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골로새서

[골 2:6] 교회의 머리

'코이네' 2023. 5. 18. 17:51

교회의 머리

2:6

 

 

골로새서는 바울이 로마의감옥에 갇혀 있을때(AD62-63)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옥중 서신으로서 유대주의의 핵심인 율법과 그리고 위치적으로 헬라의 철학을 접하기 쉬운 지역에 있는 까닭에 헬라의 철학이 파고 들어 교회의중심을 이루는 복음을 어지럽게 하는 사실을알고 이를 엄격하게 배격하기 위한 내용으로 씌어진 책입니다.

당시 골로새라는 도시는 품질이 좋은 모직물과 옷감 등에 아름답게 그리고 질이 좋은 상태로 염색을 잘하여 세계적으로 알려진 국제도시였으며 지역적으로 동서를 연결하는 소아시아의 관문으로 중요한 무역 도시였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이 이방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이었지만 입지적 조건과환경적 영향으로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헬라의 철학사변 그리고 이방종교의 사상에 물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 한번도 다녀간 적이 없고 자기가 개척한 교회도 아닌(에바브라에 의해 설립된교회로 봄) 골로새교회에 복음을 증거할 사명을 사도의 견지에서 느끼게되어 복음을 편지로 보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미 전하여진 복음을 따르고 믿고는있었지만 어떤 외부의 영향력에 의해 견뎌내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상태에 빠져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기록되어진 내용을 살펴보면 교회는 무슨 일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점을 찾아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절대구원자이시며 절대적 주권자이심을 믿고 그안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요(4:23)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머리로 섬기려면 우리들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그 분의 통치에 맡겨야 하며 그분이 명령하는대로 순종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갖게됩니다.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처럼 복음을 받고서 다른 가르침과 다른 교훈과 다른 사상을 따라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또 그러한 요소들이 우리를 솔깃하게 하고 유혹한다 할지라도복음 외의 어떤 외부적인 요소에 의하여 우리의 신앙이 뿌리채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몰라서 신앙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으면서도 흔들린다는데 문제가 있는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몰라서 신앙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며 또 하등에 문제시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 우리의 신앙이 그러한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며 흔들리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진단해보아야 합니다.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하여 교회에 발을 들여논 이상 어떤 신앙수준에까지 이르러야 하는가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귀절뿐이지만 이 짧은 두 구절의 말씀이 우리에게 여기에 따른 바른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하는 것은 본문에 의하면{예수를 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곧 이 말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는 말씀인데 이 말씀 속에는 몇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원자인 것으로 알고 주로 믿었다는 뜻이요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인생모든 것을 절대 주관하시며 절대 주권자로 행세하실 수 있는 주인이라고 인정하여 그 분의 말씀 앞에서는 절대 순종하여 충성하겠다는 종된의지를 표명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곧 이말씀 속에는 예수를 주로 받기 전에는 다른 것을 주로 섬기고 있었으나 이제는 섬기는 대상이 예수라고 하는 분이요 순종과 충성의 대상이 예수라고 하는 분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라는 말은 예수님 당시에 이 말이 뜻하는 의미와 는매우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이 말은 최고의 권세자, 으뜸인 분,모든 것 위에 뛰어난 분,그리고 만유의 주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라는 낱말은 헬라어로 {퀴리오스}인데 노예들이 자기의 주인을 가리킬 때 부르는 말로서 문자로는 첫글자를 소문자로 표기하였고 첫글자를 대문자로 쓰면 로마제국을 통털어 오직 가장 권세있는 한사람만을 의미하는 낱말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에는 가이사 황제가 주님이었습니다. 특히 그때는 공무원이나 군인들이 길거리에서 만났을 때는 언제나 "가이사가 주님이시오"라고 인사를 해야했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옳소,가이사가 주님이시오"라고 대답하는 것이 예절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 기독교인들에게는이 문제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이사가 주님이시오"라는 인사에 그들은 "아니오,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시오"라고 대답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은 어려움에 빠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황제에게 밀고가 되고 정식으로 보고가 되어 핍박을 받는 요인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가이사 황제가 주님이라고 하는 높은 칭호를 받지 못한 질투심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권세에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과 충성의 대상이 황제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였기때문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를 주로 받았다고 하는 의미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삶을 명령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라고 믿고 있으며 그 분에게만 충성하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예수를 주로 받은 자는 어떤 의무를 갖게 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주로 받은 자는 항상 예수 안에서 행하여야 할 의무를 갖게 된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 하반절의 {그 안에서행하되}라는 말씀은 예수 안에서만 걷고 예수 안에서만 행동하고 예수안에서만 생각하고 말하고 모든 것을 계속적으로 실행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중심으로 살지 않고 예수 중심으로 산다는 말이요, 내 기쁨만을 추구하는 것이아니라 예수의 기쁨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요,내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행하여 산다는 의미요, 세상나라만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풍조나 유행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영접하는 차원에서 끝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입술의 고백으로만 머물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향해 원하는 바대로 주님이 원하는 수준에 머물러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안에서 행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골로새교회에 얼마나 많이 강조하고 있는고 하면 15회나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안에서} 또는 {그 안에서} {그 아들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안에 무엇이 있기에 바울은 자꾸만 "그안에서"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1)구속 곧 죄사함이있다고말합니다.(1:14)

