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자유를 의미합니다
미가4:1-5,요8:31-36
삼창교회 /허명철목사
어느 행복한 부부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에 바라는 소원이 있다면 아이를 갖는 것이었는데, 오랫동안 아이가 없어서, 한 아이를 양자로 드리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아이를 보육원에서 데려왔습니다. 양부모는 양자 된 아이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 얼굴이 밝지 않고, 늘 어두웠습니다. 그래서 이 부모는 아이를 데려온 병원에 갔습니다. 그래서 문제의 근원을 밝혀서 치료하기로 했습니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그 아이를 관찰한 결과, 아이의 어두운 그늘을 찾았습니다. 비록 좋은 양부모를 만나 좋은 환경 속에 거했지만, 이것조차 아이에게 큰 기쁨과 행복을 주지 못했습니다. 지난날 보육원 삶, 과거의 삶이 그 아이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장 밑에서 원장 눈치보고, 먹을 것이 있어도 함부로 먹지 못하고 때로는 훔쳐먹으며 살다가, 양자로 들어왔지만 자기 집에 있는 것이 자 기 것인 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먹어도 두려웠고, 하나 하나 눈치를 보며 살아야했던 것입 니다. 그는 이제 자기 부모 밑에 와 있었지만, 아직도 아들로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포로된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자유인이 되었어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노예처럼 어둡고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아비 집에서 고아처럼 어둡게 사는 아이와 다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소중합니다. 오늘 해방기념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자유가 무엇이고, 자유인으로써 삶이 무엇이고, 이 자유를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자유인의 앞으로 행로, 그 사명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소중히 지키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고자 합니다. 하나는 신앙의 무지에서 자유입니다.
이 무지는 과학을 알고 모르느냐, 철학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라 신앙의 무지에서 자유를 말합니다. 그릇된 신앙의 지식에서 자유를 말합니다. 4장2절 말씀에 그가 도로 우리를 가르칠 것이라. 진리의 길을 가르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 받지아니 한 자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네스트 케제만은 [예수는 자유를 뜻한다] 라는 책에서 이런 비유를 말하고 있습니다.1952 년 천둥과 홍수로 네덜란드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분이 암스테르담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으로 자유로운 신앙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엄격히 지키고, 주의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마을에 갑자기 폭풍우를 동반한 폭우로 마을이 떠내려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마을에 위기가 닥쳐와서, 이 어려운 것을 극복하려면, 일요일에 제방을 튼튼하게 해야했습니다. 경찰은 목사님에게 통지했습니다. "지금 제방이 무너질 위기에 있습니다. 오늘 와서 제방을 쌓지 않으면 안됩니다."라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목사님은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것이 주일을 범하는 일이 될지라도, 자기에게 위임된 교구민들을 불러서 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필요한 일을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주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 그들을 파멸로 인도할 것인가? 개인적 결단을 내려야할 때였습니다.
그는 교회 자문위원을 소집했습니다. 토론자 중에 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바람과 파도를 가지고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살든지 죽든지 복종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확신과도 약간 어긋나는 말을 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예수 자신도 4계명을 범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사람이 주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때에 존경할만한 어떤 노인 한 분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하더라고 합니다. "목사님 저는 아직까지 남 앞에서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민했는데, 이제는 말해야 되겠습니다. 나는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정도 자유인이 아내였는가 생각합니다. 이 자유로운 예수님은 강력한 전통파 동료들이 예수님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고 제자 중에 하나는 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 았습니다. 자유자는 경건하지 못하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경건 자는 자유롭습니다."
