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요한복음

[요 14:1] 길을 찾는 사람에게

'코이네' 2024. 6. 2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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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는 사람에게

요한복음 14:1-11

 

 

 

저는 길눈이 대단히 어두운 사람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아이큐가 그렇게 모자라는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도시에만 갔다 놓으면 완전히 촌놈행세를 하느라 정신없습니다. 서울에서 10년을 넘게 살았어도 갈 적마다 헤매고 다닙니다. 누가 저를 만나자고 하면, 하는 수없이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각에 출발을 합니다. 가끔 그 빤한 길을 찾지 못해서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작년 6월 유럽 여행중, 불란서 파리를 방문했습니다. 시내관광을 하던 중 루불 미술관을 가게 되었습니다. 루불 미술관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미술관입니다. 함께 간 일행과 함께 입장을 하면서, 약속시간을 정해놓고 나중에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일행과 헤어져 각종 조각품과 그림을 구경하면서 경내를 돌아다녔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벌써 약속시간이 다되었지요. ", 큰일났다. 빨리나가야 겠다"싶어 밖으로 나가는 출구를 찾는데, 이건 완전히 미로(迷路)였습니다. 모든 각 층과 복도가 다이아몬드형으로 되어 있어서 어디가 어딘지 도저히 방향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덜컥 겁이 났습니다. 짧은 영어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아도 뭐라고 대답을 해줘도, 잘 못 알아 듣겠고 경내가 워낙 넓어서 도무지 출구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안내도를 보아도 보통 복잡한게 아니어서, 유독 길눈이 어두운 저에게는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루불 미술관을 제대로 구경하기 위해서는 미리 안내도를 펼쳐놓고, 어디에 무엇이 있고 또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며칠동안 공부를 하고 난 다음에 들어가야 헤매지 않고 제대로 구경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전혀 사전 지식이 없이 들어가서 하마 트라면 국제 고아가 될뻔 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맨 끝에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함께 들어갔던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고생을 하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목적지"""에 대한 가르침에 이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나눈 내용입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목적지는 곧 아버지의 집이요, 그가 제시한 길은 바로 아버지의 집에 이르는 길을 가리킵니다. 이때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도마의 질문에 의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모호하고, 그가 제시하는 목적지가 분명치 않고, 더 나아가 그가 제시한 길까지도 구체적인 말씀을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는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6-7)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많은 가르침 중에서 가장 위대한 말씀으로 간주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마를 직접 만족시키는 대답이 되지못했습니다. 다음에는 빌립이 예수님께 요청하였습니다."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빌립의 요청은, 지상의 과제요 희망임을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의 이와 같은 대화는, 그들의 공동 생활을 통하여 확실하게 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그 자신이 목적지에 이르는 방법()이요, 하느님과 동질적인 존재라고 대담하게 말씀하십니다.

(1)공간적인 장소나 어떤 지역의 한 지점에 가기 위해 우리는 도보로, 차로, 배로, 비행기로 갈 수 있습니다. 가장 쉽게 갈 수 있고, 가장 쉽게 안내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경험, 안내도, 서비스의 방법 등이 이 길을 가는 사람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2)그러나 직업이나 생활의 방편으로서의 길을 찾는 사람에게, 그가 원하는 목적지로 갈 수 있는 그 길을 찾는 사람에게, 그가 원하는 목적지에 가도록 안내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 길을 찾는 사람의 소질과 적성, 건강과 사회성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3)또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찾는 길도 있습니다. 이 길이 어려운 길인 것은, 개개인의 희망과 욕구 충족의 한도를 우리가 객관적으로 측정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행복이나 인생의 의미를 안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자신이 경험을 제시할 수 있을 뿐, 엄밀히 말하면 그것이 행복과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의 실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길의 안내를 잘 할 수 있는 일인지 의문시됩니다.

(4)세상에는 평범한 생활에서 만족하지 않고 가치 있는 삶, 진실된 삶,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와 같은 삶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개인적 쾌락, 소유, 목숨까지도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와 같이 길의 종류는 많습니다. 앞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요구한 것은 바로 앞에서 든 여러 길 중에서 마지막에 지적한 길로 이해됩니다. "우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라는 표현을 보십시오. 그의 요청은 그의 삶의 궁극적 과제임이 분명합니다.

 

이 어지로운 세상에 바른길을 쫒아 가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삶의 길에 대한 아무런 문제 의식조차 없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이 공간적인 길로 국한한다면 얼마나 다행하겠습니까? 남양에서 수원으로, 서울에서 뉴욕으로 가는 길이라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공과 행복, 삶의 의미와 진실을 목적으로 삼고 찾아가야 하는 길이 인생의 행로라면 결코 쉽게 얻어질 리 없습니다. 오랜 인류의 역사는 방황과 미로의 수많은 흔적을 기록하였으며, 희귀하게 좋은 길잡이가 나타난 일도 있으나, 보다 많은 오도의 안내자들이 인류의 역사와 그 당대의 시대 정신을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하였고, 오늘도 이런 일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웃지 못할 사실이 엄연히 그 시대에 존재하고 있다고 그 일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이런 일이 어찌 예수님 당대에만 있었던 일이겠습니까? 구약 시대에도 신약 시대에도 거짓 예언자들로 인해 그 시대가 얼마나 오염되고,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실현에 피해가 컸던 것입니까? 이 점을 생각할 때 길을 안내한다고 강단과 교단에서 떠들어대는 그 무수한 소리들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길을 묻는 도마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보여달라고 한 빌립에게는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말을 알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말씀 속에서 그 자신의 개인을 큰 보편자 속에 투입시켜 나타냅니다. 예수님 개인은 이미 하느님과 동질 존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길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묻는 자에게 길을 제시하는 자로 있지 않습니다. 남양에서 수원 남문으로 가는 사람에게 "남양에서 남문으로 가려면 일단 수원가는 직행 버스를 타시고, 수원 터미널에서 내린 다음,역전까지 걸어와서 남문가는 시내 버스를 타십시오"라고 가르쳐 주신 분이 예수님이 아니라, "남문으로 가려거든 걱정하지 마세요. 나와 같이 갑시다"라고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그의 제자도 다 구도자로서 하느님께로 향해 길을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개인이면서 보편자의 세계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미 하느님과 같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그들 자신에게만 멎어 있어, 그 자리에서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길을 묻고, 진리를 찾고, 생명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알고 믿는 바에 의하며, 제자들 역시 그들이 길로 들어서고, 진리 속에 있고, 생명을 가지고 산다면 지금 역시 그 자신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길은 언제나 부단히 물어질 것입니다. 길을 묻는 자는 길을 잘 물어야 합니다. 길이 잘못 안내되면 그의 평생이 헛수고로 끝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지도자로서 길의 안내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자신 없는 위선적 언어와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종교의 지도자들은 특히 그들의 가르침의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통하는 것인가를 확실시하여 합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만병을 통치하는 약인 양 떠들어대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들어선 그 길, 예수님이 서 있는 그 진리의 기틀, 예수님이 숨쉬고 있는 그 생명의 호흡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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