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능력으로 변화된 삶을!
성경; 행9:1-20, 계5:11-14, 요21:1-14.
두 사람이 시장에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무의미한 삶, 곧 죽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목적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요, 다른 한 사람은 그런 의식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은 시장(市場)에 뚜렷한 볼 일이 있어서 가는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사람이 장(場)에 가니까 따라 나선 사람인 것입니다.
아내가 요즘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시작한 지 채 1년이 안 되었으리라 생각되는데, 지도하는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곧잘 그린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습작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보고 그대로 흉내 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물을 보고 직접 그리는 창작의 단계에 들어가야 그림을 그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그림이나 사진을 보고 그리는 것은, 그림을 그린다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자연 사물을 직접 보고 그린다고 해서 다 창작이 아닙니다. 다른 그림을 보고 그리거나 자연을 직접 보고 그렸을 때에 아무리 기막히게 잘 그렸다 할지라도 거기에 작가의 혼이 들어 있지 않으면, 그림이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화가가 어떤 사물을 보고 느낀 느낌이 있어서 그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을 때에야 그림을 그린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그 작가의 사상과 인생의 의미를 그림을 통하여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런 의미가 그림에 내포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작품화된 그림이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장에 가는 사람이 어떤 목적 의식을 갖고 가거나, 화가가 자신의 그림에 작가의 정신을 담아 내어 그리는 것처럼, 우리가 인생을 살되 어떤 목적과 의미를 갖고 사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인생의 목적이나 뜻도 없이 그냥 저냥 세월만 보내며 산다면, 그것은 살았으나 죽은 자의 삶인 것입니다.
비록 교회를 다닌다 할지라도, 확고한 믿음이나 신념이 없이, 다른 사람이 다니니까 다니는 것은 믿음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곧 하늘나라에 대한 믿음이나 목표가 분명하지 않아서, 안 다니면 벌 받을까 봐 두려워 억지로 다니거나, 아니면 취미 삼아 신앙생활 하는 것을, 산 자의 믿음이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진실로 올바른 믿음이란, 부활 신앙을 말합니다.
아내가 지금은 그림을 그리되, 그림에다 혼을 담기 위하여 우선 혼을 담을 그릇인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림 그리는 기법을 완전히 터득하면, 그 그림에다 자신의 생각을 담아 그려낼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죽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그림입니다. 껍데기만 있는 그림입니다. 이제 그 그림에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담아 그리게 되면, 생명이 있는 창작품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처음 나오면, 무슨 진리를 알아서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터득하기 전에 교회 생활을 배우게 됩니다. 예배드리는 법과 기도하는 법, 그리고 헌금이나 봉사 생활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형식적인 믿음 생활일 수밖에 없습니다. 헌금을 해도 믿음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봉사를 해도 무슨 뜻을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진리를 깨달아 은혜를 받고 믿음 생기면, 그 믿음을 예배나 헌금, 또는 봉사라는 방법을 통하여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정성된 헌금이나 봉사 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진실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해서, 좋은 믿음이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형식적인 믿음이 곧 나쁜 믿음은 아닙니다. 그 형식적인 믿음에다 깨달은 진리를 담아 실천하면 부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하기사 진리를 먼저 깨닫고 처음부터 신앙 생활을 잘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란 극히 드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수많은 말씀을 듣고 배웠으며, 놀라운 기적과 이사(異事)를 직접 경험했건만,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먼저 형식적인 믿음 생활을 잘 배워서 성실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우리 집사람이 그림 그리는 법을 열심히 배우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난 후에야, 비로소 부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전에는 막연하게 진리를 알고 있어서, 천국이 있겠지, 죽은 다음에는 다시 살아날 수도 있겠지, 믿음생활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도 있겠지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손에 확실히 잡히는 믿음이 아니라, 머리 속에서만 맴도는 생각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천국도 믿게 되었습니다. 머리로만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온몸으로 믿었습니다. 형식적인 믿음에다, 진리라는 믿음이 채워지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신앙이 다시 살아 산 믿음이 된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단지 윤리적인 가르침을 전한 선생님으로 모시고 살다가, 이제는 생명의 주(主)요 영원한 구세주로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중에는 아직 부활하신 주님을 뵙지 못한 까닭에...
