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살리라
갈 3:10-14
우리는 근래에 들어 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정치 개혁, 경제 개혁, 사회 개혁, 나아가서는 의식 개혁... 그러나 우리는 종종 실망할 때가있습니다. 또한 자기 개혁 없는 개혁의 부르짖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게됩니다. 내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개혁이 없는 사람들이 개혁을 하느니 무엇을 하느니 떠듭니다. 이제는 개혁하자고 외치는 얘기조차도 굉장히 가소롭고 때로는 지겹게 들리기도 합니다. 자기 개혁 없는 개혁,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웃기는 얘기 밖에 안됩니다. 점점 일은 더 복잡해지기만 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개혁’은 영어로 ‘reformation’‘reform’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순수성으로 돌아간다, 본래성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교인 가정에 심방을 가보면 가끔 30년 전의 결혼 사진을 벽에다 붙여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낡아서 누렇게 변색되었지만 저는 그 사진을 붙여 놓은 의도를 알 것 같습니다. 간간이 살아가는 것이 피곤하고 지칠 때마다 ‘옛날에 저런 때도 있었는데’하고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혁입니다. 본래의 뜻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종교개혁자의 근본 관심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사회도 아니고, 경제도 아니고, 정치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거창하게 세상을 바꾼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애당초 본래의 관심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였습니다. 이 관계가 바로 될 때에 엄청난 역사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아무일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된다면 그것은 허상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개인적 책임을 묻고, 자기 개혁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이 남북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노예 해방을 위한 전쟁이니 만큼 의미가 큰 것입니다마는 어쨌든 서로 싸우고, 총을 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양쪽이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양쪽이 다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전쟁을 합니다. 또 간단히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7년으로 길어져서 많은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참모들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마침내 한 참모가 대통령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다면 참 좋겠는데요. 그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링컨은 대답합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건가? 나는 하나님께서 내편에 계신지 안계신지 의심해본 일이 없네. 내 관심은 오직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내가 정녕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가, 그 것 뿐이네.”
보세요.종교개혁자의 마음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되었는가, 이것을 묻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죄많게 느껴져서 이 죄로 인하여 ‘내 죄, 내 죄...’하며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죄의 문지를 해결합니다. 해결되는 바로 그 때에 개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자 그런고로 종교개혁자의 관심은 의의 문제요, 죄의 문제요, 의롭다함을 얻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의 문제로, 은혜의 문제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입니다. 핵심은 죄의 문제입니다.
현대에 있어서도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수많은 문제들이 있으나 우리는 죄의 문제에 대해서 너무나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번영을 생각했고, 샌생을 생각했고, 분배를 생각했고, 평등을 생각했고, 자유를 생각했습니다마는 의와 정직함을 잊어 버렸습니다. 보세요. 의의 문제가 없는 번영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성실이 없는 건설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이제와서 사건이 벌어졌느니 안벌어졌느니 하는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얘기가 아닙니까? 불성실했으면 부러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 부러졌느냐고 물을 것 없어요. 아무때에라도 불성실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거짓은 들어나고야 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못됐으면 잘못된 것이지 거저 잘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잘못된 마음이지요. 또한 교육도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부모들이 자녀들을 향해서 말을 합니다. 옛날 어른들은 귀가 따갑도록 ‘착한 사람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잘하면 착하다고 칭찬했어요. 그러나 요새는 공부해라, 일이나 해라, 일류대학에 가라, 돈 벌어라...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그 외에는 한 마디도 없어요. 정직하라, 성실하라는 말은 들어 볼 수가 없어요. 이런 교육이 나중에 어디로 가겠습니까? 지금의 교욱이라는 것은 오로지 생산 수단이요, 인간을 만드는게 아니라 돈 버는 기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관심이 여기로 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기서부터 개혁이 와야 합니다.
