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고린도서

십자가와 나(1) 고전 2:1, 운명의 변화 _김명혁 목사

'코이네' 2023. 1. 31. 17:47

십자가와 나(1)

"운명의 변화"

본문:  고전2:1-2, 6:14

 

 

오늘부터 주일 아침마다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십자가를 싫어하고 십자가를 조소합니다. 십자가는 나의 실패와 죄를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고난과 희생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이해하기 힘든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십자가를 싫어했습니다. "주여 십자가의 사건이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것이 솔직한 베드로의 소원이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싫어했습니다. 십자가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대인들도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십자가가 현대인의 체면을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나의 실패와 죄를 적나라하게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이고 성경의 핵심입니다. 기독교에는 물론 중요하고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산상 설교와 같은 예수님의 고귀한 가르침도 있고, 고전 13장과 같은 고상한 사랑의 윤리도 있고, 아모스의 부르짖음 같은 철저한 사회정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은 엄격히 말해서 고귀한 가르침도 아니고, 사랑의 윤리도 아니고, 사회정의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무슨 일을 합니까?

 

첫째, 십자가는 나의 운명을 변화시킵니다.

한편 강도는 십자가를 외면했기 때문에 영원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편 강도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를 붙들었기 때문에 영원한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울의 운명도 십자가로 인해서 바뀌어졌습니다. 사울은 본래 십자가를 싫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멸시하고 십자가를 반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설교할 때 그를 돌로 처 죽인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설교하는 무식한 놈들은 처 죽여 마땅하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잡아 죽이는데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8:1).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22:4). 그러던 사울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9:4,5)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났을 때 사울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2:20).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십자가 사건으로 사울의 운명이 변화되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이 죽고 자기가 죽는 운명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독일의 부유한 귀족의 집에서 태어난 진젤돌프 백작도 십자가 때문에 그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그가 19살 청년이었을 때 백작으로서의 공직을 수행하기 위해 법률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젤돌프 백작이 어느날 미술 전시회에 들러 미술품을 관람하던 중 그의 인생이 바뀌어지는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받고 있는 성화를 바라보다가 그만 그 그림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미술품 전시관의 문을 닫아야 하는 시간이 되었는데도 진젠돌프는 그 그림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그림 앞에서 진젠돌프의 삶의 방향이 바뀌어졌습니다. 1719년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백작의 삶에서 위대한 선교 지도자의 삶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십자가는 인생의 운명과 가치를 바꾸어 놓는 천국의 열쇠가 되고 하늘의 문이 됩니다. 용서와 사랑의 마당이 되고 무대가 됩니다. 십자가를 얼마나 중요시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십자가가 삶의 중심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의의와 가치가 결정됩니다. 여러분들의 삶도 십자가 앞에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앞에 커다란 나무 십자가를 높이 매 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여러분들의 운명이 변화를 받으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의 운명과 삶이 십자가 앞에서 변화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십자가는 나의 말과 설교를 변화시킵니다.

사람은 자기에 대한 말을 하기를 좋아합니다. 자기의 지식, 자기의 경험, 자기의 성공담, 자기의 군대 생활, 자기의 가정생활, 자기의 학문, 자기의 여행담 등등 자기에 대한 말을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나의 말과 나의 설교의 내용을 바꾸어 놓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경험한 이후부터 설교할 때 많이 배운 지식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말, 유창한 웅변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적이나 체험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한 가지 만을 핵심적으로 말하고 설교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었습니다. 고전 2:1-2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1:22-23에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 바울이 소아시아 안디옥에 가서 설교한 첫 설교의 핵심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었습니다.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13:29-30). 유럽의 데살로니가에 가서 설교한 첫 설교의 핵심도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바울이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17:2-3). 사도 바울의 대표적인 저술인 로마서와 고린도서의 중심 내용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만을 설교했고 십자가만을 전파했고 십자가에 대해서만 글을 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식하다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와 같은 비난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십자가만을 말하고 십자가만을 전파했습니다. 십자가가 여러분의 말을 변화시키기를 바랍니다. 십자가가 여러분들의 설교의 내용을 바꾸어 놓기를 바랍니다. 오직 내 입술이 십자가를 말하고 내 영혼이 십자가를 노래하고 내 몸이 십자가를 증거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입술과 영혼과 몸을 지으신 목적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말과 설교를 변화시키기를 바랍니다.

 

셋째, 십자가는 나의 자랑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자기의 가문과 자기의 지식과 자기의 미모와 자기의 재능을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자기의 이름 석자를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전철역에 가 보면 도지사들의 사진과 이름들이 멋지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전에는 자기의 가문과 자기의 학문과 자기의 종교적 열심을 자랑했습니다. 나중에는 낙원에 이끌려 올라갔던 신비한 체험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체험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자기에 관한 자랑들을 모두 포기했습니다. 그와 같은 것들이 이제는 모두 똥과 같이 보인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3:8). 6:14에서 표현한 대로 사도 바울은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한 나머지 십자가를 몸에 짊어지고 다녔습니다. 손자 손녀들을 자랑하고 싶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자 손녀들을 안고 다니거나 업고 다니거나 짊어지고 다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몸에 짊어지고 다녔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고후 4:10).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무겁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기도 합니다. 아이를 업고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무겁고 고통스럽고 때로는 귀찮기도 합니다. 그러나 좋아하고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거워도 힘들어도 짊어지고 다닙니다. 바울은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6:17).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1:24). 바울이야 말로 십자가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강변교회 성도 여러분들,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귀찮아 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십자가를 좋아서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돈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붙잡혀서 누군가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쾌락일 수도 있고 죄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기질일 수도 있습니다. 우울증일 수도 있고 염세주의일 수도 있습니다. 자유를 누리고 싶지만 그것들에 얽매어서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아마 여러분들을 사로잡고 있는 가장 큰 원수는 자기 자신일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못된 기질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것들에 붙잡혀서 사는 노예 생활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운명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오직 한 가지 길만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체험하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붙잡는 길입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길입니다. 어거스틴도 한 동안은 정욕과 출세욕에 얽매여 살았고 마태와 삭개오도 한 동안은 물욕과 출세욕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세상이 죽고 자기가 죽는 운명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행복을 체험했습니다. 이와 같은 운명의 변화가 십자가를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 심판과 저주를 받으신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와 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늘 영광 떠나서 이 세상에 섬기러 오신 주님, 하늘의 별을 만드신 그 손과 발에 상처를 입으시고 죽으신 주님을 바라볼 때 그와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와 같은 변화가 바울 자신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할 때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와 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루디아의 마음 속에도, 빌립보 간수의 마음 속에도 이와 같은 운명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문둥병에 걸렸던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멀리 서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죄와 질병과 우울증과 절망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구원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십자가와 나" 나는 지금 십자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무시하고 싫어합니까? 십자가를 사랑하고 자랑합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 대신 심판과 저주를 받으신 곳입니다. 십자가는 어떠한 무서운 죄를 범한 죄인도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두 팔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도 붙잡아야만 하는 유일한 의요 유일한 공로입니다. 진젠돌프 백작처럼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린 한 편 강도처럼 그저 십자가를 바라보고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처럼 한 평생 십자가만을 말하고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십자가만을 짊어지고 다니며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