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모 공경
본문 : 눅2:41-52
설교 : 이 선 균 목사(공주제일감리교회)
항상 검소하게 사는 기독교인 노인 학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초대장이 날라 왔는데 장관이 초대한 파티였습니다. 그는 파티가 열리는 날에 평소대로 검소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파티 장에 도착한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파티 장은 으리으리했고 조명은 휘황 찬란했습니다. 그런데 입구를 막아선 문지기가 옷이 허술하다는 이유로 통과시키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아는 사람이 말을 해줘서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파티 장 구석에 앉은 이 사람에게 아무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습니다. 음식을 주지도 않았고 음료수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머슥 해서 그 파티 장을 나왔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좋은 옷을 갈아입고 다시 파티 장소에 갔습니다. 좀 전에 밀쳐내던 문지기가 ‘어서 오십쇼’ 거수경례를 합니다. 파티 장소에 들어서자 장관과 모든 참석자들이 다가와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좌석에 앉자 고급 식사가 나오고 좋은 음료가 나왔습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옷을 벗어서 놓고 음식 접시를 갖다대고 하는 말이 “양복아 이것을 네가 먹어라. 사람보고 주는 음식이 아니라 옷을 보고 주는 음식이니깐 네가 먹어라” 노인은 이 세상이 겉만 보고 잘못된 가치관으로 치닫고 있음을 그런 행동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른 모시는 뜻을 되새기는 경로주일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부모 공경을 하셨는가를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눈을 두어야 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경로의 신앙을 간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디모데후서3:1-2절에 보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세의 징조 중에 어른을 거역하고 부모를 멸시하는 것이 온다는 것입니다.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랍비 요시아의 이야기입니다.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요시아야, 너는 천국에 가면 레네스라는 푸줏간 주인 곁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푸줏간 주인을 가장 천하게 여기고 멸시합니다. 그런데 그 푸줏간 주인 곁에서 영원히 산다고 하니 기분이 몹시 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그 말씀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밥 먹을 때에도, 자리에 누울 때에도, 길을 걸을 때에도 ‘너는 천국에서 푸줏간 주인 레네스 옆에서 살 것이다’ 자꾸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그는 레네스라는 사람을 찾아 보기로 했습니다. 그가 시골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불렀으나 그는 오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요시아가 직접 찾아갔습니다. 왜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는가를 묻자 레네스 푸줏간 주인은 제가 노모님을 모시고 있는데 노모님이 병석에 누워 계셔서 갈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요시아는 그 순간 하나님이 꿈에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노인을 귀하게 여기는 자를 부모를 귀하게 여기는 자를 하나님 곁의 높은 자리에 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른을 잘 공경하고 모심으로 천국에서 높은 자리에 앉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어린 시절 예수님이 성전에 올라가 전례를 따라 예배드린 후 부모님을 따라가지 않고 성전에 남아 있어서 부모님이 긴장하고 불안했던 어떤 의미에서는 말썽을 일으킨 것 같은 내용입니다만 뒷 부분에 가면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공경의 내용을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경로하셨는가를 살피면서 우리의 경로주일을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여 섬기셨습니다.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는 말의 원래 원어 의미는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여 받드셨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위치를 인정하고 부모님이 계심을 인정하고 그 부모님의 자리를 인정하고 마련해 드렸다는 것입니다. 즉 소외시키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른의 자리를 인정하고 만들어드리는 자세를 간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긍정적인 자아 의식을 지니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절대적인 조건이 있어야 하는데 그 첫 번째 요소가 소속감(conciousness of belongingness)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 아내에게, 내 남편에게, 내 친구에게, 내 직장 상사에게, 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내가 받아 들여 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받아 들여 지고 있다면 살 맛이 있지만 그 대답이 아니오라면 그 사람은 견디기 어려운 고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모님을 받아들이고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함으로 소속감을 가질 수 있도록 공경하셨습니다. 경로의 신앙은 바로 어르신들이 소속감을 가질 수 있도록 인정해드리는 것입니다.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정하고 인정해 드리고 노인들도 우리편입니다 하고 인정해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내가 받아 들여 지고 있을 때에야 자기 존중감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가장 가까운 자녀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에 살맛이 나지만 가까운 식구들에게 인정을 못 받을 때에는 한 마디로 죽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부모를 존귀케 하여 가장 영광스런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요셉입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훌륭한 아버지는 아니었습니다. 요셉을 편애하였지만 그게 큰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버지를 한결같이 대합니다. 뿐만 아니라 원수 같은 형들도 용서하고 형제로서 한결같이 대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게 하시려고 나를 먼저 이곳에 보내셔서 준비하게 하신 것이라고 하면서 삶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애굽에 묻지 말아달라는 아버지 야곱의 말에 대해 요셉은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평생의 삶을 지배했던 원리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창47:30).” 이처럼 어버이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칭찬 받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5장 4절 이하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삶을 지적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 드렸다 ‘고르반’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다되는 줄 아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악한 자라고 딤전5:8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어른들이 내편이구나 하는 사실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편이다’ 라는 이 감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른들 모두가 우리편이라고 느끼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순종하여 받드신 주님을 따라서 어른들을 섬기고 순종하여 받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부모님이 특히 어머니에게 최고의 존칭어를 스시면서 어머니의 가치를 무한히 높여드리며 쓸모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모시도록 했습니다. 