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23:23]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것

'코이네' 2022. 10. 8. 15:00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것

성 경: 23:23-24

 

 

우리 장로교회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앙요리문답의 첫 문제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모범 정답은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는 것입니다(고전 10:31, 11:36, 73:24-26, 17:22).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독교인들인 우리들이 만약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인생의 최고 목적이라니 그것이 당신의 생에서 무엇이며 이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무슨 실천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오늘의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대답과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봅니다.

 

오늘의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하여 주는 첫째 대답은 교회를 기쁘게 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신학적으로는 어떻게 말하던지 간에 적어도 그 강단의 선포나 가르침 또는 행동을 보면 그리스도보다도 제도로서의 교회, 건물로서의 교회 그 자체를 선전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이외에 교회란 제도나 조직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면 아마도 우리는 무교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교회의 무용론을 주장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게 되는 근거로는 예루살렘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웅장하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을자랑하는 제자에게 이 따위 성전은 허물어지리라고 말씀했는데 이것을 통해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인들은 성전을 거의 숭배의 대상으로 우상화하였는데 가히 성전지상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성전을 절대시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하느님이 사시는 이 지상적 집으로 여기고 그 성전을 영광스럽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런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단호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더라도 교회를 기쁘게 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기쁘게 하는 길은 종교적 의식의 거행과 율법과 교리를 알고 믿는 것이라고 현실교회는 대답할 것입니다. 예배의식을 아름답고 장엄하게 거행하고 율법과 교리를 바로 알고 철저히 지키는 것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종교의식을 관장한 제사장들과 교리를 관장한 사두개파사람들, 율법을 관심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과 평화하지 못했습니다. 이들 모두와 충돌을 하곤 하였고 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율법을 일점일획이라도 틀리지 않고 어김없이 철저히 끝까지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들이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예수님이 이들에게 매우 혹독한 비판을 하신 이유가 이들이 율법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관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는 율법을 지키면서"라고 지적하셨는데 이것은 율법 중 가장 사소한 규정까지 지키는 것을 예수님이 인정한 것입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란 음식을 요리할 때 쓰는 향료 같은 것인데, 이것 까지도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릇 땅이 내는 소출 가운데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라도 하느님께 십일조를 바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 같은 위선자들아,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혹독하게 비판을 합니다. 간단히 말하여 율법으로 사람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비판하신 것입니다. 예배의식이나 종교적 교리나 안식일 제도 또한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위한 본래적 목적이 변질되어 사람들을 억압하는 데 사용되었을 때, 예수님은 이런 것들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그런 것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율법이나 종교적 교리는 물론 종교적 의식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 미가서 본문말씀 바로 앞에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란 전도 또는 복음화라고 교회가 가르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 특히 한국교회는 복음화를 가장 앞세우는 교회로 특징지워지고 있고 한국교회가 여기에 가장 성공한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 민족복음화 슬로건이 유행하고 교회성장세미나 같은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를 우리는 냉정히 물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복음화란 이름으로 우리 사회에서 빈축을 사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욕먹이게 하는 매우 공격적이고 저돌적인 전도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지금도 서울역이나 고속뻐스터미날 같은데에 가면 여러가지 모양으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전도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연 그러한 방법으로 전도하고 복음화를 하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를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전도 문제와 관련한 한 매우 충격적인 실화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는 한 불교 스님과 국민학교 어린이 사이에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로 들리지만 이 이야기가 실화라고 말하는 사람이 불교 스님인데 그를 의심할 필요가 없으므로 실제로 있었던 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해 준 분은 경남 양산에 있는 유명한 절인 통도사에서 상임포교사로 있는 희암 스님이란 분입니다. 이 스님이 산 아래 동네로 내려가고 올 때 마다 그 동네의 어구에 있는 한 움막 앞을 늘 지나다니었는데 그 움막에 매우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집은 연세가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분과 국민학교 5학년의 여자 어린아이, 이렇게 단 세식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어린 여자아이도 물론 알고 있었습니다. 두노인은 남의 집의 일이나 거들어주며 사는 빈민 중의 빈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 지독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을 때에 산 위의 절에 매우 특이한 방문자가 있었습니다. 그 방문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산 아래 동네입구의 움막에 살고 있는 가난한 집의 여자 어린아이였습니다. 추위에 꽁꽁 얼어붙은 이 어린 아이를 따뜻한 방으로 안내하여 이불 밑에 손을 넣게 하고는 난로 위에 끓는 물로 따뜻한 차를 마련하고 먹을 것을 내놓으며 먹으라고 했습니다. 매우 춥고 배고프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뜻밖에 그것을 먹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지금 금식중이고 오늘이 사흘째인데 먹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남루한 차림의 이 불쌍한 가난한 어린 여자 아이는 그 얼굴에 불안과 수심의 빛이 가득차 있는 것이 역역히 나타나 있어서 이 스님이 금방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이 가난한 집안에 먹을 것도 변변히 없어 밥도 굶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자 왜 세상에 가난하고 불상한 이런 어린 아이가 있느냐고 생각하면서 이 스님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이 어린아이가 살고 있는 집이란 말이 집이지 사실은 움막이었고 날씨가 추운 겨울이니 얼마나 추울 것이며 가난하니 먹을 것이라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한 없이 처량하게 생각 되었습니다. 