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갈라디아서

[갈 6:7] 기독교의 영원한 핵심 십자가 _로이드존스

'코이네' 2024. 2. 28. 21:08

기독교의 영원한 핵심 십자가

( 6:717)

설교 :  로이드 존스

 

 

저는 오늘 특별한 열망을 가지고 여러분들 앞에 섰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이상의 깊은 진리와 힘이 십자가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십자가에서 찬란한 하나님의 영과의 광채를 보게 됩니다. 기독교 진리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는 항상 피상적인 신앙을 낳습니다. 우리들의 신앙 생활이 허하고 피상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신앙하는 기독교의 진리의 내용들을 확고히 붙잡고 그것으로부터 능력을 힘입는데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기독교의 진리의 내용들의 기초가 되고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기독교를 모든 종교로부터 구별해 주며, 세상의 모든 철학으로부터 뛰어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는 기독교로 하여금 이 세상의 모든 고상한 윤리가 따라 올 수 없는 종교가 되게 합니다. 앞으로 약 10주간 정도에 걸쳐서 연속으로 전해드리게 될 십자가의 설교를 통하여 저와 여러분 모두를 보다 광대한 기독교의 진리의 바다로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경험케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십자가는 기독교의 영원한 핵심이다"라는 사실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I. 본문의 배경

 

오늘 읽어드린 본문의 편지를 받고 있는 교회는 갈라디아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바울이 이방인을 전도하여 세운 교회였습니다. 처음에는 이 교회가 분명하게 복음에 기초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바울이 떠나자 거짓 선생 등이 들어와서 잘못된 복음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거짓 교사들은 유대인으로서 교회에 들어온 자들 중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십자가를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함께 구약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심각한 어려움과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해서만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되며,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화목될 수 있다는 사실이 부인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은 이제 복음을 떠나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참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랑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흐르는 물은 저마다의 노래가 있고, 지저귀는 새들은 저마다의 가락이 있습니다. 기쁨이 될만한 자랑거리가 없는 인생은 너무나 처량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것에서 자랑을 느낍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자랑 때문에 교만에 빠지거나 그토록 자랑하던 것 때문에 파멸에 떨어져 버리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공허한 것들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한 마리 나귀만도 못한 육체의 힘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단한 흙덩이에 지나지 않는 은과 금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으면 묘비에나 새겨질 명예나 권세를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말합니다. "무릇 자랑하려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전 1:31)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하노라"고 한 그 위대한 고백을 하기에 앞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며 매달리는 대신에 인생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줍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나려 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준엄하게 꾸짖은 후 편지의 결론 부분을 적어가고 있습니다. 이 서신의 마지막 부분인 7절에서 다시 한번 나지막하나 준엄한 어조로 인생의 진실을 증언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6:7)

 

그것은 두 가지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인생이란 마치 식물을 심는 것과 같다는 것이고, 또한 인간은 자기가 심은 그것을 반드시 스스로 거두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일과성무대와 같은 것이 아니라, 살아서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두어 들이게 되는 심각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피할 수 없는 진술은 언젠가 인간은 죽게 되고, 그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9:27)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은 죽은 다음의 일이지만,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 어떤 식으로 살았느냐에 의해 심판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일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의 부조리한 삶은 죽음과 함께 영원한 미궁의 무덤에 묻힐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살았던 삶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삶으로 살아온 바에 따라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그러므로 이 심판은 이 세상의 부조리를 최종적으로 해결해 주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도 말하기를 "사후의 심판이 있다 없다를 말하기에 앞서 그것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니다.

 

오늘 본문 7절은 두 종류의 삶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는 육체를 위하여 수고하며 애쓰며 그것을 자랑하는 삶입니다. 그들은 육체로부터 열매를 거두지만 그것은 모두 썩어질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길 앞에서 그 육체로 심어 거둔 열매들은 쭉정이처럼 힘없이 타 없어지고 맙니다. 또 하나는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입니다. 이것은 영생의 열매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을까요? 기독교의 복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떻게 살아야만 이 땅에서 누리는 행복들이 허무한 것으로서 끝나지 아니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만 이 세상의 행복과 불행에 의해 인생 전체가 뒤집혀야 하는 비극을 피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며, 무엇을 힘입어 우리가 이빨을 무섭게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죽음의 도전 앞에서도 우리가 사랑하던 것들을 놓지 않을 수 있겠니까? 어떤 삶을 살아야 만 이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두렵지 않은 담대함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려 날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엇이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그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겁나지 아니하는 존재가 되도록 만들어 줄까요?

