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골로새서

[골 1:13]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권자

'코이네' 2023. 5. 6. 14:58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권자 

 

골로새서1:13-17

 

 

 

골로새에 있던 거짓 선생들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거짓 선생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단지 그분을 보좌에서 끌어내리고 그분에게 최고가 아니라 그냥 탁월함을 부여했을 뿐이다. 그들의 철학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께서부터 와서 인간이 그를 통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많은 중간 영향력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바울은 여기서 반박하고 있다.

아마도 신약성경 중에서 이 구절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함축된 교리를 담고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이 서신을 썼으며 다음 네 가지 답변할 수 없는 논쟁을 폄으로써 그렇게 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릇된 길로 빠지는 것으로부터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구세주이다(1:13-14)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죄이다. 이것은 어떤 철학자나 종교적 스승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죄인에게는 구세주가 필요하다. 이 두 구절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네 가지 구원의 행위를 생생하게 묘사해 준다.

 

그분은 우리를 건져 내셨다(1:13).

󰡔건져내다󰡕는 말은 위험으로부터 구조하다란 뜻이다. 우리는 우리를 죄와 죄책에서 구원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될 위험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칼로 목이 떨어질 위기에서 건져 주셨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구원은 다른 것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즉 우리는 사단의 권세와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이다. 영지주의 거짓 선생들은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영들의 조직을 믿고 이었다. 죤 밀턴(John Millton)󰡔실락원󰡕(失樂園)에서 사단의 권세를 묘사할 때 천사들, 주관, 천사장, 보좌, 권세등의 칭호를 사용했다.

 

그분은 우리를 옳기셨다(1`:1-3)

옳기다는 말은 한 나라의 인구가 다른 나라로 이전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역사는 안티오커스 대왕이 적어도 2천 명의 유대인을 바벨로니아에서 골로새로 이전시켰음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목적없이 방황없도록 우리를 멍에에서 벗겨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를 빛의 왕국으로 들어오게 하셔서 사단의 어둠의 왕국을 이기게 하셨다. 세상의 주권자들은 패배한 백성들을 옮기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자들을 옮기신다.

그의 사랑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실 때와 변화산상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하실 때 성부 하나님께서 선언하셨던 말입니다.(3:17/17:5). 이 사실은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그 아들을 주셨을 때 치르신 대가를 기억나게 한다. 또 그분의 왕국은 빛의 왕국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왕국이라는 것도 생각나게 한다.

구약성경에서 나타나는 이스라엘 민족의 경험은 이 영적 경험에 대한 한 예화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종살이에서 그들을 구원하셔서 그들의 기업인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건지셔서 그리고 옮기신다.

 

그분은 우리를 구속하셨다.(1:14)

󰡔구속하다󰡕란 말은 몸 값을 치르고 죄인을 놓아 주다란 뜻이다. 바울은 예수께서 우리를 어둠의 왕국에서 구원헤 내시기 위해 사단에게 속전(贖錢)을 지불하셨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과 거룩한 요구에 합하게 되셨다.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깨뜨린 죄인인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를 고소해서 감옥에 가두려고 한다. 그러나 그 죄의 값은 갈보리에서 이미 다 치르어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해방된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용서하신다(1:14)

구속과 죄사함은 병행한다(1:7). 󰡔죄사함󰡕이라고 번역된 말은 떠나 보내다”, “빛을 취소하다란 뜻이다. 그리스도게서는 우리를 해방시키셔서 새 왕국으로 옮기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모든 빚을 청산하셨다. 사단도 우리를 고발하는 기소장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다.

최근 수 년 동안 교회는 죄사함의 자유를 재발견하여 왔다. 죄인을 향ㅎ나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그분의 은혜로 인한 일회적인 행위이다. 우리는 용서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으며 수고하여 용서를 얻을 수도 없었다.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앎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은혜를 누리고 그분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죄를 용서받는 것이 범죄에 대한 구실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순종을 위한 격려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용서 받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다.(3;13).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에서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항상 멍에를 메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18:21-35).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 탁월한 분이시다. 어느 누구도 우리를 구속하고, 죄를 사하며,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옮기울 수 없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은혜로 인한 것이다.

그의 보혈을 통하여란 말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치르신 대가를 기억하게 해준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구원받기 위해 어린 양의 피를 흘려야만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기 위해 당신의 보혈을 흘려셔야만 했다.

 

만유의 왕

 

바울은 먼저 하늘 왕국의 모습을 일견케 한 후에 우리들을 데리고 왕 자신의 존전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사랑의 아들 안에서 왕족의 신분과 하나님의 모든 부요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축복들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돌려 온갖 축복의 근원잇니 하늘나라의 왕 자신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흐름은 왕국에서 왕 자신에게로 진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이런 식으로 인도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적이거나 철학적으로 해석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을 통해 그를 먼저 우주의 주인으로 깨닫고 그 다음 교회의 주님으로 예배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좌를 끌어내리면서 더 나은 복음을 전한다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바울의 선언입니다. 이단 사상가들은 하나님과 인간 및 하나님과 우주 사이에 수 많은 중재자들이 있다고 가정하였습니다. 골로새의 거짓 교사들은 이렇나 이단 교리를 끌어들여 그리스도를 많은 중재자의 한 사람으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바울은 그리스도의 신분을 우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밝혀줍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1:15).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지 않는하나님이 보이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시현(示現)이며 계시입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서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상을 흐리게하고 일그러지게 하였습니다. 인간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죄가 끼여들게 하므로써 하나님의 빛이 그의 마음 속에 더 이상 반영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 불행한 날의 사건 이후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극히 작은 파편 조각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원래의 밝은 모습은 사라지고 희미한 이미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극히 부분적으로 퇴영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아담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며 하늘 아버지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하나의 복사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시고’(2:9).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고후5:19)

