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선한 제자들을 찾은 주님의 사랑
본문 : 요 21:1-14
요즘 같이 따뜻한 날, 어느 여중생 둘이 길을 가면서 이야기합니다.
여학생 A: "얘, 나 어제 별꼴 봤다."
여학생 B: "뭔데?"
여학생 A: "글쎄 신부님도 화장실서 나오더라."
여학생 B: "얘는 그것 가지고 그러니, 우리 목사님은 얘도 났더라."
순진한 아이들 머리속에는 목사, 신부라 하면 신이 아니면 천사쯤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이러한 말을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전에 제가 가르치던 학생 하나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목사님을 보고 크게 실망하여 신앙에서 떠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아시다시피 인간은 신도 아니고 천사도 아닙니다. 육체의 몸을 쓰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신도 천사도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항상 우리에게 두 가지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순진하고 철없는 어린아이와 같아야 하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믿음의 장부가 되어 남자답게 강건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며 내가 나를 처서 복종시키는 피나는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소개된 이 씁쓸한 사건, 여기 기록된 베드로와 제자들의 실례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 이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께 교육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중 수제자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집중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배울 만큼 배웠고 볼 만큼 보았습니다. 말씀도 들었고, 기적도 보았고, 권능도 행하며 그 거룩한 인격과 접촉하면서 무려 3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는 그들도 3년씩이나 따라 다녔으니 예수님처럼 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어느 정도 예수화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제자들은 신과 함께 3년씩이나 기거동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이 되지 못했고 천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고백한 내용 중 위대한 고백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고 "너희도 나를 떠나려 하느냐?"고 물으실 때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는데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대답했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질 것을 예언하시자 자신은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베드로의 이와 같은 신앙고백이나 충성의 서약은 결코 입에 발라놓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 다르고 말 다른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만일 거짓이었다면 속을 들여다보시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적어도 이 시점에서 베드로는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 고백은 다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시간도 오래 지나지 않았는데 그 고백과 충성의 서약은 다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의 참 모습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신도 천사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한때는 마치 신과 같은 혹은 천사와 같은 신앙고백을 했지만, 그리고 어느 순간은 이와 같이 살았지만 곧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바로 이 진리를 증명하는 장면이 본문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고난 받으셨을 때 누구보다도 먼저 주님 곁에서 위로해드려야 했던 베드로도, 사랑받던 요한도 위로는커녕 저 살겠다고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칠전팔기 넘어지시고 일어나시던 골고다 언덕길에서 지나가던 나그네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졌을 때도, 베드로도 요한도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로마 병정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쓸개탄 포도주를 올리건만, 제자들은 물 한 잔은커녕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골고다의 하늘이 붉게 물들 무렵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제각기 뿔뿔이 흩어집니다. 그러나 제자가 12이나 되었건만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는 제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세상에 제아무리 겁쟁이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자기의 스승의 시신은 책임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은 보이질 않고 오히려 겁쟁이였던 니고데모와 비밀 제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이 와서 예수님을 장사지냈을 뿐입니다.
큰소리친다고 다 잘 믿는 것 아닌 것 같고, 직분 받았다고 해서, 혹은 성직자, 지도자라고 해서 다 잘 믿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엉뚱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 제자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했단 말입니까?
