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갈라디아서

[갈6:1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코이네' 2022. 10. 13. 21:41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울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세상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다는 말입니다. 바울도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무엇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공동묘지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 때 이 세상에 대하여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제 이 세상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반응할 수 없습니다. 세상도 그들에게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더 이상 세상과는 상관이 없이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한 때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특권이었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최고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열심히 특심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깨달은 후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바울은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십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 신앙생활의 원동력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영접함으로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세상도 우리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세상으로부터 초연하게 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이러한 삶의 자세가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의 삶의 태도입니다. 가진 자들은 가지지 못한 자 같이 살며 베풀어야 합니다. 기쁜 사람은 그 기쁨에 도취되지 말고 기쁘지 않은 자들을 돌아보며 살아야 합니다. 슬픈 일을 당해도 지나치게 슬퍼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위로를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사는 것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너무 세상과 짝하며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로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할례나 무할례와 같은 종교의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할례 받으면 어떻고 안 받으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영접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본질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서 빚어졌는가, 그렇지 않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2:10).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삶의 동기와 목적도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가족관이 달라집니다. 결혼관도 달라집니다. 직업관도 달라집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지고 추구하는 바가 달라집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산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게 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됩니다. 주의 영의 인도하심을 좇아갑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이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율법의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으며, 주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이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스러워하게 됩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증거입니다.

 

겉으로는 신자라고 하면서 이런 내면의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세례 받은 거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새로 지음을 받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지 않습니다. 옛날 불신자 시절에 살던 방식 그대로 삽니다. 이는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주의 신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규레라는 말은 카논,‘()’라는 뜻입니다. 이 규례는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거듭나는 그리스도의 기본 진리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성령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언약의 규례를 따르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을 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