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도 요한도 말하기를 아무도 하나님을 본 자가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셨다고 하였습니다.(1:18). 요한은 아들이 아버지의 모습을 반영한 다는 식으로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렇게 일러 주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14:9)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기 위해서라면 구태여 예수님을 알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이외의 신들은 인간의 상상이나 감정의 부산물입니다. 그런 신들은 인간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조신이며 인간의 이상과 인간의 무력성을 반영할 뿐입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성경의 나사렛 예수님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얻을 수없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가장 위대한 인간이었고 가장 뛰어난 선지자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단순한 일개 인간이나 한 선지자의 위치로 강등시키는 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도 못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하나님은 알려질 수 없으며 어떤 신학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우주

우리들이 그리스도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이 우주도 그리스도가 없이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1:15-17)

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칭호는 오해되기 쉽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그들의 특수한 상황과 이단의 그릇된 가르침에 비추어 이 칭호의 뜻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입장은 다르기 때문에 이 말을 해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의 뜻은 그리스도가 창조의 일부분으로서 하나님이 제일 먼저 지은 피조물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생각은 이것과는 정반대입니다. 그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소위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 하나님 자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들로서 세워 두었다고 하는 피조물들의 하나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주장은 그리스도가 피조물이기는 커녕 창조주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만물보다 앞서 존재하시고 모든 만사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곧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뜻입니다. ‘먼저 나신 자란 먼저 태어났다는 뜻도 있지만(이 의미는 그시스도께 적용되지 않지만) 권위를 소유한 상속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시간적으로 첫째라는 뜻이 아니고 권위에 있어 의뜸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게신 분입니다. 이 뜻은 다음 시련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89:27).

그리스도는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그 분은 우주의 시작과 끝이며. 알파와 오메가이며, 그 근원과 목표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모두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모든 것들을 지으신 분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 인간들이 점차 발견해 나가고 있는 방대한 천계의 에너지들을 창조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오직 창조주만이 이 무한대의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의 손에서는 그런 거대한 에너지가 도무지 위험천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질서와 능력으로 움직이고 지혜로 창조된 이 우주가 모든 의미와 안정을 상실케 됩니다.

그리스도는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지으셨습니다. 특히 그가 지으신 생명은 이 우주만큼 신비하고 정교합니다. 이 생명도 우주와 동일한 모델 위에서 창조된 것입니다. , 생명도 우주처럼 질서와 힘과 지혜로 움직입니다. 이 놀라운 능력은 곧 생명의 주()되신 그리스도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들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그들의 근원이 신령하신 창조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선포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살아 움직이는 이 세계를 이해할 수없습니다. 많은 석학들이 하나님의 가설이 없이 우주의 근원을 설명해 보려고 시도해 왔지만 아직도 만족할만한 설득력 있는 이론을 제시치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설명할 때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빼어내버리면 우주는 그 뜻을 잃고 하나의 엄청난 수수께끼로 남고 맙니다.

그리스도는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물질계와 영계를 모두 지으신 분입니다. 바울은 이와 관련해서 골로새의 거짓 교사들이 매우 중시했을 비가시적인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을 첨가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을 여러 상이한 지대로 나누고 거기에다 영적 세력들의 상향식 계급 체계를 짜 넣었습니다. 이교에도 종교적인 계열 체계와 미신들이 있었습니다.(2:8-10,15). 바울이 이런 주제를 잠시 언급한 까닭은 비록 그러한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들이 정말 존재한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와는 비교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키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모든 것들 위에 계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서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환언하면 그리스도는 이 세상만 창조하신 후에 그 다음 곧 자리를 떠나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우주를 맡고 게신 주인이십니다. 비록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사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허락으로 당치 않은 세력을 붙잡고 있기는 하여도 이 세상 만사를 통제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불가사의의 악이 확실히 현재에도 활동 중이지만 오직 은혜의 신비만이 열국과 개인의 역사가 갖는 참 의미를 풀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악과 은혜의 혼합이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2:23,24) 주님은 과연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죽음은 악의 능력이 미칠 수 있는 최대의 장기(長技)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죽음은 악의 승리가 아니고 사랑의 승리를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심바가 위에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그로부터 그의 생명을 강제로 앗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10:18). 예수님의 이 은혜로운 십자가 덕분으로 국가와 개인의 역사 속에서 패배가 승리의 옷으로 갈아입고, 몰락이 부흥으로 일어서며,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고, 고난이 기쁨의 원천으로 변환되었습니다.(,45:7,8 ; 50:20 ; 8:28 ; 19:11)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끝에 서 계십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세력과 역사의 제반 사건들이 지향하는 종국적인 목적입니다. ‘만물이 그를 위해 창조되었고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이 세상의 과거나 미래 혹은 시작과 끝을 도무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이 세상이 막을 수 없는 상승적 발전을 통하여 인간의 신격화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종국적인 지향점은 인간의 신격화가 아니고, 유한한것과 무한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령한 것, 인간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세상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류를 세우시는 것이 이 세계의 지표입니다. 이 소망이 없으면 절망과 허무와 죽음뿐입니다.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우리들의 삶이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온 우주는 하나님의 원대한 종합 계획의 실현입니다. 그런데 이 우주의 근원과 촛점과 그 성취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께 무릎을 꿇을 때만이 우리는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으며 우리의 삶과 역사에 새로운 빛이 비취게 될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기쁘게 받아 들이면 인생의 긴장 요소들이 풀어지고 우리 가슴 속에 평안이 깃들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주시며, 우주의 주인이시며, 우리 영혼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십시다. 우리들의 생명이 주님의 손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 분 앞에 엎드려 경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