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신명기

[신18:15] 저 높고 푸른 하늘

'코이네' 2021. 8. 31. 00:35

 

저 높고 푸른 하늘

 

구 절 : 신 18:15-22 고전 7:32-35 막 1:21-28

 

 

<주석>

 

제 1주제 : 신명기 18:15-20

신명기서는 단지 법조문이 아니며 오히려 율법과, 정결의식과,계약과, 축복과 저주의 혼합체임과 동시에 하나의 약속인 것이다. 그 책은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전 율법과 지혜에 대한 개론과 요약"을 서술하고 있다(Luther). 신명기는 종종유대의 요시야 왕(640-609 B.C.)에 의해 수행된 개혁 운동과 연관되고 있다(왕하 22-23). 그러나, 그 문서가 어느 정도 요시야왕의 개혁 운동의 도움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대부분은 북왕국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각각 떨어져 있던 자료의 마지막 편찬자로서의 신명기 기자는 왕조 시대의 이스라엘을향해 그의 신학을 발표하고 있다. 신명기는 7세기의 사람들에게말하고 있으면서 모세의 설교인 것으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출애굽 후 40년이 지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모압 평야에서 모세가 한 고별 설교인 것처럼 가장하여 나타나고 있다(1:1-5). 신명기 기자는 그 이전의 전승들을 편집하므로서, 먼과거의 인물인 모세를 출애굽과 점령의 시대로부터 수 세기 이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잇슈들을 토의하는 야웨의 대변자로서 삼고 있는 것이다.

신명기 18:15-20은 예언(18:9-22)의 주제적인 내용을 더 넓은문맥 속으로 이끌고 있다. 모든 형태의 점술과 마술을 금지하고있음에 따라(9-14절) 모세와 같은 예언자는 예언을 왜곡하는 자들을 판단하는 자로 나타나고 있다(15-20절).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식별을 위한 기준이 다음에 추가되어 있다(21-22절).

 

약속된 예언자(15,18절)가 모세의 방법과 능력으로서 야웨와백성 사이를 중개 할 것이다. 야웨로부터의 특별한 법령 대신에신명기 기자는 성서적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16-18절). 옛날의시내 전승은 야웨의 직접적인 현현 앞에서 죽지 않기를 바라는이스라엘 백성의 소원을 나타내고 있다(신 5:22-27). 야웨께서는중재자로서의 예언자의 역할을 수립하시므로서 이 요청을 수락하시고 계신다. 예언자로서의 직무는 꼭 미래적이며, 메시야적인약속으로서만 이해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예언자적 직위를 확립하는 것을 도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귀절은 어떻게 야웨께서 모세를 통하여 예언의 직무를 수행하였느냐? 하는 것을 설명한다. 야웨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예언의 존재를 예견하시며 또한 승인하고 계신 것이다. 그 직위의 엄중함을 야웨에 대한 예언자의 충성과 같은(20절) 백성들의 예언자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19절).

쿰란(Qumran)공동체 및 초대 기독교인들 모두는 신명기18:15-20의 미래적 경향을 예언자적 약속을 메시야적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참조: 4Q Testimonia 5-8,행 3:22-23, 7:37).

 

 

제 2주제 : 고린도 전서 8:1-13

 

"우상의 제물"의 잇슈는(1절) 우리들을 헬라 시대의 신비한 제사와 희생적 제의로 인도한다. 많은 종교적 예배들의 동물의 희생을 포함하고 있다. 고기의 어떤 부분은 제단 위에서 태워지기도 하고 그 다른 나머지 부분은 시장에 팔리기도 하고, 연회에제공되어지기도 한다. 전반적인 고린도 사람들은 이 고기를 먹는것에 있어서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가지지 않았었다. 바울은 1절과 4절에서 그들 행동의 이론적 근거를 드러내면서 각 경우에 있어 "우리가 안다."라는 절(節)을 통하여 당시 고린도에 유포되어있는 종교적인 고백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아는 바라"는 말은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는 확신을 내포하고 있으며그 이유로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다."는 말을 하게 되는것이다. 유일신론의 과격한 적용은 헬라주의적인 신들의 세계를쳐부수는 월등한 지식으로서의 의미를 낳는 것이다.