 

II.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이 같은 질문에 대해 오늘 사도 바울은 감격과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토록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자랑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는 분명히 평생 동안 그리스를 자랑하며 그의 교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오늘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자랑한다"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있음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오히려 비참하고 혐오스러운 형틀인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생애를 돌아볼 때 자랑할 만한 것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는 어두운 밤, 찬란하게 빛을 발하며 그분을 탄생을 알리던 천체의 이적을 자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평화의 대헌장이라고 불 수 있는 산상수훈을 설교하시던 팔복산을 자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열린 무덤을 자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주님이 하늘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는 재림의 사실도 그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음에 틀림 없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재림하실 때는 천사장의 호령 소리와 천사들의 나팔 소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의 모든 성도들에게 찬송을 받으시며, 우리들도 그 기쁨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 사도는 이 모든 자랑거리들을 곁으로 밀치면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적대자들로부터 가장 심한 공격과 박해와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십자가를 생애 최고의 자랑거리로 택하고, 지금 온 몸과 마음을 다해 그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서신서들 속에서 주님을 가리켜 여러 가지 표현으로 말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라 했고, 어떤 곳에서는 "그리스도"라 쓰기도 했습니다. "예수"라고 부르기도 했는가 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 "우리 주"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도 아니고 "그리스도"도 아니고, "예수"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의 멸시와 핍박과 조롱의 대상인 십자가를 뻐기는 듯한 뽐냄이 담겨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기에 멸시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원했기에 경멸한 그 십자가를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며 뽐내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 그는 유대인 유대인이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2:4-6). 그는 헬라 철학에 능통한 자였습니다. 그는 루스드라에서 웅변의 신 "허메"라고 불릴 정도로 말에 능통한 자였습니다. 아테네에서는 당대의 이름있는 철학자들인 에피큐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사람들과 논쟁을 해서 논리로 그들을 압도하였습니다 (17:17-18). 그런데 그는 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습니까? (고전 2:2)

 

III. 기독교의 영원한 핵심 십자가

 

우리가 기독교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초대 교회의 선포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이때에는 사도라 불려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독교회의 초석을 놓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회의 진리는 이들에 의해서 짧은 시간에 기초가 놓이게 되었고 후대 기독교회의 특성을 규정짓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가르침은 결코 창의적인 것이 아니었고,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주제는 역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은 시간적으로 불과 하루 동안에 일어난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불과 하루 남짓한 이 사건을 열세 장에 걸쳐서 생생하고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설립되던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도 십자가에 대한 선포를 듣는 일 없이는 책장을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십자가에 대한 교회의 선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뒤이어 놓인 서신들에서도 뛰어난 주제는 역시 대속적인 죽음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환영 받는 설교 제목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장애물이었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본문은 말합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6:12) 십자가를 설교하는 자에게나, 그것을 듣고 따르려는 자에게는 핍박이 랐습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불쾌감과 혐오감을 줄 때가 많았습니다. 개의 막대기로 이루어진 형틀인 이 십자가는 환영 받지도 못했고, 공교한 이론의 상징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이 십자가를 비웃고 그것을 따르려는 자들에게는 핍박이 있었으며, 그것을 외치는 자에게는 순교의 칼날이 번뜩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끝까지 이 십자가를 전했습니다. 이 십자가만을 외쳤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셨던 기독교를 세우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흘러 들어온 가르침이나, 거짓선지자들에 의해 교회 안에 퍼지게 된 가르침에 의해 우리의 신앙의 표준을 설득 당하는 어리석음에 넘어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근본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무엇이 기독교의 핵심이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회가 설립 초기로부터 증거하고 있는 기독교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그릇된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기독교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사랑"이라고 말하고 "주님의 교훈"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독교의 창시자로 모신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의 산상수훈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분 윤리적인 가르침을 고상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런 고상한 사랑의 요구나 윤리적인 가르침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는 자비의 영역을 자연계의 생명에까지 확대하지 않았니까? 이 문제에 관해서 제가 종종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이 사랑의 계명을 전하며, 산상수훈을 모두 지켜 살아가기만 한다면 이 땅에 평화가 이룩될까 하는 것입니다. 과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더 없이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고 고매한 덕성을 함양한 채 살아가기만 한다고 해서 이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 될까요?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오늘 "내게는 예수님의 윤리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내게는 산상수훈 외에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기독교의 핵심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 드리거니와 이런 것들은 기독교의 진리의 중심 자리에 와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진리의 내용들 속에 이런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결코 세상은 교회로부터 이런 진리들을 먼저 듣기로 되어 있지 아니하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전한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죽음"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그토록 외치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였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선포하고 그 의미를 해석해 줌으로써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선택하도록 결단을 촉구하는 외침이었습니다.