가치를 인정해드리는 효도를 통해 경로의 신앙을 배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19:26절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양적인 감각으로 보면 어떻게 어머니에게 ‘여자여’ 할 수 있겠는가 생각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헬라어 ‘여자여’는 ‘그나일’인데 이는 아람어로 ‘그낭‘에서 나온 것으로 결코 가벼운 의미의 경칭이 아니라 높고 귀한 지체의 사람을 향해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닌 분에게 사용하는 존칭입니다. 고대 문서에 의하면 황후나 왕비에게 사용되던 존칭이 이 단어 ’그나일‘이었습니다. 유명한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가 애굽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을 때에 첫 마디가 ’여인(구나이 -Gunai)이시여!‘ 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여자여‘ 하신 것은 어머니를 향한 최고의 가치를 나타내는 존칭어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 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고백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면서 두 번째로 필요한 의식이 가치감(conciousness of worthfulness)입니다. 즉 내가 쓸만한 사람인가, 나를 필요로 하는가, 내가 사는 공간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 노인의 비애가 있습니다. 쓸모 없다는 느낌을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흔히 ‘빨리 가야지 빨리 죽어야지’하는데 이 느낌은 절대적입니다. 누구도 위로할 길이 없습니다. 불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효도하려면 하루에 열 번 이상 이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어머니가 제게 꼭 필요합니다. 아버님이 우리 가정에 꼭 필요합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안 계시면 집에 들어 갈 맛이 안납니다.” 이 말을 계속 하시기 바랍니다. 착각일지라도 내가 정말 필요한 존재구나하는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 아들이 생겼으니 하실 일이 있습니다. 그만큼 어머니는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이 고백을 십자가에서 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할머니 할아버지와 손주들의 관계가 가깝다고 합니다. 본능적으로 손주와 할아버지 할머니는 친합니다. 그 친한 이유는 손자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별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자식들은 부모를 비판할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이지만 손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손자들은 질문을 합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손자들은 질문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가르침으로 조부모들이 아직도 자신은 쓸모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 그 성취감을 갖게 하기에 친해지는 것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자를 마음껏 조건없이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처럼 쓸모 있음을 알게 해드림으로 살맛이 나게 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어머니의 능력을 인정하고 어머니에게 제자 요한을 맡기셨습니다. 여자여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7) 어머니의 노후를 제자에게 맡기신 것이고 어머니에게 하실 일 자식을 돌보아야 할 능력을 인정하고 맡기신 것입니다. 능력을 인정해드리는 것이 참으로 귀한 경로의 자세입니다. 이 같은 자세를 간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세 번째 필요한 것은 신뢰감(conciousness of confidence)입니다. ‘나는 뭔가를 할 수 있다, 내게 능력이 있다, 이 사회에서 내가 정말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이처럼 자신의 능력을 믿을 수 있을 때에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소외감, 열등의식, 피해의식, 고독의식, 절망의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노인을 아무 일도 안 시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도록 돌보아 드려야 합니다. 창조적인 삶을 계발할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합니다. 78세의 맥아더 장군은 ‘오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늙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노쇠하는 이유는 자신의 꿈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꿈을 버리면 마음의 주름살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80에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 했고 안나는 84세에 메시아 대망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기적을 체험했고, 갈렙은 85세에 헤브론을 얻었고 사도 요한은 90세에 계시록을 기록하였고 아브라함은 100세에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 이삭을 가슴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샌더스 대령은 66세에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사업을 시작했고 페루의 윌리암 윌리스는 69세에 돛단배로 태평양을 횡단하였고 레이건은 70세에 미국 대통령이 되었고 김대중씨는 70세를 넘어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괴테는 80세에 ‘파우스트’라는 소설을 완성하였습니다. 아직도 창조할 수 있는 창조의 계절임을 깨닫고 힘있게 일하시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부탁하신 대로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로 한평생을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격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인격적인 성숙의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 성질이 불같아서 ‘우뢰의 아들’이라고 했고 잔인한 사람이라 예수님과 함께 사마리아 땅을 지날 때에 그 동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자 ‘하늘에서 불을 내어 이 동리를 깡그리 불태워 버리세요’하던 그런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요한은 장수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90세가 넘게 살았습니다. 터키 에베소에 가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 있는데 그 옆에 요한 기념교회 에베소 교회가 서 있습니다. 60세에 에베소에 가서 마리아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잘 모시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노인이 되어 가는 것은 모든 면에서 즉 육신적 손실(전12:3-7), 경제적, 정서적인 면에서 손실만 있기에 서럽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늙어가면서 자녀들의 손길과 자녀들의 음성을 더욱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자주 찾아 뵙고 안아드리고 주물러드리고 말씀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누구나 다 부모님의 자녀이고 누구나 다 늙어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경로의 정신을 새롭게 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린이의 위치는 정상을 찾았습니다. 이제는 노인의 위치를 찾아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로스엔젤스에 사는 한 노인이 몇 년 전에 이런 광고를 냈다고 합니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주시는 분에게 1불을 드리겠습니다.’ 이 얼마나 고독한 모습입니까? 영국의 리버풀 항구에 배를 타고 여행길에 오른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배가 떠나기 전에 부두에서 놀고 있는 아이에게 돈을 건네주면서 자신이 배를 타고 떠날 때에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고독한 노인의 요청입니까? 오늘 날 우리 주변에 우리를 향하여 손을 흔들어 달라는 노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손을 흔들어드리는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노인의 정서적인 필요를 채워드리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로 정신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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