그뿐입니까? 더욱 한탄스러운 것은 수제자 베드로가 앞장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전의 갈릴리 바다로 내려갔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주님, 이 사건 속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Ⅰ. 인간이 신이나 천사가 될 수 없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런 제자라도 찾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탈선하는 제자라도 갈아치우지 않고 그대로 찾아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제자들은 분명히 탈선했습니다. 가서는 안 될 갈릴리 바다로 갔고, 잡아서는 안 될 3년 전에 버린 배와 그물을 다시 잡고 고기를 잡겠노라고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제자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입니까, 아니면 갈릴리 바다입니까? 이처럼 신앙인이 가서는 안 될 길을 가는 것, 그것이 바로 탈선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새사람과 옛사람의 두 세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조금만 방심하면 가서는 안 될 길, 탈선의 길을 가버리고 맙니다. 이 탈선의 길 위에는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의 제자들이 밤새 수고했으나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탈선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하고 범죄하고 실수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자포자기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배신자 베드로를 찾아 주셨습니다. 버림받은 창녀를 찾아 주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강도까지 맞이해 주셨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은 죄를 겸손히 고백하고 내 모습 이대로 주님께 보여드릴 때 용서함이 있기에 이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황송한 것은 주님께서 미리 오셔서 제자들을 기다리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한 시간 전에 오셨는지 두 시간 전에 오셨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저들이 의식하기 전에 오셔서 기다리신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미리 오셔서 기다리시는 주님, 오늘 저와 여러분들께 공히 똑같이 역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내가 주님께 나가고자 했을 때 이미 주님은 우리 앞에 와 계십니다. 내가 주님께 돌아가고자 했을 때 주님은 이미 우리를 용서해 놓고 기다리십니다. 탕자 아버지의 용서는 "아들이 돌아오면 용서하겠다."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기다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는 너무나 황송해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괜찮다.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왔느냐?"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에 감격하고 녹아져야겠습니다.
2.실패한 제자들을 성공으로 이끄시는 사랑입니다.
성공으로 이끄시기 위해 먼저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의 실패의 고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를 성공으로 인도하시기 전에 반드시, 항상 실패의 고백을 물으십니다. 왜냐하면 철저한 건설은 철저한 파괴위에 이루어 지기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철저한 자기파괴(회개)가 없는 한 결코 성공의 길로는 나갈 수 없음을 말입니다.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 하시는 이 질문은 미리 다 아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룻밤 탈선 생활에 열매가 있을 리 없다는 것, 다 아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으시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얘들아 날 떠나서 무엇을 얻을 수가 있었더냐?" "탈선의 길에서 소득이 있더냐?" "배은 망덕의 소득이 무엇이더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시간 주님은 우리에기 물으십니다.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 "가서는 안될 길을 가서 얼마나 성공했느냐?" "주일 어기면서 얼마나 부자ㄷ느냐?" "기도하지 않고 과연 승리했느냐?" "성경읽지 않고, 말씀듣지 않고 얼마나 영력이 강해졌느냐?" "교회봉사하지 않고 자기 시간 많이 갖는다고 하다가 얼마나 유익했느냐?" "십일조 생활하지 않고 얼마나 부자ㄷ느냐?".....이것이 바로 "고기가 있느냐?" 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베드로와 같이 "없나이다."하며 솔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다음의 음성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저보아라."는 성공으로 인도하는 말씀을 들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음성은 실패를 고백한 사람에게만 들려지는 음성입니다. 그리고 이 음성에 순종하는 자만이 153마리의 큰 물고기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결사적인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주님은 신이나 천사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나무라지 아니하십니다. 넘어져 있는 그 상태에서 재기 시키십니다. "유치하다" "더럽다" 고 외면치 아니하시고 거기서 실패를 고백하게 하시고 성공으로 인도하여 새출발을 시키십니다. 뿐만 아니라 배신하느라고 피곤했던 제자들을 위해서, 탈선하느라고 배고팠던 제자들을 위해서, 헛수고 했던 제자들을 위해서, 밤새 바다 바람에 추워 떨었던 제자들을 위해서 주님은 불을 피워 놓고 떡과 생선을 굽고 제자들을 먹이셨습니다. 따뜻하게, 정답게, 포근하게...어느 어머니가 이렇게 할 수있겠습니까? 제자들을 감싸주신 주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이 오늘 이 아침에 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도 공히 역사하십니다. 신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천사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고백한 대로 살지 못했다고 해서, 결심한 대로 살지 못했다고 해서 낙심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똑같이 역사하십니다.
