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10:11] 평안을 빌라, 네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코이네' 2020. 11. 7. 22:58

평안을 빌라, 네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마태복음 10장 11~15절

 

 

본격적인 휴가철이 다가왔습니다. 며칠전에 발표된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올해 여름철 휴가비로 한 가구당 42만원정도가 지출될 것이라고 합니다. 저나 여러분들중에 여름 휴가비로 42만원씩 지출할만한 여유가 있는 분들은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서 이런 조사결과가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작년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여름휴가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듯 합니다.

 

어떻게 하면 여름휴가를 경제적이면서도 알차게 보낼수 있을까요? 갖가지 좋은 아이디어들이 많겠지만 이 두가지가 빠져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첫째는 피서지에서 먹을 것을 모두 해결하거나, 비싼 음식을 무조건 사먹기 보다는 며칠이 지나도 상하지 않는 음식은 미리 준비를 해가지고 가서 직접 조리를 해서 먹는다면 비용이 절감될 것입니다.

 

둘째로 잠자리는 민박이나 기타 주변의 숙박업소를 이용하기 보다는 텐트를 준비해서 간다면 상당히 경제적인 휴가를 즐길수 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하려면 아무래도 짐이 많아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승용차를 몰고 가시기 때문에 이런 부분도 크게 염려할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차가 가다가 중간에 퍼질정도가 아니라면 여행을 떠날 때 이것저것 가지고 가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훨씬 유리하고 경제적입니다.

 

그런데 우리주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른 것 같습니다. 제자들에게 여행을 준비케 하시면서 그 여행을 위해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그 여행코스가 당일코스이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거나 신발을 바꿔신을 필요가 없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떠나는 여행은 당일코스가 아닙니다. 몇날 며칠이 걸릴지는 제자들조차도 알수 없는 여행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차가 없기 때문에 많이 가지고 다니면 결국 여행자들이 불편을 겪게 될 것 같아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물론 그것도 아닙니다. 만약 여행자들이 겪게 될 불편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오늘날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처해있는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리 해석될수도 있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차가 없던 예수님 당시나 차가 넘쳐서 무엇이든지 차에 싣고 어디로든 여행을 할수 있는 오늘날이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도 역시 천국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새겨 들어야 합니다.

 

요즘 프로권투가 사향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왜 그런지 제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프로권투선수들이 과거처럼 악착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배고픈 사람들이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서 프로권투를 택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헝그리 복서'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배고픔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챔피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헝그리 복서들이 오래가지 못했던 이유가 챔피언이 되고 나면 그들이 원했던 것처럼 하루아침에 그 배고픔으로 탈출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헝그리복서들에게 존재하는 하나의 '아이러니'입니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챔피언이 되었는데 정작 배고픔을 해결하고 나니까 복싱에 대한 열정은 점점 식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챔피언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하고 한 두차례 방어를 하다가 결국은 챔피언 벨트를 넘겨준 사례가 많았습니다.

 

물론 제자들의 경우,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중에는 부유했던 사람이 여러명 있었습니다. 지금 이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마태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제자가 되기 전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이 당시 세리는 남부럽지 않을 만큼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적어도 마태와 같은 사람은 예수의 제자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굳이 그들을 내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그들이 물질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아니 필요이상의 물질을 소유하기 시작한다면 원래 그들이 감당해야 할 '천국복음 전파사역'에 차질이 빚어질 것은 너무도 명백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배고픔 때문에 제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많은 물질을 소유하기 시작한다면 그 결과는 헝그리 복서와 별로 다를바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첫째는 목회자인 제 자신에게 적용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가 물질에 많은 관심을 갖거나 소유욕이 강해지면 십중팔구는 천국을 전파하는데 소명감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설령 천국을 전한다할지라도 그것은 소명감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욕 때문에 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하듯 주의 말씀은 우리모두를 향한 말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목회자 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하게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이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척 어려운 질문인 것 같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질문은 어려운 질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사는 이유는 '천국을 전파하는 사명' 때문입니다. 이 사명이 없다면 주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를 이땅에 두지 않으시고 그 즉시 우리를 불러 가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여전히 이땅에 남겨두신 이유는 바로 '천국을 전파해야 할 사명'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목회자에게만 국한 된 사명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런데 물질을 추구하다보면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망각해버릴수도 있고, 내 안에서 그 사명이 소멸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 1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무슨 말씀입니까?