한 신(a god)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는 이러함에 문제거리로도 되지 않는 것이다.

 

바울은 신들의 존재에 대한 고린도인들의 개명(開明)한 부인을거부하고 있다(5절). 초자연적인 힘들은 실로 존재하는 것이다(바울의 사탄론으로서, 10:19-22 참조). 그러나, 창조자인 하나님과 창조물의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이런 신들은 사람에 대한 그들의 모든 능력을 잃어 버린다(6절).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힘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7절). 그러나 만약에 있어구원의 지식이 이 '더 약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인식에 있어 결함이 있고 부족한 것이 되는 것이다(2절). 그리스도 사건의 우상 타파적인 힘을 인정한다면(8절), 그새로 얻어진 지식은 법칙으로서 만들어지지 말아야 하며 사람에게 해롭게 사용되어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지식은 "거만하게 하는 것"으로(10절), 그것은 충분한 지식이 없는자들을 희생시키는 결과만 낳는 것이다. "사랑"이 바로 월등한지식과 성숙치 못한 자유를 고집하는 고린도인들에 대한 바울의수정안인 것이다(3장 참조). 사랑의 본질은 더 약한 형제를 세우고(1절)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데 있는 것이다. 아직도 희생제물에 대하여 강한 마음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다면 모두는 먹는 것을 금하여야 한다(7-13절). 왜냐하면, 어떤 한 사람의 견해가 신들에 대한 신앙에 의해 지배받는다면, 신들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그에게 죄악과 번민의 감정만 낳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곧, 어떤 사람에게는 자유로운 것일지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굴레의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바울의 윤리는 논리적 일관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한 자들을 위한 양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복음서 주제 : 마가복음 1:21-28

네 제자를 부른 후의 예수의 첫째 공적 행동은(1:16-20) 축귀(逐鬼)사건이었다. 그가 가버나움의 회당으로 들어가셨을 때에그는 그 자신이 적대적 힘에 의해 마주쳐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셨다. 마가복음 1:21-28의 축귀 장면은 힘의 투쟁인 것이다.

처음엔 예수의 교훈이 강하게 강조되어진다(21-22절, 27절 참조). 그것의 의미가 비록 또렷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서기관들과같지 않는(22절) 권세 있는 가르침으로(22절) 특징지워 지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과 위임에 의지하여 예수의 메시지는 생의 현질서에 대해 과격한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소개한 우선 순위의 새로운 구조는 그의 선포적인 왕국에 대한 메시지와 필수 불가결한 관계를 맺고 있다(1:14-15).

그가 이 땅위에 하나님의 통치를 가르침과 축귀와(또한 병고

 

 

침)의 수단을 통하여 수립하시고 계신다.

 

예수의 권위있는 말씀에 자극받은 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소리치고 있다 :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24절) 그 악한 영은아마도 예수의 선교의 능력과 목적을 인식한 것이겠다. 예수는나사렛의 사람인 동시에(24절) 하나님의 거룩한 자(24절)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악한 영 하나를 쫓아내러 왔을 뿐만 아니라,그 사탄의 세력 구조 그 자체를 진멸하려 오신 것이다. 그 악한영의 쓰라린 고백에 응답하여 예수께서는 그를 "꾸짖으시고" 계신다(25절). 그러나 "꾸짖음"과 "비난"으로 epitimao, 벌을 준다는 것은 적당치 못한 것이다. 이 동사는 축귀적 언어의 기술적인용어로, 적으로부터 힘을 못쓰게 하는 도전적인 행동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8:32-33 참조). 예수께서는 악한 영으로부터 그의권위를 빼앗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로부터 그의 힘의 근거를 탈취하고 있는 것이다(25절). 그 영의 패배는 도망가는 순간의 그남자의 경련과 큰 소리지름으로 알 수 있다(26절). 주변의 무리들은 어리둥절 하였으며 그 사건의 종말적 성격을 알아차리게 되었다(27절). 이리하여, 예수의 명성이 갈릴리 지방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28절).

