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요한복음

[요 13:21] 가룟 유다, 멸망할 자의 모습

'코이네' 2024. 6. 14.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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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룟 유다 멸망할 자의 모습 

13:21-30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루 이틀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1년을 더살지 10년을 더살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뭏든 몇년이 남았건 중요한 것은 부귀영화는 못누려도 기어코 신앙절개지키며 살아가는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먼먼 신앙의 길을 물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신도 아니요 천사도 아닌 불완전한 사람으로서 내가 믿음지키며 이 긴 긴 세월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변덕스러워서 신앙생활을 잘 할 때가 있는가 하면 못할때도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일평생 내내 광명한 길만 걸은 것이 아닙니다. 성군 다윗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신앙도 내내 올라가는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신앙의 위인들에게도 어두운 면은 있었고 갈등속에서의 허덕임도 있었습니다. 앞서간 선배들이 이렇게 부족함 투성이었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굴곡없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심히도 걱정스러운 문제입니다.

 

내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 빛되신 주,

저본향집을 향해 가는길 비추소서.

내가는길 다 알지못하나 한걸음씩 늘 인도하소서

 

이 찬송이 안나올래야 안나올수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 인생에 있어서 또다른 면을 생각해야 할것은 읽어드린 본문의 가룟 유다의 사건입니다. 가룟 유다는 우리보다 훨신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영광스러웠던 12제자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추악했고 그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선악이 개오사라선과 악은 모두 우리의 스승입니다. 남의 선함을 보거든 나도 저런 선한 사람이 되어야지 자신을 돌어보라는 말이며 남의 악함을 보거든 내속에는 저런 악함이 없는가 살펴보라는 뜻인줄 압니다. 오늘 가룟 유다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반성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흔히 우리는 바울이나 스데반, 혹은 어거스틴 같은 위대한 신앙위인들 에게는 관심을 갖고 존경합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가룟 유다같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가룟 유다는 날때부터 가룟 유다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우리와 같이 기능성만 갖고 있는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무시했다가 그만 가룟 유다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가룟 유다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 가능성을 무시한며 살다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룟 유다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어떻게 하다가 가룟 유다되었습니까? 가룟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차라리 나지않았으면 좋았을 뻔한 사람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는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을 만큼 그의 말로는 비참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도 제자가 못되었습니다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어엿한 12제자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과 3년동안 동행하며 온갖 기사이적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본문의 장면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최후의 만찬자리요 세족식의 자리이니 얼마나 은혜로우며 경건한 자리이겠습니가? 그러나 가룟 유다의 마음은 다른데 있었고 마음과 계획도 다른데 있었습니다. 바로 이자리에서 최후로 예수를 팔기로 작정했습니다. 천추에 더러운 이름 가룟 유다, 배신자의 대명사 가룟 유다, 그는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 세가지를 더듬어 보면서 우리가 가야 할 머나먼 신앙의 길에서 가룟 유다 거울삼아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교훈받고 싶어 멸망할 자의 모습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가룟 유다는 왜 그랬을까?

 

1. 물질에 대한 지나친 애착때문입니다.

물질에 애착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가룟 유다는 그 애착이 너무 지나쳤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3년 세월동안 성경에 기록된 그의 잘못된 행동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이 개입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12장에 기록된 마리아가 나드 한 근을 주님께 부었을 때 가룟 유다는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일이지 왜 허비하냐고 호통칩니다. 이 때 성경은 주를 달기를 이는 저가 가난한자를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만일 마리아가 가난한 자를 위해 나드향을 바쳤다면 이는 틀림없이 회계인 가룟 유다가 처분했을 터이고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100데나리온은 착복하고 요즘 시세가 많이 떨어져서 200데나리온 밖에 못받았습니다.’라고 이렇게 도적질 할 심산이었다는 말입니다. 요한13장에 보니 가룟 유다는 돈궤를 맡은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생활하실 때 필요한 모든 물품을 그가 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물건을 살 때 실은 7만원 어치 사고 장부에는 10만원이라고 기입하고 구제를 할 때도 지출은 50만원으로 하고 실은 30만원만 갖다주는 그러한 도적의 행위를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가 그를 보고 도적질하는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공금횡령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27장에 가서 예수 따라다니다가는 이제 별볼일 없어보이니 에라, 팔아치워버리자.”해서 예수님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돈 때문에 그는 메시야를 팔아버렸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지고 싶었던 것은 돈 뿐이었습니다. 귀한 것은 돈 뿐이었고 뭉청뭉청 써보고 싶은 것, 역시 돈 뿐이었습니다. 물론 사람이 사는 동안 물질문제를 무시