 

IV. 십자가에 나타난 대속의 진리

 

바울이 왜 이처럼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가 그를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대속의 교리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하고 그 진리를 깊이 경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속이란 원래 남이 지은 죄를 대신하여 그 죄의 대가를 받음으로써 원래의 죄인을 용서받게 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가 이 같은 대속의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자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 전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어떤 판사가 범죄자를 재판하기 위해서 재판석에 나아갔는데 그 죄인은 바로 젊은 시절에 둘도 없이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업을 하다가 모두 망해서 빈털터리가 되고 죄까지 짓게 되었습니다. 그가 저지른 죄가 무엇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만, 상당한 액수의 벌금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판사는 둘도 없던 옛 친구의 범법 행위가 선고 받아야 할 벌금을 한 푼도 감하지 않은 채 큰 액수의 벌금형을 판결했습니다. 방청객 중에서 그들이 지난날 둘도 없는 친구 관계였던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인정머리 없는 판사를 욕했습니다. 그러나 재판이 끝난 후 이 판사는 친구를 끌어안고 위로하면서 친구가 물어야 할 거액의 벌금을 대신 납부해 주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에 대해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반역한 이후로 모든 사람들은 죄인으로 태어나 죄 아래 살다가 죄인으로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끊임 없는 관심은 죄와 죄에 대한 형벌입니다. 그 많은 계명과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범죄하며, 하나님은 이 죄를 끝까지 추적하여 징벌하고야 만다는 사실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인간의 범죄와 이것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가해지고야 마는 형벌, 이것이 바로 구약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받는 일반적인 인상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를 볼 때 십자가가 자랑스러워집니다. 죄는 마땅히 형벌 받아야 합니다. 죄에 대한 공정한 징벌은 사회를 부패로부터 구하고 죄로부터의 오염을 막아 줍니다. 만약 죄가 사소한 것으로 취급된다면, 선도 하찮은 것이 될 것입니다. 법이 있어도 형벌을 집행하지 못하거나 형벌이 가해져도 있으나마나 한 식으로 된다면 사회는 건전하게 서 있을 수 없습니다. 때 사람들은 오늘날의 제 6공화국을 가리켜" 정부"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인신 매매가 유행병처럼 번지고, 여인네들이 해가 떨어지면 두려움 속에 거리에 나가야 하는 사회상을 봅니다. 젊은 여자들은 물론 중고등학생과 가정 주부 심지어 유아까지 성폭행 당하고 납치되어 가는 사회상을 보면서 사람들은 지금의 법으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국회는 이런 종류의 범법자들에게 더 무거운 형벌을 주기 위해 입법을 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요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선과 덕을 지키기 위해서는 죄가 마땅히 응징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모든 사람들의 양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세워져야 하고 자비도 그러합니다. 만약 인간의 범죄에 대한 아무런 형벌이 없이 구원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비참한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자비로운 사람이라도 범죄한 자가 아무런 가 없이 놓여나는 세상을 원치 아니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바로 이같이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우리의 죄인 된 상태에 대해 말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우리를 향한 성경의 끊임없는 지적은 우리가 참으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죄인인지 그 죄인 된 상태가 개선될 여지조차 안 보이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설교자의 비유처럼 우리의 죄인 됨은 마치 여름날에 썩어서 형체조차 알아 볼 수 없게 문드러져 버린 정도라는 것입니다. 이 죄는 결코 어떤 구체적인 악행이나 윤리적인 범죄 행위가 아닙니다. 나라의 법을 어긴 구체적인 범법 행위가 아닙니다. 영어에서는 이런 종류의 죄를 가리켜 "범죄(crime)"라고 합니다. 그러 성경이 십자가의 대속과 관련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죄는 우리의 영혼과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sin)"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악행이 아니라, 죄짓기를 즐겨 하고 악을 행하기를 욕망하는 경향성입니다. 한마디로 죄란 하나님을 떠나 살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의 경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악한 행실과 부패는 바로 이 같은 경향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셔야 했던 죄도 바로 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같은 우리에게 일찍이 수 없었던 가장 큰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음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십자가를 말할 때 우리의 공의와 손잡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죄악을 징벌하시던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 죄인의 모습을 취한 것을 보십시. 그분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기를 사양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낮추시고 결국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애에 대한 예수님의 고백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마태복음 16장은 이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충격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613절부터 19절까지 읽습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라사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16:13-19)