 

예수의 가버나움에서의 축귀 사건은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왕국 사이의 충돌을 야기(惹起)하는 것이다. 그 사건의 근본적인내용은 두 왕국의 투쟁 바로 그것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새로운 말씀의 능력으로 삶의 인습적 질서에 도전하고 어두움의 세력을 때려 부수고 있다. 사탄의 부하인 더러운 영과의 대면에서하나님의 왕국은 이 땅 위에 실재화되고 있다. 이 힘의 투쟁의과정 속에서 예수의 모습이 그 대적의 입으로부터 드러나고 있는것이다. 그 분은 악의 영을 정복하신 성령이 충만한 아들이신 것이다.

 

설교를 위한 해석

 

한 예언자가 올 것에 대한 약속이 신명기서에서 모든 형태의마법과 점술에 대한 혹평에 뒤이어 나오며, 이 둘은 그리하여 서로 대비를 이룬다. 둘째 본문은 우상에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에대한 바울의 충고로 되어 있다.

 

그 본문은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니기는 아니다. 초월적인 악마의 힘은 존재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마가는 예수의 사역을 더러운 영에 대한 축귀 사건과 더불어 시작하고 있다. 현대의이성으로서 악한 세력의 악의 있는 존재에 관한 성서의 내용을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겠다. 마법의 이야기들은 "17세기 말까지" 마술과 미신적 행동에 대한 언급이 서양에 있어 나타날 정도로 풍부한 것이다. 18세기의 계몽주의와 19세기의 산업혁명 및20세기의 기계문명에 영향을 받은 우리들 중의 어떤 이들은 문명인의 생각의 변두리로 쫓겨나간 불가사이한 일들을 아마 최근에이르러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 하였던 것이다.

 

아디슨(Joseph Addison)의 유명한 찬송 "저 높고 푸른 하늘과"(1712)는 시편 19편에 의한 것으로, 우주의 근본적으로 합리적인성격에 대한 높은 신념의 아름다운 예인 것이다. 초대교회는, 미신은 "창조의 주"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뜻하는 신명기적 예언을 재해석하였고, 실로 이 예언자는 사라지지 않는다면,그렇게 많은 세기 동안 기독교 세계에 잔존하여 왔었던 주술과,점술과, 마법을 역사적으로 추방시키기 위하여 아디슨(Addison)위의 자연에 관한 이 신념을 가결하였다. 아디슨의 신앙, 곧 그신앙만이 오로지 그로 하여금 그렇게 쓰는 것을 가능케 한 것이다.

 

마음의 귀를 열으면 영광의 찬송들린다.

"우리를 지어 내신 이 대주재 성부 하나님"

 

그러나, 우리는 18세기의 그렇게 많은 것들을 특징지운 인간과자연에 대한 본질적으로 합리주의적인 그 자신있는 생각들을 위하여 값비싼 댓가를 지불하였다. 그 댓가는 계시가 그것의 답인질문을 하는 것을 멈춘 이신론(理神論, deism)이었으며, 그것은또한 인간과 자연 모두의 비합리적인 양상에 대해 우리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예언자가 신명기서 속에서 대신하여야만 하는 "주님에 대한 또 다른 의미의 증오와," 주술과, 점술과, 마법의 재흥(再興)의 서구문명 속에서 다소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한목사가 말한바와 같이 "모든 영이 다 성령이 아니다."라는 투의말들을 발견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놀라움의 대상으로서 왔다.

영의 구별은 가장 필요한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인 것이다.

 

예수의 더러운 영에 대한 분별과 축귀는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춘 설교를 위하여 몇몇의 지침을 제공한다. 한 면에 있어서 그것이 선하든 악하든 보이지 않는 영들의 지배를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것은 비성서적인 것이며, 그리고 18세기의 실수를 재차 범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반면, 미신에 대한 로고스가 주어진 회의(the Logos-given skepticism)를 포기하고, 또는 자연과 인간 본질의 의미를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성령에 대한 신념은 미신과,어두움과, 죽음이 기묘한 세계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한 예언자가 나타나리라는 신명기의 약속은 마침내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어 진다.