할 바는 아니지만 그러나 물질보다 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떡도 중요하지만 말씀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그 짧은 기도문에도 주님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물질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양식은 더욱 중요합니다. 신앙생활하는 동안 굶어도 좋고 가난뱅이가 되어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물질세계에서 사는 동안, 물질을 무시하고는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길 물론 물질은 필요하지만 주인으로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물질의 노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요 물질을 상전으로 모시지 말라는 말입니다.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이 땅의 비극은 인간이 물질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파생되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돈은 일만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어느날 한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대화중 그 청년이 물질의 노예가 된것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쫒으라고 하셨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물질주인따라 예수를 등뒤에 두고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은혜받고 성령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물질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던것 버리지 않고 붙잡아두었다가 끝내는 급살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안에 물질에 대한 애착심이 하나님 잊어버릴 정도로 꽉 차있다면 가룟 유다처럼 되기 쉬운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기도하고 찬송해도 주님과는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속에 과연 주님이 좌정하실 빈자리가 있겠습니가? 그러니 백날 교회다녀도 그저 가룟 유다화() 되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2. 마음이 너무 굳어 은혜에 대한 느낌이 메말라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3년동안 동거동락은 가룟 유다에게 있어서 은혜의 기회였습니다. 산상수훈 말씀하실 때 가룟 유다는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3:의 거듭나는 교리를 말씀하실 때도,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도, 생명의 떡을 말씀하실 때도 가룟 유다는 분명히 거기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풍랑이 잠자는 것 보았을 것이고 오병이어기적의 장관도 보았을 것입니다. 냄새나는 송장이 벌떡벌떡 일어나는 것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석이 아니라면,장작개비가 아니라면 가슴에 뭔가 닿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가?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습니다. 왜냐? 생각은 돈으로 가득차 있었고 마음은 탐심으로 가득차 있으니 예수님의 교훈을 들으면서도 벽창호요 예수님의 능력을 보면서도 무감각합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메마르고 마음의 느낌이 고갈된 가룟 유다는 필경 그렇게 끔직한 일을 저지르고 비참하게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같이 은혜에 대한 느낌이 없는 마음, 무뎌진 심령, 조심해야 합니다. 한시간 예배드리면서도 아무런 감격과 느낌이 없이 돌아가는 사람,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앞에 감사와 감격이 없는 사람, 조심해야 합

니다. 십자가의 은총앞에 눈물이 없는 사람, 조심해야 합니다. 지옥갈 수많은 세상 사람중에 나는 하나님의 백성되었다는 행복함이 없는 사람, 조심해야 합니다. 수많은 죄가 주렁주렁달렸건만 회개없는 심령,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같이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3. 주님과 대화없는 3년 세월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범죄하고도 대화가 있었고,도마도 의심하면서도 대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전혀 대화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대해서,범죄함에 대해서, 영생에 대해서, 문제에 대해서 전혀 대화한 기록이 없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부모자식간에 대화가 없다면, 부부간에 대화가 없다면, 교역자와 성도간에 대화가 없다면 이는 뭔가가 잘못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3년동안 대화가 없다가 결국 가룟 유다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대화의 연속입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가? 신앙선진들과 하나님과의 대화내용을 기록한 책이 아닙니까? 신앙선배들이 언제 어두웠고 언제 광명했습니까? 하나님과 대화가 끊어졌을 때는 어두웠고 하나님과 대화가 원활했을 때는 밝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자신을 봅시다. 여러분의 신앙상태가 어둡습니까? 밝습니까? 만일 어둡다면 대화가 끊어진 상태요 밝다면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살아가다보면 대화가 끊어질 때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방치해 두지 마십시오. 가룟 유다는 이를 방치해 두었다가 그만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이는 기도시간을 갖으라는 말입니다. 기도하기가 죽기보다 싫더라도 억지로라도 나와서 하나님과 대화의 시간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기도시간이 끊어진 채로 굳어진다면 가룟 유다꼴나고 맙니다. 뿐만아니라 좋은 일만나면 감사하면서 대화, 언짢은 일 만나면 주님께 위로받으면서 대화, 어려운일 당하면 주님게 방법을 물으면서 대화,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때에는 회개하면서 대화,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이 가룟 유다안되는 비결입니다. 또한 성경보는 것도 주님과의 대화요, 찬송도 주님과의 대화요, 봉사도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가룟 유다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조심할일이 있다면 주 따라가는 길에서 넘어질가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 두렵고 떨림이 있다면 이 신앙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경주자와 같이 최선을 다할 일이 있다면 믿음지키는 길뿐입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되지않기를 원하신다면 물질중심 버리고 하나님중심으로 살기 바랍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뜨거운 느낌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끊지 말고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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