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골로새서

[골 1:9] 우리 속에 가득 채워야 할 것

'코이네' 2023. 5. 6. 15:04

 

우리 속에 가득 채워야 할 것 

1:9-14

 

 

바울은 골로새 교인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실로 골로새에 있던 이 작은 교회는 매우 좋은 덕성들을 가졌던 듯합니다. 그들에게 충실히 전파된 복음의 진리는 귀하고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믿음, 사랑, 소망, 이 세 가지 복음의 은혜들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칭찬만 하기 위해서 가 아니라 바른 지식과 선한 행위 속에서 교회가 자라게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크게 두 가지를 구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식 및 이에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바울은 무엇을 채우라고 기도했습니까?

 

첫째는 지식을 채울 것을 부탁하며 기도했습니다.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1:9)“

이것이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입니다. 그는 나중에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1:10)해 달라는 기도도 덧붙였습니다.

무지는 모든 미신의 어머니다. 복음 생활 이란 무슨 일에 늘 몰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식을 멸시하는 자들은 그런 행위들을 실제로 일으키는 동기와 영감과 인도의 원칙들로 부터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인생 최대의 열망이었고 특권이었습니다.

*지식은 구원의 기초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지식은 또한 구원의 본질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아다’(17:3).

*지식은 성장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1:10).

*지식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목표입니다.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그렇지만 우리들이 다만 부분적으로 알뿐이며 우리들의 지식은 항상 불완전하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는 지식의 만족을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과 우리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겸비한 자세를 갖도록 늘 이 사실을 자신들에게 상기시켜야 합니다. 우리들은 형제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영원한 진리의 단편들은 우리 형제가 깨달은 진리의 일부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관용을 베풀어야 하고 서로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함께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한편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고전8:1)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 점을 주의 시켰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8:2 ; 비교. 고전13:2).

참 지식은 겸손하며 사랑과 동행합니다. 성경은 이 두 측면들을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을 지식의 오용을 바로잡는 평행추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빌립보서에서 지식을 그릇된 사랑의 교정대로 간주하였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1:9).

다르게 표현하면, 지식은 사랑이 결여되면 참지식이 아니며, 사랑도 지식이 결여되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메마르고 위험합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도 눈이 멀고 열매가 없습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갖기를 소원하는 지식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지식은 이론도 아니고 추상도 아니며, 거짓 교사들이 골로새 교회에 유입시키려는 사상처럼 소수의 특권도 아닙니다. 이 지식은 가설이나 어떤 조직의 미궁 속에서 상실되지도 않습니다.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을 아는 일은 실제적인 지식에 속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3:10). 바울이 말하는 지식은 인격체와의 교제를 통해서 옵니다. 사실 이 지식은 하나님과의 교제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한히 귀하고 한없이 고결하더라도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지식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내게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큰 두 개의 문제입니다.

이 이대(二大) 질문들은 이방인의 대사도였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처음으로 개심했을 때 부르짖었던 말이었습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주여 무엇을 하리아까?’(22:8,10)

하나님의 인격체를 아는 지식은 우리들의 깨닫기에는 너무도 깊은 신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어둠에 방치하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7:17)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은 그런 지식이 지혜와 총명을 통해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여지고’(1:9표준번역). 바울은 여기서 이런 것들이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신령한영적 자질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들은 받는다고 해서 노력을 할 필요도 없고 어려움에서 면제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컨데 바울은 어느 날 마케도냐로 건너와서도와달라는 확실한 소명을 받았습니다(16:9). 그렇지만 그는 고난을 통해서 갈라디아에 한동안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했습니다.(16:6, 4:13).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은 성경의 말씀과 우리 속에 내재하는 성령의 공동 사역입니다. 이 일은 우리 자신의 이성과 판단 기능들을 통해서 지혜와 총명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들의 환경 및 우리들의 생각들은 주님 앞에서 명상과 기도와 인내와 겸손으로 자세히 살펴보고 달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은(벧후1:3) 우리들이 피동적인 상태에 머물지 말고 적극적으로 우리의 모든 기능들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밷후1:5).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이 귀한 지식의 은사는 성령에 의해서 조명을 받고, 인도되고, 감동된 우리 자신들의 사고 기능들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둘째는 실천을 통해 삶에 채울 것을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일상 생활에서 바로 적용되는 실제성이 있습니다.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1:10-11)

실천은 지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고 또한 그의 뜻을 인지하지 못하면 주께 합당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우리들의 계획이나 야망이나 뜻이 실천되는 삶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이 주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자원들과 또 원하시는 때에 실천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들이 솔직하게 옳다고 믿는 방식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거나 기도하거나 예배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을 우리들의 구상이나 계획이나 생각이나 일이나 생활이나 활동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활동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구상과 주님의 봉사와 주님의 일과 주님의 계획 속으로 내가 들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환언하면 주를 범사에 기쁘시게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 제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저는 온통 주님만 기쁘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당신이 좋아하실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많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어떤 사람을 기쁘게 해 주려고 준 선물이 오히려 그에게 실망을 가져다 준 경우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이 원하신적이 없는 것을 드리거나, 우리에게 하라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행함으로써 주님을 실망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은 주께서 드러내 보이신 그의 뜻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께 합당한 삶을 살려면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11)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의 능력을 갖는 일이야말로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온전히 기쁘게 해드리는 두 가지 필수적 요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사람들을 섬겨야 하는 우리들의 의무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만일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요일4:20).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살은 모든 선한일에서 자연히 드러납니다. 이 모든 선한 행위들을 다망라할 수 있는 목록은 작성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성도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봉사를 더욱 더 하고 싶어하는 창의적인 마음을 품게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실천적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점을 우리들에게 적시해 주었습니다. 우리들의 행위로 우리의 믿음이 증명됩니다. 우리들의 선해잉 잘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마땅히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신자들에게 당신의 행위를 보이십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의 믿음을 믿겠습니다.’ 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15-18,26 ; 비교. 요일3:17)

 

바울은 믿음의 실천적 측면들 중에서 견딤과 오래 참음이라는 두가지 덕성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들도 부족한지 그는 모든이라는 강조어를 넣고 끝에다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기를’(1:12공동번역)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견딤과 오래 참음은 기쁜 마음으로 올리는 감사와 합쳐질 때 믿음의 진실성을 여실히 증시해 줍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광의 힘이 동적이거나 예외적인 행위들이라기 보다는 피동적인 이 두가지 덕성들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다. 견딤과 오래 참음의 깊이는 시험을 받을 때에 나타납니다. 견딤은 어려움을 당할 적에 좌절되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오래참음은 보복을 하지 않고서 악을 감내할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들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인내하고 견디면서 오히려 기쁨의 감사를 올릴 수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의 능력이 고난의 삶을 통해 비취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삶에는 체념이나 무관심의 문제가 제기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고통 가운데서도 인내와 기쁨의 감사가 한데 어우러지는 성도의 삶 속에서 믿음의 승리를 목격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찬 능력이 승전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삶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성장이 인도해 주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메마른 형식적 지식이 아니고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드리 연약할 대에 받게 되는 주님의 은혜는 이러한 참된 지식에 기초한 하나님과의 교분에서 밝게 나타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