 

아들됨(filioque)에 관한 신학적 주장은 참으로 복잡하기는 하나, 실제적인 문제 중의 하나에 있어서는 그 문장 덕택으로 그리스도에 의하여 영을 식별하는 것이다.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에의하여 판정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자기 도취적인 섹트(sects)와 이상한 무리들의 분명히 향상된 성장과 영향에대해 설교자가 설교할 때에 있어 도움되는 지침이 될 수 있을 것같다. 그의 완전한 겸손은 인간의 어떤 것을 파괴하는 인간됨의문제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도 비난하는 것이다. "은혜는 결코 본질을 파괴치 않는다." 구원은 파괴가 아니라 완성이다. 그의 충만하신 신성은 우리를 자기 도움(self-help)과 자기 의적인(self-righteous) 종교적 해결책의 불완전성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한다. 이 분은 더 열심히 노력하였거나, 더 영리한 서기관이었거나 "그의 시대 전에" 통찰력을 가졌던, 어떤 영웅과 같은 분이아니었다. 이 분은 "그 자신과 세계 사이를 화해시키려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상을취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는 진정한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를 또한 파악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고린도에서 뽑은 우상에 바쳐진 음식에 대한 문제는 언뜻보면구체적인 질문인 것 같아 보일런지 모른다. 서양에 있어서는 그고린도 교회같은 수렁에 빠져 고민하는 교회가 거의 없기는 하나, 그것은 비기독교 문화에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참여 할 수 있느냐 하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언급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축제들이 기독교 정신과는 다르게 끝나지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믿음이 강한 신자가들어갈 수는 있으나, 그것 때문에 다른 교인들의 신앙에 해로울지도 모를 행사들과, 모임과, 클럽들이 있는 것이다. 사랑의 의무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한 사람의 권리나 자유보다 우선적이라는 것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한 것은, 이 증가되는 세속화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선택에 적용되는 것 같아 보인다.

 

성 프란시스(St.Francis)의 이야기 중에 하나는 그와 몇몇 친구들이 긴 시간 동안 금식하였다는 것이다. 그 때, 그 일원들 중한 명이 그 금식이 상당히 고통스러웠으며, 또한 프란시스는 그형제의 배가 밤새도록 아팠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프란시스는 그 고통이 참을 수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형제가금식을 포기치 않으려는 것을 깨닫고는, 그 자신의 약속을 깨버리고, 그 형제와 함께 음식을 먹었다. 프란시스, 그 스스로는 바울의 이 귀절의 우선 순위에 따라 그의 금식을 하고 안하는 것에자유로왔으며, 그리하여 그는 그 자신의 자유를 선택치 아니하고약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의 금식을 계속하는 것을 포기하였던 것이다.

 

자기 도취적인 극적인 행동이 우선 순위와 예수 교훈의 중요한주제를 모호하게 하지 말아야만 한다. 성서는 이상하리만큼 그교훈의 내용에 관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것은 왕국과 관련되어 있으며 성서에 상당히 의존하였고, 그리고 그는 "서기관과같지 않은 권위를 가진 자"로서 가르치셨다. 그가 메시야로서 알려지기 전에 신명기에 약속된 예언자로서 전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 의하여 알려지기를 시작하였으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던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 모두는 이스라엘을 마법과 자연 숭배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트(St.Clement)의 인상 깊은 출입구가 있다. 십자가의 팔 아래로 교회로 들어가는 양편에예배자들의 통로에 따라 한 면에는 모세와 율법을 그린 벽화가있고, 다른 면에는 인간들이 율법을 순종하는 것에의 불가능성을나타내는 위대한 예언자들의 벽화가 있다. 여기에 미술적이며 건축학적인 구약의 묘사와 신약에 대한 그것의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신명기의 교훈과 마가 사이의 연관을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