 넘쳐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린 얼굴이 달라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웃에게, 자녀들에게 보여주는 얼굴이 천사의 모습이여야 합니다. 그 얼굴만 바라볼 때 고요함이 느껴지고 평안함이 느껴지고, 찬양을 부르고 싶어지도록 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간증을 없습니다.

예배 후에 돌아가실 때 밝은 얼굴로, 웃는 얼굴로 돌아가십시요. 올 때는 어떤 표정을 가지고 왔던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왔건 갈 때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미한 것처럼 돌아가십시오.

 

사랑과 용서의 사람

스데반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앙인의 모습은 사랑과 용서의 사람입니다. 스데반의 최후 모습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6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코리 텐 붐>이라는 여사는 독일군에게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했습니다. 그의 언니는 나치 수용소에서 독일군의 고문을 견디다 못해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전쟁 후에 코리여사는 독일의 마을 순례하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어느 마음에서 복음을 전하고 참석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거기서 그는 뜻밖에서 자기 언니를 죽게 했던 독일 간수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코리여사는 그때의 심정을 마치 심장이 얼어 붙는 것 같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저 인간을 결코 용서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점점 그 사람이 코리여사의 앞으로 인사를 하기 위해서 다가오는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코리의 마음속에는 갈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 그 마음속에 용서하라고 하십니다코리는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용서하라. 하나님,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갈등하고 있는데 갑자기 코리여사의 마음속에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왔습니다. “코리야 나는 내가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겠는냐, 안 하겠느냐는 묻는 것이다. 용서하라는 것은 나의 명령인데 내 명령에 순종하겠느냐, 안하겠느냐?”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하나님 명령이라면 할 수 없지요. 어쩔 수 없이 용서해야지요.” 그리고 나서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 없이 다만 하나님의 명령에 마지못해 순종하는 마음으로 손을 내밀었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손을 내밀어 그를 잡는 순간 주님께서 그 마음속에 그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용서가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 사랑하라,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랑하고 용서하기를 마음을 정하면 주님을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용서의 능력을 허락해 주십니다.

게리 콜린스가 쓴 크리스챤 카운슬링이란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설교자가 다음 주일에는 역사상 가장 짧은 설교를 하겠다라고 예고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 주일 아침에 그 교회는 앉을 자리가 없을 만큼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날 설교한 한마디는 바로 사랑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그날 예배는 은혜가 넘쳤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사람은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의 위대함은 그가 순교를 당했다는 것보다, 그 순간 용서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이 모습을 보고 예수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주님은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나 스데반을 보시는 주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셨습니다. 죽음을 당하는 순간 용서를 베푼 분은 자기밖에 없다는데 스데반이 그와 똑같은 모습을 보이니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 그래서 주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그 귀하고 아름다음 영혼을 받아 주신 것입니다.

 

스데반의 뚯은 면류관입니다. 그의 면류관은 아마 사랑과 용서의 면류관이었을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의 면류관처럼 빛나는 면류관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남선교회원 여러분!

오늘 남선교회 주일에 하나님은 스데반을 통하여 우리도 그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초대 남선교회 회원이었던 스데반의 삶과 신앙은 오늘 우리 남선교회와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함을 되여 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지혜와 은혜의 사람이 되 십시요.

말씀의 깊이가 있는 사람이 되십시요.

천사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 되십시오.

사랑과 용서의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을 철저히 닮은 신앙을 가졌던 스데반처럼 우리도 그와 같은 신앙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7 10

1996. 3. 17

 

 

 

 

 

 

 

 

 

우리도 그와 같이

 

설교자 :이득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