인간의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지구촌에는 평화가 존재할 수없습니다.

2)완전한 자로 서게 하는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1:28)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불완전한 것일수록 안전은 없습니다.

3)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2:3)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이 찾고자 원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가장 크게 원하는 것은 보화입니다. 이 보화 때문에 희비극이 일어나고 전쟁이 터지고 사람 생명을 죽이고 살리는 일들이 반복되어왔습니다. 이 보화는 단순히 어떤 패물적인 가치만을 생각나게 하는 보화가 아니라 지혜와 지식의 보화입니다. 그것도 부분적인 보화가 아니라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입니다.

4)그 안에서 성령의충만이 있게 되었다고말합니다.(2:10)

세상이 알지도 보지도 깨닫지도 못한 거룩한 영의 충만함을 예수 안에서 받게된 것입니다.

5)그 안에서 죄로 죽은 우리가 생명으로 일으키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2:12)

우리는 이미 영으로 죽어버린 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으셨습니다.

 

셋째, 그 안에서행 한다는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1)예수 안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을 한그루 나무에 비유하고있는 내용입니다.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는 땅속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는 나무입니다. 세상 유혹과 사탄의 미혹과 이단의 감미로운 유혹에 넘어지지 않을 성도는 예수안에 신앙의 깊은 뿌리를 박고있는 자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뿌리를 깊게 박고 있다는 것은 예수를 깊게 안다고 하는데 있습니다.예수를 깊게 알면 알수록 신앙의 뿌리는 깊게 내리고 있게 됩니다.