형식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변화된 신앙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죽도록 수고를 하나, 허탕치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는 역사(役事)가 있어야, 뭔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가는 게 있을 텐데, 옛날 그대로 그 습관과 그 생활 태도를 지니고 사니, 얼마나 지루하고 힘든 생활이겠으며, 그리고 얼마나 허무한 삶이겠습니까?
이미 말씀드린 바 있듯이, 새롭게 변화하지 않으면 부패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듯이 말입니다.
① 먼저 베드로를 비롯한 다섯 명의 제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옛날의 생활로 돌아가 그물질을 하고 있었으나, 아무 소용없는 헛된 수고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께로부터 배워 온 진리는 예루살렘에 내팽개친 채, 빈 몸으로 디베랴 바다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의 방식대로 살아보려고 한 것입니다.
이들의 삶은 한 마디로 말해서, 후퇴된 생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면 따라 죽겠다고 하던 믿음은 다 어디로 가고, 이제는 철저하게 세상식대로 살려고 나선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초막 셋을 짓고 함께 살고 싶다고 하던 그 열심도 사라졌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하던 신앙고백도 잊어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식으로 산 결과는 무(無)였습니다.
② 사울의 경우를 살펴봅니다.
그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참으로 철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고정관념과 독선(獨善)으로 눈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율법만이 최고라는 생각, 그리고 자기만큼 열심이 많으며 옳게 살려는 사람은 없다는 독선이 그의 변화를 막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해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같은 성경 구절이라도 읽을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법인데...
사울은 아주 옛날에 받아들였던 그 생각을 버릴 줄 몰랐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각이 굳어 있었습니다. 생각이든지 뭐든지 간에, 머물러 있거나 굳어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간(肝)이 굳어 버리면 간 경화(硬化)가 되어 사람 목숨을 위태롭게 하듯이, 생각이나 생활 태도가 굳어 버리면 아무 재미도 없거니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해치게 됩니다.
더군다나 독선은 변화된 삶을 저해하는 가장 흉악한 마귀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과 이론일지라도 그것만이 가장 옳고 다른 것은 틀렸다고 한다면, 그때 벌써 그 생각과 이론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해롭게 하는 무서운 독선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선한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하셨습니다.
이단(異端)이 다른 게 이단이 아닙니다. 자기네만 옳고 다른 것은 다 틀렸다고 하기 때문에 이단이라 하는 것입니다.
③ 이처럼 주를 부인하고 살게 되면(베드로처럼 후퇴한 생활이나, 사울처럼 주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죄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거나 어긋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그동안 주께로부터 배운 말씀을 다 버리고 자기 생활로 돌아갔으며, 사울은 율법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그 율법에 위반된 살인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이 일러주신 대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한 까닭에, 배운 말씀을 무시하고 세상 식대로만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울처럼 너무 자기 생각과 신앙에 묶인 나머지, 다른 이를 정죄하며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베드로나 사울은 모두, 그 신앙이 남달랐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에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과 다른 이를 살리는 신앙이 아니고 죽이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당신이 죽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오늘날의 적용
우리가 오늘날 예수님께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실지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그분을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단순히 주일 예배에서만 만나는 존재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로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 삶의 목적을 새롭게 할 때, 우리는 진정한 부활 신앙을 체험하게 됩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 자로서 살아가기
① 열심 있는 신앙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울처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에 대해 열정을 쏟았던 것처럼, 우리도 신앙의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열정은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되어야 합니다.
올바른 신앙의 방향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기초해야 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② 순종하는 신앙을 실천해야 합니다.
순종은 부활 신앙을 체험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풍성한 은혜를 체험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때로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을 통해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능력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킵니다.
삶의 목적을 잃고 방황하던 이들에게 새로운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며, 무의미한 삶을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듭니다.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었듯이, 우리 역시 예수님의 능력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맺음말
우리의 신앙은 단지 형식적인 종교 생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고, 부활 신앙으로 거듭난 존재로서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갑시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유익을 끼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부활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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