Ⅱ. 그러면 이러한 사랑을 받은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가장 중요한 것은 축복속에서 주님을 발견했다는 사실입니다.(7)
"주시다." 단 석글자지만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너무나 큽니다. 전혀 뜻밖에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렇기에 모두들 고기 헤아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 와중에도 140-50여 마리가 아닌 153마리라고 끝자리까지 정확히 헤아린 것을 보면 그들의 관심은 온통 고기에 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153마리의 고기라는 축복뒤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순간 그는 "주시다"라고 외마디 비명을 지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축복이 왔을 때 이 축복만을 보고 좋아한다는 것은 유치한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선물을 사다주면 철없는 아이는 그저 선물자체만 좋아합니다. 선물을 사다준 엄마는 보일질 않습니다.그러나 조금 철든 아이는 엄마에게 고마와 하면서 선물도 좋고 선물을 사다준 엄마도 좋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철든 아이는 그 선물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옆에 놓고 그저 선물을 사다준 엄마에게 고마와 할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축복을 보고는 "야 153마리다." " 야, 아파트다." "야, 아들이다." " 야, 합격이다." " 야, 승진이다." 하며 허겁지겁 축복에 도취되어 사는 것, 그것은 유치한 단계입니다. 이 축복속에서 먼저 "오, 주시다."가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내 건강을 돌아 보면서 "오 주시다!"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를 보면서 "오, 주시다!" 월급 봉투를 받아쥐면서 "오, 주시다!" 새봄의 따뜻한 햇살을 받으면서 "오,주시다!" 꽃을 보면서도 "오,주시다!".....우리가 비록 신이 아니고 천사가 아닐 지라도 이 고백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축복속에서 주님을 발견한 요한의 태도, 이러한 태도가 정말로 우리가 배워야할 부분입니다.
2.베드로의 베짱이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주시다"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뭐 주님"하면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 겉옷을 입고 물속에 텀벙 뛰어 들어가 헤엄을 쳤는지 허우적 댔는지는 모르지만 주님을 향하여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베드로의 이 베짱, 우리가 이시간 이것을 배우자는 것입니다. 만일 저같았으면 그리 못했을 것입니다. "주시다"하는 소리와 함께 "뭐 주님, 아이고 나는 이제 죽었구나. 조금전까지 혼자 살겠노라고 배신한 놈이 벼룩도 낮짝이 있지 주님의 얼굴을 어떻게 뵙노?" 하는 탄식소리와 함께 쥐구멍이라도 있었으면 숨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품안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배우자는 것입니다. 어느 부모지간에 체면이니 염치니 안면이니 하는 단어가 필요하겠습니까? 이러한 단어는 일반 사회생활에서나 필요한 단어지 적어도 부모자녀 지간에는 이러한 단어는 필요가 없습니다. 백번 잘못해도 "아버지" 천번 잘못해도 "어머니" 하며 부모 가슴으로 기어드는 것이 자식이지 가긴 어디로 갑니까? 오늘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주여 체면 불구하고 갑니다. 어쩝니까? 주님이 아니면 갈데가
없는걸요. 주님이 나를 박대하셔도 그래도 나는 갑니다. 의지
할 곳없어서 주님께 갑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베짱, 철면피(?)...우리에게 얼마나 큰 용기와 희망을 주는지 모릅니다. 잘못 했더라도 "주님 갑니다." 실수 했더라도 "주님 갑니다." 탈선 했더라도 "주님 갑니다." 신이나 천사가 못되었다 할지라도 "주님 갑니다." 하며 주님 품안으로 기어들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베드로를 예수님이 어떻게 맞이해 주셨습니까? "아니 이거 배신자 베드로아냐? 베드로라는 이름이 더럽다. 다시 시몬이라 해라. 꼴도 보가 싫으니 가거라 가." 이리하셨습니까? 우리 같았으면 그리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사랑을 확이하셨을 뿐입니다. 가긴 어디로 갑니까? 살인범도 주님앞에, 창녀도 주님앞에, 강도도 주님앞에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도 천사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주님은 우리를 찾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배신 했다고 해서 갈아치우지 아니하십니다. 미리 오셔서 기다리십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실패의 고백을 들으시고는 성공으로 이끄십니다. 여기에 순종할때 우리는 반드시 성공의 길로 이끌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공 가운데 있을 때 축복에만 도취되지 말고 그안에서 "주시다"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 품안으로 총알같이 뛰어드는 베드로의 베짱이 있어야 겠습니다. 제자들에게 함께 하신 주님, 오늘 넘어지고 탈선하고 죄짓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으면서도 신이 못되고 천사도 못된 우리들에게 똑같이 역사하고 게십니다. 이 사랑안에 녹아지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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