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고린도서

[고후11:21] 예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생활

'코이네' 2022. 7. 21. 21:51

 능력

고후 11:21-27

 

 

우리가 생각하는 ‘능력’은 성경이 말씀하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이 요구하는 능력은 대부분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능력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능력은 보통 자기의 자존심과 자기의 이익을 채워줄 수 있는 힘을 가리켜 ‘능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능력이라 말하지 않는다. 능력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이야기하면 ‘무엇을 이루는가’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능력이란 어떤 하나의 목적을 성취하는 방법을 말한다. 그러나 어떤 목적과 무엇을 위하여 그 힘이 필요한가에 따라 이 둘은 달라진다. 그 목적과 그 이루려는 것에 따라서 힘도 다르게 나타난다.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의 생애가 진술되고 있다.

 

“우리가 약한 것 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 났노라(고후 11:21-33)”

 

우리는 왜 사도 바울이 이런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능력]은 ‘목적을 이루어내는 것’을 말한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이쪽 부분은 그에게 있어서 능력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주를 위해 온갖 고난을 다 당한 것, 이것을 바울은 능력이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이 매맞고 돌에 맞고, 파선당하고, 경멸당하고, 오해를 당하고, 사회에서 매장 당하는 일을 무엇이 감수케 하였느냐 하면 ‘복음’이 감수케 한 것이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자였기 때문에 그것을 감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 났노라(고후 11:30-33)”

 

바울은 생명의 위협을 받고 광주리를 타고 탈출해야 하는 어려움을 만나기도 한다. 바울은 자기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자기가 ‘어떻게 짓밟혀도 좋았다’는 것을 이 장면에서 밝히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이냐를 놓치면 능력이 쓸데없는 데서 요구되고, 그리고 사실상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주어진 능력을 소유치 못한 병’이 생기게 되어 있다는 것이 성경의 기록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나의 여러 약한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 12:7-9)”

 

여기에 능력이라는 단어가 두번이나 나온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약한 데서 증명이 된다고 한다. 신자들이 갖는 최고의 미련한 생각은 내가 하나님을 업고 뛰겠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생각에 예수님은 지상 생애를 능력자로 사셨는가, 연약한 자로 사셨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능력자로만 이해한다. 오병이어의 기적, 바다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능력을 가지시고 이 세상을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한번도 능력으로 사신 적이 없다. 하나님 나라의 증명을 위해 기적을 도입한 적은 있어도 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기적을 도입한 예는 없다. 그 대표적 사건이 십자가 죽음이다. 십자가 죽음만큼 가장 큰 실패와 경멸과 좌절의 자리는 없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들의 손에 체포당하였고 묶여서 채찍을 맞고 홍포를 입고 가시관을 쓰고 매어 달리셨다. 그가 졌던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이 대신 져야할만큼 기력이 쇠진 했다. 그가 달린 십자가 밑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조롱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와 보라.”

 

이렇듯 예수님이 능력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보이는 장면은 하나도 없다. 끝까지 그가 하신 일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일들에 순종하는 일 외에 없으셨다. 그러나 그는 최후에 “다 이루었다” 선언하셨다. 목적을 다 이루는 것이 능력이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고’라고 하신다.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 우리의 질고를 담당하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의 생애 어디에도 자기를 증명하고 자기의 고통을 덜어내고 자기의 자존심을 위해 싸운 적이 없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 16)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만큼 짓밟히는 것이 없다. 내가 괄시를 당하기 이전에 ‘복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무시를 하지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한다. 능력은 자존심과는 무관하다. 그 ‘목적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다. 성경이 이것만큼 철저하게 예외없이 이루어내는 약속도 없다. 그 인생을 우리가 걷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주님이 이렇게 사셨다. 우리가 이렇게 또한 살아야 한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땅에 떨어져 죽고 썩어지는 밀알로 살라고 주님께서 요구하신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8-10)”

 

“나를 보라. 나를 보내신 자가 있다는 것을 모르겠느냐? 내가 하는 일을 보라. 내가 하는 말을 보라. 나를 보낸 이가 하라고 한 말을 하는 줄을, 그 삶을 사는 줄 모르느냐.”

 

주님은 말씀하신다. 십자가를 보면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1-12)”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살도록 요구받고 있다. 우리가 그 안에 있으면 주님과 같이 살면, 주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할 수 있다. 그보다 더 큰 일도 한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함이니라.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 목숨을 대속물로 주노라”

나의 삶을 통하여 내 이웃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결과가 맺혀지는 삶으로로서 부름받았기에 우리의 삶을 능력있는 삶이라고 한다. 밟으면 밟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고후 6:3-7)”

 

이런 가장 선한 것들을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서 행한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고후 6:7-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6:9)”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고후6:10)”

 

우리의 삶은 자체로서 승리가 아니다. 이것은 승리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승리이다. 승리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인생이 주어져 있지, 인생 자체가 승리로 주어져 있지 않다. 우리를 가난한 자로 쓰셔서 이 영혼을 구원하는 이 승리를 이루어 내는 일에 우리 인생을 쓰시겠다고 부르신 것이다.

 

우리의 능력이 무엇인가? 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혼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일을 위하여 오늘 나로 걷게 하시는 生을 그 목적에 부합되는 방법으로서 산다는 자세이다. 여기에 우리의 능력이 있다. 우리의 삶이 능력있다는 것은 결국 나를 증명하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된다. 우리의 삶이 이 방향과 이 안목을 갖기 시작할 때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를 좌절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 불안한 날도 없고, 불행한 날도 없고, 고통스러운 날도 없다. 살면 살아서 할일이 있고 죽으면 죽어서 갈 곳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초대받은 인생임을 깨달아 버릴 것은 버리고 사명에 힘을 다할 것을 결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