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갈라디아서

[갈4:4] 능력의 복음

'코이네' 2022. 9. 14. 21:48

능력의 복음 

성경/갈4:4-7

              


어떤 성도가 방송상담을하는데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교회에 다니면 축복을 받고 모든 일이 잘될줄 알았는데 여전히 저희 가정에는 어려운 일이 생깁니다.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왜 자녀들이 어려움에 처하도록 보고만 계신단 말입니까.󰡓 참으로 마음이 아픈 질문이었습니다. 상담하시는 목사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첫째 우선된 관심은 우리의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아무리 풍요롭고 잘된다해도 그 영혼이 잘못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영혼이 되기 위해서는 자아가 깨져야 합니다. 그 자아가 깨지기 위해서는 때때로 환경의 연단과 인내가 필요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 앞에서 영혼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바로서야 범사가 잘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복음을 깨닫고 구원을 얻어 복음의 말씀대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며 주님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인데 그 복음을 받는 것은 인간의 어떤 의로운 행위때문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게되어 구원에 이르는 것은 어떤 선을 행한다 어떤 착한 일을 행한다거나에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마치 교리처럼 생각을 합니다. 복음은 교리가 아닙니다. 복음은 사상이나 이념도 아닙니다. 복음은 신조도 아닙니다. 복음은 오늘의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구원이요, 능력이요, 힘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복음은 구원의 교리를 가르쳐주기 위해서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오늘 우리가 살면서 격는 답답하고 어려운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복음은 우리의 영혼을  죄에서 구원할 뿐 아니라 우리의 현실과 삶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4:4-7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복음의 능력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과거의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4:4에 보니 때가되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셔서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율법아래 나셨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으로 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에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속량」이란 무슨 뜻입니까.「엑세고라센」이라는 단어는 3:13절에서도 쓰였습니다. 이 말은 “값을 치루고 사다” “댓가를 지불하고 사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시대에는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노예를 살 때는 그에 해당하는 몸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노예의 값을 준 그 행위가 속량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엡2:2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공중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누구를 따라다니는 종이었습니까. 공중권세잡은 사단을 따라다니는 종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사단의 종이며 노예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들을 했습니까. 3절에보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더니” 라고 했습니다. 종이란 주인이 시키는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의 곁을 떠나 사탄의 종이되어 세상의 영광과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며 하나님의 뜻을 떠나 범죄하며 살았습니다.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사탄을 말을 따랐습니다.그리하여 우리는 죄와 사탄의 종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자신이 사단의 종인줄도 모르고 하나님이 계신 줄도 모르고 살았던 것입니다.결국 우리는 사탄과 함께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어야할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떤 나라에는 에이즈라는 무서운병에 국민 3/1이 걸렸는데 자신이 감염된것 조차 모르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파멸로 끌고가는 무서운 죽음의 병이 자신의 몸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사는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영혼이 이와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썩어서 영원한 죽음으로 가고 있는데 인간은 그 사실 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죄를 지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래도 남들보다는 선하게 살았다고 변명합니다. 그것은 마치 컴컴한 어둠속에서 자신의 옷을 바라보며 내 옷에 어디가 때가 묻었느냐고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죄로 물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탄의 손에서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속량의 댓가로 주님은 십자가에 흘린피를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비리와 사회적인 죄로 말미암아 오랜세월 동안 친구를 잃었던 세리 삭개오의 과거를 다 용서하시고 그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과거를 묻지않고 용서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은 참으로 부도덕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의 과거를 묻지않고 복음을 주셨습니다. 심지어 주님을 부인하고 떠났던 베드로를 만났을 때도 그의 부끄러운 과거를 한 마디도 묻지 않았습니다.
복음에는 주님의 용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할 과거의 죄악의 댓가는 이미 주님께서 지불하셨습니다.주님께서 댓가를 지불했다는 것은 이와같은 경우입니다. 내가 은행에서 돈을 여러번 빌려다 썻지만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은행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독촉장이 날아옵니다. 날마다 전화가 옵니다. 급기야는 고발해서 재산을 몰수하고 구속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그런데 어느날부터 인가 은행에서 전화가 오지 않습니다. 독촉장도 오지 않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은행에 가보았더니 누군가가 자기의 이름으로 과거에 빌렸던 그 엄청난 많은 돈을 다 지불했습니다.은행직원들이 수고했다고 악수를 청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갚아야할 죄의 댓가는 무엇입니까. 롬6:23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망은 영원한 고통가운데 처하는 영혼의 둘째사망입니다. 그 죄의 부채를 우리가 주님을 알기도 이전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다 갚아주셨습니다. 댓가를 주고 우리를 죄의 종에서 속량하여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갈5:1에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말라”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용서의 복음에 감사하십시다.탕자를 받아주시듯 우리의 부끄러운 모든 과거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십시다.혹 과거 때문에 아직도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 있습니까. 용서의 확신이 없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를 죄를 속량하신 주님의 은혜에 새로운 기쁨과 감사가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현실의 삶에서 승리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5절과 6절을 보니 우리에게 아들의 명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과거 우리의 죄를 용서할 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주는 것입니다. 아들이라고만 하니까 여자 분들은 섭섭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에 쓰인 의미는 남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여 모두를 대표하는 의미로서의 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우리자신을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드는 환경에서 승리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격는 아픔 중의 하나는 어디에 가든지 당신의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어떤 신분의 사람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어디를 가든지 사람을 평가할때 그 사람의 인격보다 그 사람의 신분과 지위를 가지고 퍙가합니다. 쉽게 말해서 명함이 없는 서민들은 자신의 모습에 초라함을 느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자신의 존재가 미약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한 나라의 대통령의 아들만되어도 어디든지 으쓱이며 나설수 있잖습니까. 우리는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입니다. 세상사람누가 뭐라든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결코 초라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디에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움추려들 이유가 없습니다. 비록 사회적으로는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고 아들의 신분을 주셨습니다.