케제만이라는 학자는 자유와 신앙의 경건을 조화한 모델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알고, 주의 말씀을 알면, 자유롭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너무나 자유롭게 행동했습니다. 때로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금기시했던 안식일 계명도 새롭게 말씀하시면서, 병을 고쳤습니다. 약자와 죄인과 세리와 함께 교제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율법사와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이 행위가 하나님과 계명에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과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의 관점에서 모세, 성서의 교리를 해석하고 평가했으며, 그래서 경건하면서도 자유를 누렸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파격적일 만큼 자유롭게 행동했으나 방종이 아니였고, 놀랍고도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자유가 방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유는 섬김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위임받은 심판자로써 비난과 정죄와 심판과 책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용과 용서를 행했고, 오히려 약자를 섬겼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었습니다. 유대교 전통 속에 죽었던 율법에 생명력을 불어넣으시고, 새롭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신앙적 전통과 도덕적 질서를 말씀으로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 말씀 안에서 가장 자유롭게 사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자유는 경건을 떠난 것이 아니라 자유 함으로 더욱 경건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자유는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바로 앎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모르면 우리를 외식하게 하고, 우리 양심을 가식적으로 만들고, 하나님도 형식적으로 섬깁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얽매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은 자유의 길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많이 연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폭을 넖펴야 합니다. 거짓된 형식, 잘못된 전통에 매여 주님의 주시는 자유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해 잘 알아야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계명이 어디에 기록된 지 아십니까? 출애굽 20장과 신 5장입니다. 출34장에는 제의 십계명 ( cultic decalogue )도 있습니다. 윤리적 십계명중에 제일 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유대교는 우리가 서론으로 여기는 2절 말씀을 1계명으로 합니다. 카톨릭과 루터교는 우리 가 1계명 과 2계명으로 나누는 계명을 1계명으로 하고, 우리가 9계명으로 하는 것을 9계 명과 10계명으로 하는데, 출애굽 쪽을 따르는 쪽과 신명기를 따르는 쪽에 따라서 9계명과 10명의 순서가 다릅니다. 십계명의 차이를 알 때, 혼란이 아니라 보다 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바로 모를 때 혼란의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예수님 시대의 지도자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랍비들은 율법의 가장 중한 계명 곧 오직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가장 중한 무거운 계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경한 계명' 가벼운 계명은 '새를 놓아 주는 것'이 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경중(輕重)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은 도덕적 계명은 중하고, 시민법은 보다 경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음을 성경에서 봅니다. 어떤 율법사가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계명을 가볍고, 무거운 것이나, 크거나 작은 것으로 말하지 않고, 옛 계명과 새계명으로 말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같이 우리가 사랑해야함을 새 계명으로 주셨습 니다. 사랑 안에서 율법이 완성되고, 사랑이 모든 허물을 덮는다는 것을 유대 전통주의자들 은 몰랐던 것입니다.
신앙의 무지에서 자유하기 위해서는 배움에 열심을 내야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중에는 이런 중요한 것도 있습니다. 주일마다 예배시 고백하는 사도 신경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사도신경도 우리가 고백하는 것과 세계 교회가 하는 고백하는 것 중에 차이나는 것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십자가에 못밖혀 죽은 후에 he descended into hell 이오고, 그 다음에 장사한지 사흘만에 이렇게 되어집니다. 그뿐입니까? 주기도문도 문법이 안맞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라는 말도 권세가 아니라 dunymis라는 권능을 말합니다. 심지어는 창12:1-3절에 원문에 보아도 1절은 완료형으로 나타나고 2와3절은 미완료 재귀형과 단순 재귀형으로 나타납니다. 이 본문은 사실 정확한 번역이 어렵습니다. seed라 영어로 번역된 단어도, 원어로는 단수이되, 단수 집합명사이기 때문에 대표자를 지칭하기도 하고, 민족집단 히브리인 전체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2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 본문을 보는 눈도 다양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익히 잘아는 창 12장2절에, 아브람은 '복의 근원'이 라는 말도 다르게도 번역 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복이다. 복동이다. 복만이다' 이런 번역도 가능합니다. 복의 근원이라는 말은 의역이고, '복이다' 라는 말은 직역입니다만, 2절 하반 절은 오히려 직역에 가깝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성경을 많이 아는 것 같아도 사실 잘 모르고, 또 잘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많이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배움을 통해서 성경의 무지에서 자유 해야 합니다. 신비한 능력이나 환상을 통해서 믿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 해서 우리에게 믿음의 확신을 갖게 하시고, 그 다음에 경건과 행동의 자유, 말과 옳은 판단과 생각의 자유를 갖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거기서부터 진정한 자유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둘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야 합니다,