언제인가 이 집의 노인부부가 세상을 떠나면 이 여자 아이는 고아가 될터인데 그렇게 되면 누가 그를 돌봐야 할 것인가고 생각해 볼 때 더욱 가련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집에 무슨 일이 있나 물어 보았지만 특별한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가난한 집이니까 어디 말 못 할 사정으로 돈이 필요하여 그런가 보다'라고 상평 하게 되자 이 스님은 돈을 십만원을 가지고 나와서 그 어린이에게 주며 집에 필요할테니 할아버지께 드려 쓰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뜻하지 않은 그 거액의 돈을 보고 확실히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잠시 후에 그는 그 돈을 스님 앞으로 밀어놓으며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뜻밖에도 이 어린 아이가 돈을 거절하자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머뭇거리며 말을 잘 못하고 있던 이 어린아이가 매우 놀라운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저씨, 저는 음식 때문이나 돈때문에 오늘 찾아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아저씨를 찾아오기 위해 이틀 동안 하느님께 금식기도를 했어요. 아저씨! 아저씨는 이렇게 좋은 분인데 왜 마귀하고 사세요....저는 하느님한데 기도했어요. 꼭 아저씨를 구원해 드려야겠다구요. 아저씨가 우리 집 앞을 지나가실 때마다 아저씨를 생각했어요. 아저씨는 마귀하고 살고 있어서 지옥에 갈 거라고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팠서요. 우리교회 목사님도, 주일학교 선생님도 말씀하셨는데 우상을 섬기면 지옥에 간다고 했어요. 저는 그래서 아저씨가 이 우상들이 많은 절간을 나와서 교회에 가시면 구원받고 천당에 갈 수 있다고 믿어요. 그러니 아저씨, 저와 교회에 가요. ? 회개하면 하느님이 용서해 주실 거예요. 저는 하느님께 약속했어요. 아저씨를 꼭 구원해 드리겠다구요. 저는 죽어도 좋아요....아저씨, 만약 저하구 같이 교회 안 가시면...저는 다시 금식할 거예요...아저씨한데 오려구 이틀을 금식했어요. 같이 가시는 거죠?" 이러한 뜻하지 않은 엄청난 말을 듣게 된 이 스님이 어떻게 생각했고 반응했을까요? 이 스님은 그 때의 느낌을 말하기를 "내가 느낀 것은 분노가 아니라 서글픔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스님이이 어린 아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합니다: "고맙다. 너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아저씨는 지금 교회에 갈 수가 없단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싶구나...그리고 넌 참 용감하고...나를 위해 금식기도를 했다니 너무 고맙다...약속 하마. 지금부터 성경책을 사가지고 열심히 읽을게..됐지?" 이 스님이 이렇게 말했을 때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어 불쌍하다고 생각되었던 이 어린아이가 어떤 표정을 보였는가 하는 것을 이 스님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그 때 그 아이의 입가를 스치고 흐르는 승리의 미소를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희암스님은 이 사건으로 그 어린이와 약속한 대로 성경과 신학책들을 사서 읽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에 대한 매우 악의에 가득찬 반기독교적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것이 작년에 출판되어 화제를 모은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책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 향린교우들에게는 다소 익숙하지 않는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실제로 우리한국교회의 대부분이 이러한 복음화의 열성을 목사들이 권장하고 또 순진한 교인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이이야기에서 무엇을 주목하느냐 하면 이 어린아이와 그 어린 아이를 가르친 목사와 주일학교 선생의 신학인데, 그것은 무엇을 해야 하느님이 기뻐하실가 하는 것,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실까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어떻게 하기를 원하고 바라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오늘 구약성서 본문과 신약성서 본문이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 그 일 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미가 6:8) 오늘 미가서 본문은 어떻게 보면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보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세가지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 인간에게서 요구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다는 것이고 그 요구가 세 가지 뿐이라는 것 등 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세 가지의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는 우선 오늘의 우리 교회가 내세우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 가지가 무엇입니까? 본문에 보면 하느님이 좋아하시고 우리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 세가지는 첫째 정의를 실천하는 일, 둘째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셋째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우선 우리 말 성서의 번역에 대하여 잠깐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로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라는 것은 달리 번역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 뜻이 분명한 말입니다. 그러나 둘째, 셋째 요구에 대하여 대부분의 다른 번역들에서는 "자비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매우 독창적이고 과감한 번역인데 이는 좋은 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이 무엇인지 나타나지 않는 점에서 좀 문제가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성서번역들이 체택하고 있는 "자비를 사랑하는 것"이란 번역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번째 요구는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대채로 "겸허하게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humbly go along with your God)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오늘 신약성서 본문인 마태복음의 말씀의 빛에서 볼 때에 더 적절하다고 봅니다. 마태복음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이 세 가지가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실은 예수님이 이 미가서의 말씀을 근거로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이 세 가지가 율법 중에서도 더 무게가 나가는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미가서 68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현실교회가 정의는 교회의 일이 아닌 것처럼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정의와 사랑은 모순되고 배치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는 것은 "첫째는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고, 셋째는 겸허하게 하느님과 함께 사는 일이다."고 합니다.

이 세가지 외에는 더이상 요란한 다른 요구가 없고, 더이상 복잡하고 어려운 신학적 설명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오로지 이 세 가지를 실천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사람아, 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이 세 가지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하고, 명료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현실교회들이 오히려 혼동을 일으키도록 온갖 율법적 요구들을 추가해서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이 세 가지 외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