2)그 안에 세움을입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마치 집을 건축하여 세우는 것과 같은 이치가 신앙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집은 불로 타서 없어질 재료로 짓고 있지만(나무,,)믿음의 집을 짓기 위해서는 불타지 않는 재료로 지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4:10-15까지의 내용을 보면 믿음의 집을 세우기 위하여서는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며,건축재료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써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재료들은 물속이나 불속이나 환경에 관계없이 변하지 않는 것임을 뜻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생각에다 신앙의 집을 지으므로 믿음이 수시로 바뀌어져 버립니다.어떤 사람은 자기의 감정에다 신앙의 집을 짓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기분에다 신앙의 집을 짓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에다 신앙의 집을 짓기도합니다.그러나 처지는 변하여도 변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말씀에다 집을 지어야합니다. 우리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믿음의 집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3)그 안에서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쓰러지고 넘어지는 이유는 예수의 교훈을 받지 않았기 때문 아니라 받은 교훈 안에 믿음으로 굳게 서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단에 쏠리기 쉬운 약점이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또 어떤 자가 이단에 쏠리기 쉽습니까? 믿음에 서있다고 말하면서도 감사치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입니다. 어디에나 교회 안에는 불만 세력이 있기 마련입니다. 불만 세력 때문에 교회가 어지럽혀지기도 하지만 불만세력을 포용할 수 없는 정죄세력 때문에 교회는 더 어지러울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왜 이땅에 구원파가 생겨나서 이 땅의 기독교계의 이미지까지 흐려놓고 있습니까?교회 안의 불만세력들을 선동하여 그리고 그 미혹을 받은 성도들이 미혹에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교회의 불만을 품은 자들을 교회에서 감싸지 못하고 사랑으로 이해하지 아니하고 정죄의 철퇴만을 가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설자리를 잃고그들에게 미혹되어 그곳에 서있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예수의 교훈을 받은대로 교회가 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들 자신이 교훈받은 말씀에 굳게 서있지 못한 까닭이요,믿음에 있다할지라도 감사치 못하고 원망과 불평을 일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하여 깊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를 아는 것만큼 감사가 넘치고 모르는 것만큼 불평이 솟고 예수를 깊게 아는 것만큼 믿음이 강하고 모르는 것만큼 믿음에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이 무작정 믿으라고 말하지않습니다. 믿음의 문제는 예수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커다란 문제점이하나 있다고 말한다면 상당히 오랜 세월동안 교회의 강단에서 {이해가 안되도 믿어라} {성경은 이해하려들지말고 믿기만 하라} {무조건 아멘해두면 복이된다}{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신앙의 피해를 보는 일이다}등등 맹목적 맹종신자를 만들어 버렸던 일입니다.예수를 알지 못하고 무조건 믿어버린 신앙인은 대단히 무지한 신자입니다. 예수를 깊게 알려고 하지도 않고 무조건 믿는 일에 뛰어든 신자일수록 자신과 교회 안에서 엉뚱한 짓을 할 수 있는 굉장한 가능성을 안고 다니는 신자입니다. 이러한 자는 골로새교회의 성도처럼 철학의 속임수에 끌려 다니기 쉽고, 율법적인 행위로 의로워질려고 애를 쓰며 행위의 문제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자입니다. 또한 믿음과 행위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여 살아가 버리고 마는 자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것입니다. 믿었다고 다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행위를 통해서도 유지하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간과 해서는 절대 안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구원 받았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깊게 알아야 합니다.

이 밤 예배에 참여하신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진정으로 예수를 잘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수 있습니까? 일주일에 한번 들은 주일예배 설교로 예수를 잘 알 수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더 나아가서 목회자가 일주일에 한 번 전하는 주일예배설교로 예수를 잘 알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3년 동안이나 주님과 직접 함께하며 배웠던 제자들도 예수를 깊게 알지 못하여 얼마나 예수님을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까? 부부가 살을 맞대고 수십년을 함께 살아도 서로의 인격을다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데 어찌 우리가 주일에 한 두번 모여서 목회자의 설교로 예수를 깊게알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렇다고 매 주일마다 목회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설교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느 부인이 세상을 일찍 떠난 남편의 장례를 치루고 나서 목사님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제가 남편과 무려 20년을 넘게 살았지만 아직도 남편의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실지로 맞는 고백입니다. 여러분의 지금 아내, 여러분의 지금 남편, 오래 살았지만 남편과 아내의 인격을 100% 다 안다고 생각됩니까? 그것도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안다고 하는 것은예수의 인격을 안다고 하는 일인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 세상에 계실 때 가장 힘쓰신 일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곧 자신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가를 잘 알수 있도록 하는 일에 가장 큰 역점을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깊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안다고 하는 정도가 그에게 완전히 사로잡혔다고 말하고 있는 바울과 같은 정도로 예수를 아는 일에 힘쓰고 알고 있는 인격적 지식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그야말로 예수께사로잡힌 바 되어 예수를 따라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 믿는 일이 너무나 기쁘고 즐겁게 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