  

셋째, 고난과 역경의 현실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크고 적은 고난과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때로 나 혼자만이 어려움을 격는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아무런 풍파없이 인생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서도 우리가 이길수 있는 것은 세상의 부모가 자기의 자녀를 선하고 유익되게 이끌 듯이 하나님의 롬8:28의 말씀대로 자녀된 우리를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하게 작용하게 하셔서 좋은 결과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배가 난파되어 무인도에 도착했습니다. 부서진 물품과 조각들을 주워서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집과 모든 물품들이 불에 타버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얼마후 배가 도착했습니다. 당신이 보낸 연기의 신호를 보고 구조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한 결과를 바라보십시다. 우리의 지혜로만 현실을 본다면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믿음의 눈으로 인내하면 결과적으로는 우리에게 복이 되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울에게 쫒겨다니는 다윗을 불행하게 여겼습니다. 다윗 자신에게도 고통스런 날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일들을 통하여 한 시대의 지도자를 만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좋은 결과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의 자녀를 불행하게 만드시지 않습니다.


넷째, 패배와 좌절 가운데 에서도 승리하여 일어설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 실패한 것만큼 고통스러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 실패 뒤에는 차가운 좌절감이 찾아옵니다. 누구나 내가 결심한 결심이 실패로 끝나버리는 참담한 현실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런 현실을 이길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는 아들의 영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아들이신 주님의 영인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외면 하십니까?
 주님께서 요14:16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서 성령은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실패한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우리의 낙심한 어깨를 부축하십니다. 넘어진 무릅과 마음을 싸메주십니다.
  여러분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날마나 맑은 날만 있지는 않잖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만왕의 왕이요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복된 소식이 오늘의 현실을 사는 여러분에게 힘과 용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장래의 소망 가운데 살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축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래에 어떤 것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유업을 이을자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상속자라는 말입니다. 복음에는 과거와 현재의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축복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게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우리가 받을 장래의 축복까지 이미 준비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저희 큰 아이가 2살때 언젠가 어머니께서 뭔가를 내밀었습니다. 자세히보니 교육보험계약서였습니다. 앞으로 대학때까지 수업료를 책임지는 보험입니다. 당신이 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단지 손자라는 이유 때문에 아이가 아직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할 할때에 이미 유익된 미래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이 아이가 앞으로 선을 행하지 않을 때에는 이 계약이 취소된다는 조건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 이십니다. 사람의 이땅에서 뿐 아니라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하늘나라에서 받을 유업과 기업까지 이미 준비하시고 계획하시고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엡2:1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실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준비하신 축복된 장래는 우리가 바꿀수 없습니다. 혹 우리가 구원받은 다음에 하나님께 의를 행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은 여전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를 부르실 때에 작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을 때에 이미 주시기로 계획하신 것입니다.롬8:32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기 이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위하여 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장래의 복된 소망이있습니다. 또 아울러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는 사람에게는 그에 따른 상급의 축복까지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울도 이 소망을 바라보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롬8:18에서 말씀하기를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수 없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내일에 희망이 없는 사람의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소망을 둘데가 없습니다. 이러다 죽으면 그만이지 하면서 삶을 체념해 버립니다. 우울증에 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장래에 소망을 두고 살수가 있습니다. 인생을 마칠 때까지 희망과 소망 가운데 가치있는 일들을 하면서 살수가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대전에 잠깐 들렸는데 제가 15년전 주일학교에서 가르쳤던 최명수라는 형제를 만나서 큰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 형제는 그 때 주일학교 학생 중에서 가장 불쌍하고 불행했습니다. 아버지는 술과 놀음으로 방탕하고 어머니는 가족을 두고 떠나고 누나는 살길이 없어서 양녀로 갔습니다. 국민학생이었던 그 친구는 여기저기 얻어먹으러 다녔습니다.주일하교에 다닌 것도 간식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그 때 “저애는 과연 바르게 성장할수 있을까?” 하고 염려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풀륫을 전공하여 교회예배 음악과 성가대를 도우며 음악인으로 성장했던 것입니다. 저는 그의 미래에 대한 조금의 관심도 잊은채 15년의 세월을 지내왔지만 그때 그를 부르셨던 하나님의 그에 대한 풍성하고 복된 장래의 계획을 이끌어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아무것도 우리 뜻대로 할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장래를 복주시며 축복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에 감사함으로 맡길 뿐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기쁜 소식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선거에 당선, 서울대에 합격, 1등의 복권에 당첨, 등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모든 소식들은 이 땅에 있을 때에 육신을 만족을 위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왜 진정 인류에게 기쁜 소식입니까. 인간의 육신의 삶은 물론 영혼까지 복되게 만드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용서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범한 모든 죄를 주님께서 속량하셨습니다.어떤 과거가 있든지 다 용서하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의 현재의 삶을 승리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장래를 소망 가운데 살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소식인 복음을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음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이 복음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 복음의 능력에 힘입어 살고 있습니까? 가장 풍성하고 복된 미래를 보장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 밖에 있는 세상사람들보다도 더 가난하고 없는 것처럼 소극적으로 의기소침하며 살지는 않았습니까?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스런 섭리와 은총을 감사하며 오늘도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이 은혜를 확신하며 기쁨과 용기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서 북음의 능력으로 세상끝날까지 승리의 노래를 부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