 

그러나 그 다음을 보십시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16:21-23)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에 고난 받으실 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치시기 시작한 것은 바로 베드로의 이 올바른 신앙 고백이 있은 직후부터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았고 가장 훌륭하게 신앙 고백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비로소 자신이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어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말렸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어떻게 죽는 일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거니와 있어서도 안될 것이옵나이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분의 설명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너는 대속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너희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자체가 너희를 구원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세상을 구원하는 일은 내가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음으로써만 가능해진단다"

 

대속의 진리에 대한 이해 없이는 결코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우리는 대속의 신비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분은 무한히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시며 영원토록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지 죄인들 중의 하나로 자신을 낮추시고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 지셨습니다. 그가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던 날 기독교는 더 이상 유대교의 품에 있지 아니하였으며, 복음 다른 모든 종교의 가르침과 함께 서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는 바로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THE WAY, THE TRUTH, THE LIFE)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인간들이 고안해 낼 수 없었습니다. 어떤 나라,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이 같은 종교적인 고안은 없었던 것입니다.

 

V.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반응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비참한 죄인이요, 소망이 없는 죄악 가운데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까지도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엄청난 타락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대신 죄의 벌을 담당해 죽으신 십자가의 구주이신 것을 믿는다면, 오직 이것으로써 여러분은 여러분들이 저지른 모든 죄악으로부터 완전히 의롭다 함을 얻을 것입니다. 이 대속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반응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이 사실을 믿는 것뿐입니다.

 

믿으십시오. 여러분들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이제껏 여러분들이 입고 있었던 더러운 옷을 모두 벗겨 주십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의의 옷으로 입혀 주십니다. 이 옷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전과의 낙인이 찍힌 죄인이 아니라, 결코 죄를 범한 적이 없는 사람으로 서게 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로 하여금 그토록 멸시와 혐오의 대상인 십자가를 자랑하게 한 이유였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6:17) 그는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낙인 찍힌 종이었니다. 그 낙인은 뜨겁게 달구어진 쇠로 그의 심령 깊은 곳에 찍힌 것이었기에 결코 지워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고 그 신앙은 바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불변하는 복음은 진리입니다.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이들에게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 바로 당신을 대신해서 그분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서는 계속해서 이 십자가의 선포에 마음을 기울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외침이 공허하게 들리거들랑, 성경의 이 경고를 들어 두십시오.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13:40-41)

 

구원받았으나 이 십자가를 떠나 살아가는 형제 자매들에게 내가 동일한 사랑으로 증거합니다. 이 자랑스러운 십자가의 깃발 아래로 모이시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 번 우리의 심령이 거룩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를 주목하며, 그의 보혈이 우리의 영혼을 적셔올 때 우리는 또다시 영적 승리를 위해 예수님의 대적들을 향하여 진군하는 나팔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반드시 세상과 죄악을 이기고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는 영광스러운 개선의 행진을 계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하나님! 우리들이 이 십자가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