전쟁의 연습은 없어야 합니다. 전쟁은 힘의 균형이 무너질 때, 시작됩니다. 물리적 힘의 균형이 무너질 때입니다. 그러나 물리적 힘의 균형은 이루기 어렵습니다. 신앙과 법에 의한 힘으로 평화를 이뤄야 합니다. 전쟁은 어떤 경우에도 피해야 합니다. 왜 피해야 합니까? 전쟁에는 승리자가 없습니다. 어느 쪽이 이기든지 모두 패배자와 같은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전쟁으로부터 자유를 외칩니다. 그러나 오늘도 전쟁은 세계 곳곳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전쟁을 하는 것을 보면, 민족에게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무장이 되면 평화는 이뤄집니다. 주님은 어떤 물리적 수단도 용납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정치가들이 마음대로 자신의 이익을 좇아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법적 제도 장치를 만들고, 법의 감시기능을 강화하면 전쟁 없는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80년대 민주화 투쟁을 통해서 얻고자 한 것을 생각해보세요. 단지 한 사람이 물러가기만 바란 것이 아니라, 법의 통치하는 투명한 사회를 위해서, 민주화 투쟁을 한 것입 니다. 5공 정권 때는, 법의 질서가 서지 않았습니다. 옳은 법이 서지 않아서, 모두 법 아래 평등하다, 이런 법을 세우기 위해서 민주화 운동을 벌렸습니다. 그리고는 민주화를 쟁취했습 니다. 독재자는 옳은 법이 서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민주화로 정의로운 법을 세웠습니다. 그 러나 오늘 보세요. 815 특사해서, 많은 범법자들이 사면받고 나옵니다. 공의로 세운 법이 오늘 법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위정자들에 의해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세운 법이 가치 없게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옳은 법이 서지 못하도록 하는 독재자만 나쁜 것이 아니라 바른 법이 효력을 발하지 못하도록 정치적인 이유로 사면을 남발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법 의 공의가 민주주의 이름으로 무너지게 하는 것은 선한 정치가라 할 수 없습니다. 왜 이런 그릇된 일이 생기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못하 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힘의 균형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 말씀 안에서 변화 받은 사람들이 정의로운 사회를 위하여 애쓸 때 평화는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평화는 거짓된 평화입니다. 공의가 없는 평화도 거짓됩니다. 힘으로 누르는 것은 결코 평화가 아니라 더 큰 폭력과 피를 불러옵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이념에 대한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 무릎끊을 때, 전쟁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의 사도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말씀에 더욱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가난으로부터 자유입니다.
본문4절 말씀에 자기 포도 나무아래와 자기 무화과 나무아래 "앉는다"는 말은 평화와 안전 을 의미합니다. 심고 거둘 수 있다는 것은 평화의 상태입니다. 안전도 뜻합니다. 세렌게티 평원에서 마음대로 눕고 앉아서 남의 눈치를 보지 않은 동물은 사자뿐입니다. 그만이 앉을 수 있습니다. 가난으로부터 자유는 바로 앉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평 화와 안전을 보장받습니다. 오늘 본문의 앉는 평화는 풍요로울 때만 가능합니다. 어떤 가난 으로부터 풍요로운 것입니까? 물질적 풍요만은 위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 때문에 원망하다가 망한 것을 봅니다. 비록 메추라기를 코가 질릴만큼 먹었으나 시106편 14-15에 보면 광야의 사건을 시인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먹는 것만으로 인생은 만족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40일을 주리신 후에서 사람은 떡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물질적 굶주림이 커도 영적 주림부터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만족이 없음을 전도자 솔로몬도 전도서 6:7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가난으로부터 자유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물질적 가난에서 물질적 풍성을 얻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눅 6:20에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 곧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난과 굶주림을 통해서, 절망을 통해서 우리가 의지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가난 같은 고통과 신음, 괴롬 속에서 진정한 소망과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에 가난이 복된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에서 자유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발견치 않고, 그분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세상 모든 물질을 얻는다해도 허기질 것입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할지라도, 이 가난 속에서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하나님을 만나면 행복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 해방 기념주일에, 모든 물질 우상에서 자유 하시길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째로 죄와 죽음, 그리고 공포로부터 자유입니다.(5절)
호4:6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내 백성이 망한다고 하나님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공포란 죄의 결과에서 오는 것이요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계가 사형제 폐지 운동을 합니다. 사형제는 아무리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사람이 사람을 심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형한다고해서, 그것 때문에 범죄가 덜흉악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는 통계를 말합니다. 죄를 줄이기 위해서 사형제를 도입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것은 통계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합니다. 그것도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고 성경은 어떤지 살펴야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빙자한 사형 폐지론 자들이 생각해야 할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설명하시면서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곳은 출애굽20장 가운데 3군대입니 다. 오경 전체에서도 나는 곧 anoki, ani yhwh 라는 곳이 2절 나는 야훼니라,12절 이하에서 살인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고 말씀합니다. 모살자와 고살자를 구분할 때, 13절에서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나를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요. 할 때, 나 하나님이 14절에서 "사람이 그 이웃 을 짐짓 모살 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의도 된 살인 계획자는 죽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나오는 단어 중에 원문에 보면 biadam이라는 말 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집적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브"라는 전치사는 영어로 by 곧 의하 여, 사람의 손으로 죽이는 것입니다. 이는 개인적 복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서 공정한 심판을 받고 사형시켜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범죄 예방 효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들이 당할 심판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죄사함 받지 못한 죄인이 영원히 당할 심판의 징표로써 사형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 말미암은 심판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형제는 하나님이 인간 사회 법정에 위탁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행되야 합니다. 사형선고가 때로는 고문에 의해서, 누명에 의해서 잘못된 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급한 사형이나 몇 십 년 동안 오랜 심사를 통해서 실수 없도록 조처해야 할 것이고 특별히 약한 백성, 권력 없는 백성에 대한 사형은 없는 것도 고려해 볼 만 하지만, 그러나 사형제도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앞으로도 없어지지 아니할 원리입니다.
