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23:37] 예루살렘을 향한 탄식

'코이네' 2022. 10. 22. 11:37

 

예루살렘을 향한 탄식

 

마태복음 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마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예루살렘의 역할

 

예루살렘은 유대나라의 수도요 종교의 본거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의인화시켜서 예루살렘이 선지자를 죽이고 파송된 자를 돌로 쳤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 정치뿐만 아니라 교회 일을 담당하는 산해드린 공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곳은 선지자와 성도들을 박해하는 지휘 본부였습니다. 산해드린은 율법 해석에 관계된 제반 사항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리는 막강한 권세가 있었는데 형사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사형시킬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로마 총독부 관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과 반대 세력에 대해서는 군중으로 소동을 일으키게 하여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죽였으며 스데반을 살해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맨 처음 시작이 되었지만 가장 강력하게 박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대제사장은 예수 믿는 성도들을 잡아올 수 있는 공문을 발송했으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들에게 잡혀 와 핍박을 당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무당들이 처단되어야 하는 율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역행한 예루살렘의 역할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그리스도의 애정과 탄식

 

상대에 대한 애정이 깊을 수록 슬픔의 심도도 깊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그리스도의 탄식은 차라리 오열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다윗의 왕위를 찬탈하려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 다윗은 ‘내 아들 압살롬아, 내아들 압살롬아’ 하면서 목메어 울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멸망을 목전에 둔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께서 암탉이 구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그 자녀를 모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지만 그들은 거부했습니다.

이제 임박한 예루살렘의 파멸에 그리스도께서는 오열하는 탄식을 하십니다. 그것은 사랑의 탄식입니다. 그들의 멸망을 즐거워하신 것이 아니라 슬퍼하고 아파하는 탄식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배척함

 

(마23:37)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리스도의 은혜

 

마치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는 범죄한 후 그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기보다는 은폐하고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 죄악은 감추고 나의 의를 드러낼까 궁리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너무나 추악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귀와 생명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는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리스도 자신의 존재 의미가 없다는 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암탉이 병아리를 그의 날개 아래 모음 같이 자녀들을 모으려 하셨습니다. 그것도 여러 차례 걸쳐서 시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백성들이 그에게 나오지 않으면 멸망하는 것을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가셔서 말씀도 전파하시고 많은 기적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성령께서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모으려고 부르십니다. 그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가장 큰 길이요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완고하고 고의적인 배척

 

그러나 예루살렘은 주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주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고집에 빠져 있거나 세상의 멸망과 함께 파괴되고 사라질 것들에 연연에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희생과 노력 없이 성공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은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 후 전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보화를 위해 전 재산을 희생했습니다.

천국을 위해서는 포기와 희생을 감내 해야 함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가 세상에만 치우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난 생명은 없습니다. 나뭇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살 수 있듯이 우리 영혼은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어야 살 수가 있습니다.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가 되리라

 

(마23: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마23: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너희 집이 버린바 되리라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신이 처음 몇 번 관심을 가질 때 반응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관심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아예 관심밖에 두는 것입니다.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성은 영광이 있던 곳입니다. 그러나 부패하고 타락했습니다. 성전은 시장터와 강도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회복시키려고 기적도 보이시며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반응이었습니다. 오히려 배척하고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리스도께서도 그곳을 떠나시고 그 곳 주민들을 버리셨습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떠났습니다. 외모는 그대로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버림받는 곳이 되었습니다.

 

너희 집이 황폐하여지리라

 

사람들이 모두 떠난 빈 집은 결국 폐허로 오래지 않아 무너집니다. 주인이 버린 집은 음산하며 곧 무너집니다. 성전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떠난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성전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이 임재하실 때 생기와 참 기쁨, 참 사랑이 있습니다. 인간도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시지 않는 인간은 폐허와 같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성전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과 함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져 내렸습니다.

 

예루살렘 회복의 약속

 

지금의 예루살렘은 그리스도를 완강히 거부함으로 버림받고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가 다시 오실 때 그 때는 예루살렘이 영접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그들의 말씀에 대한 고집과 편경으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지만 주님은 그들이 다시 주님께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