저는 어제도 결혼주례를 섰습니다. 신랑 신부가 아주 예뻤어요. 가끔 어떤 분들이 “목사님, 결혼 주례 서는 것이 참 피곤하지요?”라고 묻습니다만 그실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뒷모습만 보고 저만 그 두사람을 앞에 세워 놓고 있으니 참 재미있스빈다. 어쨌든 저는 이런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저 남편보고 너무 출세하라고 그러지 마세요. 요새 부끄러움 당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하나같이 장가를 잘못가는 사람들입니다. 부인이 자꾸 돈 벌어라, 출세하라, 밑바닥에서 사니까 창피하다, 하니까 억지로 출세하고, 억지로 돈 벌려다가 그 모양이 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얼마를 벌어오든 ‘우리, 그저 정직하게 삽시다. 화목하게 삽니다.’ 하는 아내가 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그저 정직하고 성실하게 이것이 소원이요, 이것이 모토가 되어야지 잘 살고 출세하는 것이 뭐 어떻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얼마나 불행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 만하지 않습니까? 이제 더 무엇을 바랄 것입니까? 다시 한 번 생각 해보십시다. 부정과 불성실, 그 위에 세워진 번영과 건설은 아무것도 아니요, 그처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죄인이라고 하든 말든, 칭찬하든 표상하든 여기에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런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개혁자의 관심은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간혹 우리는 쓸데없는 얘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얼마를 내 놓고, 또 얼마를 사회에 환원하고... 한심한 소리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합니다. 이 충격으로 인해서 도둑맞은 집의 부모는 죽었고, 아이들은 고아가 됐습니다. 그야말로 온 집안 풍지박산입니다. 그 도둑이 나중에 돈 벌어 갚겠다 한들 보상이 되는 것입니까? 무슨 소리하는 겁니까? 구제한다고 해서 되는 것입니까? 그 몇 백만배를 준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까?
속죄란 없는 것입니다. 지나간 일을 자기가 어떻게 보상하겠다는 말입니까? 요새 걸핏하면 누가 죽었다, 그 다음에 보상한다 하는데 처음부터 보상이란 없는 것입니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다같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의 것을 누가 받습니까? 받을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상의 죄는 우리 스스로도 그 누구도 속죄할 수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죄문제를, 이미 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해결하는 방법으로 몇 가지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에 호소해서 금식을 하고, 규율울 엄하게 지키고, 심지어는 자학행외를 하면서까지 교행을 합니다. 일평생 고행을 해도 속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자 고행을 해도 죄사함 받을 수 없습니다. 또 감각에 호소해서 구제하고, 봉사하고, 선행하고, 업적을 세우고, 나라를 위해서 굉장한 일을 했다고 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입니까? 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그런고로 해서 그 뼈아픈 상처가, 그 죽은 사람이 되살아 납니까? 세상에서는 그런 얘기를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양심 앞에 이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내 죄의 문제는 내가 해결하지 못하며, 해결한다고 하는 속죄에 관한 얘기는 자위 뿐이요, 거짓말입니다. 스스로 속고 있고,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의롭게 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종교개혁자의 관심은 여기로 돌아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율법의 길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율법에는 고발성이 있습니다. 죄를 고발합니다. 이것이 죄다, 저것이 죄다, 합니다. 요새도 보면 고발과 비판이 해결의 길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는 이리 쑤시고, 저리 쑤시고 하지만 아무리 쑤셔봐도 치료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듣고 보면서 모든 사람의 마음이 황폐해졌을 뿐입니다. 세상에 어디 고발하는 것으로 치료되는 것, 봤습니까? 아이들 가르칠 때에도 이게 잘못이다, 저게 잘못이다 자꾸 지적하면 아이들이 집을 나가버리고 맙니다. 더 나빠집니다. 그래서 똑똑한 어머니가 자식을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속을 줄 아니?’ 하며 전부 쑤시는데 끝도 없어요, 이게 됩니까? 고발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율법적 행위는 안되는 것입니다. 또 율법에 감급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 죄를 짓고 나면 감옥에 갇히는 마음이 됩니다. 꼼짝달싹 할 수가 없어요. 뭘 좀 하려고 하면 ‘너같은 놈이, 너같은 죄인이, 네 과거가 이랬지 않느냐’하게 되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율법 앞에 감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길이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종교개혁자는 말합니다. 전적 타락을 시인하라--total depravity,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시랑을 많이 받은 다윗이 나옵니다. 사람의 이름 중에 다윗이 제일 많이 언급이 되는데 그 횟수가 무려 팔백 번 이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다윗이 위인은 아닙니다. 무서운 죄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랑을 받은 것은 그의 정직함 때문입니다. 그는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자복할 때에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인정합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지은 죄인데, 다같이 공모한 것인데, 그 여자가 잘못했는데...’하는 말도 없고, 환경이 어떻다는 말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바로 이것이 종교개혁자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노력은 다 포기해버립니다. 의롭고자 하는 노력마저 불가능하다고 인정합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강물에 빠졌습니다.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구조대원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건질 생각은 않고 서서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빨리 들어가서 건지라고 야단을 해도 대꾸도 않고 가만히 서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다가 지친 나머지 기진맥진합니다. 그제야 구조대원이 물에 물었습니다. “왜 사람을 빨리 건지지 않았소?” 구조대원은 말합니다. “저렇게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발악할 때에 물에 들어가면 저가 나를 꽉 붙듭니다. 그렇게 되면 나도 죽고, 저도 죽습니다. 완전히 기운이 빠져서 손을 들어야 돼요.”