역사 속에서 발전적으로 없어지길 바라는 노예 제도나 여 목사 제도 도입 같은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영원히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낼 증표요 심판의 예표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현실적인 심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죄로부터 우리는 자유 해야 합니다. 자유하지 못하면, 우리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불안으로 부터 자유 얻는 길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내 힘으로는, 내 공로로는 구원 얻을 길이 없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나의 삶이 실패와 죄의 욕망, 불의한 꿈들을 주님의 십자가아래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가? 시144:4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 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하나님 없이 산 인생이 얼마나 무의미했던가를 고백해야 합니다. 철저한 자신의 한계 상황을 알 때, 진정 주님을 갈망하고, 찾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자유를 누리며,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신앙의 삶이 하루 하루가 기쁘고, 감사가 넘치십니까? 아직도 자신의 삶 속에 율법주의에 매여서, 예배에도 기쁨을 상실하고있다면, 이 시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우리는 주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자유 얻고, 그 힘을 입어 구원 얻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직도 내가 구원을 위해서 할 일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포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져 믿고 받아드릴 때, 우리는 모든 것에서 자유합니다. "정치적 자유, 사회적 자유, 물질로부터 자유, 양심의 자유를 소유한다'고 해도 주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지 못한 자유는 거짓된 자 유요 아직도 포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나는 자유를 잃어본 적이 없노라고 외치는 종교적 이스라엘 백성들 을 보십시오 지금 분명히 로마의 속국으로 세금도 내며 그들의 법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 도 그들은 자유롭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릇된 신앙 전통을 고집하면서, 자신들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불안으로부터 자유를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종교로부터 미신으 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면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어야합니다. 영생이란 요17:3 예 수 그리스도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를 알고 그를 믿으면 영생 얻고 자유 얻습니다. 귀신이나 어떤 영적 불안으로부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액땜이나 불행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예수님을 믿을 때 자연적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공포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르고, 성경을 바로 모르면,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지 않고는 전혀 자유가 없습니다. 오직 진리 되신 예수님만이 자유입 니다.
우리는 815 해방을 맞이해서, 지금 남북 간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제 해방이0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존,에프,케네디는 베를린이 봉쇄되었을 때, 서베를린의 광장에서 " Ich bin ein Berliner "라고 연설을 시작하면서, 케네디 대통령은 자유에 대해서 외쳤습니다. "이곳은 자유의 섬이다. 그리고 우리 중에 한 사람이라도 자유를 얻지 못한 자가 있다면, 온 세계가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요지의 명 연설을 했습니다. 이 자유에 대한 연설은 베를린 시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민족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민족 중에 어느 한 사람도 죄인으로 남아 있는 한, 비자유인으로 남아있는 한, 우리 민족은 온전한 자유와 해방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해 방과 자유를 위해서 하나님이 이 민족과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생각할 때입 니다. 주님 한 분으로 인해서, 인류는 어둠이 지배하던 곳에 자유가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 도 주님의 제자로써 주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유를 가지고, 낮은 곳에서 섬겼습니다. 낮은 곳을 찾으셨습니다. 죄의 자리에 오셔서, 죄인들의 상처를 쓰다듬고 사랑을 나눴습니다. 고통을 나눴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 판 받고, 망할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대신 저주를 받으셔서 십자가 피를 흘리 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 얻고, 죄와 사망에서 자유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대속의 피로 자유 얻은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지난 날의 잘못된 신앙의 틀을 부셔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만이 복이 아니라, 하 나님의 종으로 주님께 시간과 건강과 재물과 은사를 드리는 삶을 살 때, 자유를 누리게 되 고, 모든 거짓 우상에서 해방감을 체험하게 됩니다. 해방은 받는데서, 쌓아놓는데서 얻어지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쓰여질 때, 깊이 체험되어집니다. 우리를 억 매는 체면, 명예, 욕망보다 종으로써 주님처럼 봉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 이 시대에 사는 한, 이 민족 속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과 십자가를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처럼 섬기고 낮아지고, 조건 없이 사랑하고, 이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할 때, 이 민족에게도 희망이 있고, 한국 교회에도 희망이 있고, 오늘 우리 삶에도 자유와 기쁨, 희 망이 넘칠 줄 믿습니다.
오늘 주안에서 얻은 자유를 남용하거나 방치하지 말고 주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 이웃을 위해서 사랑으로 나눌 수 있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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