그렇습니다. 완전히 항복한 다음에야 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버둥버둥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자기가 의롭게 해보겠다며 자기 노력과 자기의지로 백번 맹세하고 손을 잘라보세요. 그런다고 뭐거 됩니까? 혈서를 쓴다고 되는 게 아니예요. 종교개혁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 그 노력까지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다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이것이 믿음의 길이요, 의의 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것은 selfrighteousness--자기 의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롭게 되고자 하는 노력까지도 포기합니다. 그리고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의를 수용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수용합니다. 그 거룩한 능력을 수용합니다. 그리고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의롭다함을 얻는 거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샴마이라고 하는 랍비가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에는 365가지의 금지사항과 248가지의 명령이 있다고 합니다. 다윗은 시편 15편에서 이것을 11가지로 요약해서 말합니다. 이사야는 이사야서 33장 14.15절에서 5가지로 요약해서 말씀합니다. 미가는 미가서 6장 8절에서 하나님께 원하시는 것은 3가지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이기도 합니다마는 하박국 2장 4절애서는 오직 한마디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요약합니다. 신학적으로 아주 복잡하고 또 중요한 문제를 가진 요절입니다. 이 말씀은 두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위인은 살리라, 라고 해석되기도 하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전자는 교리문제요, 후자는 윤리문제가 됩니다. 이 신학적 논단을 이 시간에 더이상 설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내 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 살고, 내 능력, 내 지혜에 의지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 신앙의 근본이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그런고로 믿는 사람은 믿음으로 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봅니다. 믿는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믿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 그런 것을 믿습니다. 죄인이 구원받았다는 것,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것,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엄청난 사실을 믿습니다. 또한 상상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일을 받아들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저는 성경에서 제일 뻔뻔스러운 사람이 돌아온 탕자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돌아왔다고 아버지가 잔치를 벌여준다 해서 떡하니 잔치상을 받아먹는 그 아들을 좀 보세요. 얼마나 뻔뻔스럽습니까? 형님이 비판할만도 합니다. 아버지 재산을 다 없애고 돌아왔는데도 아버지가 영접해주니까 그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바로 그 염치없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나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되고, 영원히 죽을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서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것--이것, 수용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것을 믿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의 마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는 오직 은혜요, ‘오직 은혜로’는 오직 은총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일 뿐입니다.
H.A. 아이론 싸이드 박사가 쓴 [In the Heavener]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이런 얘기 한 가지가 인용되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암살하려고, 한 여자 자객이 경비병처럼 남장을 하고 궁에 들어 갔다가 살인에 실패하고 체포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여왕이 친히 나와 재판을 합니다. 심문을 받는 그는 담담하게 말을 합니다. “내가 잘못된 사람에게 고용되어서 이런 엄청난 죄를 지었지만 저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왕이 그에게 “그래, 내가 너를 살려준다면 그 댓가로 무엇을 하겠느냐?”하고 묻습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그 순간에 죄인은 “조건이 있다면 은총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여왕은 깊이 생각하고는 그를 석방했습니다. 무조건 석방했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영국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왕에게 그녀만큼 신실하고 헌신적인 여종은 없었다--석방된 이 죄인은 여왕의 종으로 일평생을 살았는데 그렇게 성실하게 살았답니다. 자, 이것이 은총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무조건 사함 받는 은총을 받았어요. 오직 믿음으로 말입니다. 이제 이 믿음을 가지고 살 때에 그는 조건 있는 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건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습니다. 내가 받은 은총, 이 조건으로 인해서 남은 생은 은총적 절대조건 안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아무 것도 바랄 것도 없습니다. 더이상 자기를 학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자를 내가 용서 못해도 안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기에 내가 용서하고, 남이야 뭐라고 비판했든 나는 용서받은 자로 삽니다. 용서받은 죄인으로 삽니다. ‘오직 은총으로’--이것이 자기 개혁의 근본입니다. 이 믿음으로 이 은총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오직 믿음으로’는 ‘오직 은총으로’를 의미합니다. 여기에 자기개혁도 있고, 사회개혁도 있고, 창조적 역사도 있는 것입니다.
'설교자료 > 갈라디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4:4] 능력의 복음 (0) | 2022.09.14 |
---|---|
[갈3:15] 믿음으로 이루는 약속 (0) | 2022.08.30 |
[갈5:16] 성령을 좇아 행하라 (0) | 2019.03.28 |
[갈5:7] 진리를 순종하라 (0) | 2019.03.25 |
[갈5:1] 기독교의 자유관 (0) | 2019.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