노숙자들이 많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지난해엔 교회에 찾아와서 자신이 노숙자임을 밝히고 도와줄 것을 요청한 분들이 꽤 많았습니다. 그런데 올해에는 그런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노숙자들이 찾아왔을 때, 저는 그분들에게 "잠은 어디서 자느냐?"고 물어봅니다. 대부분 공원벤취나 아니면 지하철 역 혹은 철도역 대합실을 이용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날씨가 더운 여름에 공원벤취에서 자면 오히려 운치도 있고 시원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날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잠을 자다가 비라도 오면 마땅히 피할 곳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나마 겨울에는 추위 때문에 공원벤취에서 잠을 잘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하철 역이나 철도역 대합실을 이용합니다. 먹을 것은 교회나 기타 봉사단체에서 제공하는 무료급식을 찾아다니면서 해결할 수 있지만 잠자리만큼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말에 의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속 편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설령 누군가가 잠자리를 제공해준다해도 언제나 자신들이 감시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혹 물건이라도 하나 없어지는 날이면 영락없이 도둑으로 몰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잠자리보다는 차라리 하늘을 지붕삼아 잠을 청하는 것이 훨씬 속편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팔레스틴 지역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늘을 지붕삼아 별을 보면서 잠을 청할수 있는 그런 운치있는 곳이 아닙니다.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심합니다. 바람이 몹씨 불면 어제까지 있었던 모래산이 하루아침에 없어져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밖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아무집에나 마구 들어가서 잠을 잘수 있게 해달라고 청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루밤 정도면 그렇게 해서 잘수 있겠지만 지금 제자들은 여러날을 그곳에 머물면서 잠을 자야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합당한자를 찾아내어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합당한자'란 '헌신된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볼수 있습니다. "아무리 헌신된 사람이지만 한집에 너무 많은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차라리 돌아가면서 하루씩 머물면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텐데 왜 주님은 합당한 사람을 찾아서 그집에서만 머물라고 하신 것일까?하는 의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석이 크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여러집을 돌아다니면 그만큼 시간적으로 낭비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한 집에 머물게 했다는 해석이 있고, 또 다른 해석은 제자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할 사람이 부유한 사람일지 가난한 사람일지 알수 없기 때문이라는 해석입니다. 다시말씀드려서 가정이 넉넉해서 제자들을 며칠씩 접대하고 잠자리를 제공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집이면 상관이 없겠지만 헌신된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했는데 그 가정이 그리 넉넉한 집이 아닌 경우 하루만 묵고 나와버리면 잠자리를 제공한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줄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방을 가면 정성껏 음식을 준비합니다. 어떤집은 부유하기 때문에 난생 처음 구경하는 음식이 차려져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유롭지 못한 집에는 그저 늘 먹는 된장에다 몇가지 밑반찬 정도 차려져 나옵니다. 이런 경우 제가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옳습니까? 물론 두 가정에서 차려진 음식을 똑같이 맛있게 먹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여유롭지 못한 가정에서 차려내 온 음식을 더 맛있게 먹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부유한 집에 가서는 차려논 음식은 맛있게 먹고, 어려운 가정에서 차려 놓은 음식은 먹다가 말면 아마 그 마음에 몹씨 서운한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중에서 합당한 자를 찾아내고, 그곳에서 떠날때까지는 좀 불편하더라도, 아니면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갈때는 그냥 들어가지 말고 '평안을 빌라'고 했습니다. 12절에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요즘 저는 다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면 테니스장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저께는 처음으로 게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게임할 수준이 되어서 게임을 한 것이 아니라 옆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던 분들이 먼저 제의를 해오셨기 때문입니다. 좀 주춤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함께 테니스를 치는 형제의 도움을 받아서 시합을 하면 웬지 잘 할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거절하지 않고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저 때문에 졌습니다. 이제 겨우 공을 넘기는 정도의 수준인데 건방지게도 서브를 멋지게 한번 넣어보겠다고 폼을 잡았으니 이길 리가 있겠습니까? 계속 실수만 범하다가 지고 말았습니다. 아니 실수가 아니라 그게 제 실력이었습니다.

 

그런데 게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 형제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게임을 시작하려고 코드에 들어서면 상대방에게 정중하게 인사부터 해야 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냥 시합을 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시합전에 지켜야 할 에티켓이 있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시합전에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은 참 좋은 에티켓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테니스에 대해 아는바가 없으니 인사도 하지 않고 용감하게 코드에서 폼잡아가면서 쳤습니다. 물론 제가 치는 실력을 보면서 그분들은 인사하지 않고 시작한 저를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보니 제가 이 에티켓을 미리 알았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시합에 임하는 제 마음가짐이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코트에 들어서면서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것처럼 남의 집에 들어갈때 그냥 들어가는 것보다는 '평안을 빌어주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뮬론 이 당시 남의 집을 방문할 때 '평안'을 비는 것은 일종의 관례와도 같았습니다. 상투적인 문안인사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이란 상식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한번도 상식을 벗어나거나 무례하게 행동하신 일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는 그 순간에도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여자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용납할수 없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어떻게 자기 어머니에게 '여자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 말은 무례한 말이 아니라 유대인이 어머니를 향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극존칭의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그 누구에게도 무례하게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도 그렇고,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특히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사이에 무례함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평안'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평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평안'을 소유하고 사는 가정은 그리많지 않습니다. 왜그런지 아십니까? 평안을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어느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평안은 세상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코소보사태가 형식상으로는 종결되었습니다. 유고와 나토사이에 중재안이 마련되고 평화협정이 체결될 전망입니다. 피난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전쟁은 멈추었고 자연은 평화로운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남북이 분단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남한에 사는 우리들은 평화롭습니다. 전쟁에 대한 일말의 불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평화롭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엔 중동지역에 전쟁의 위험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우리를 보는 세계의 눈은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전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인터넷에서 조사한바에 의하면 지구에서 가장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고 위험한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라고 대답했습니다. 평화로운 것 같지만 우리가 사는 이땅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참된평화는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가 참된 평화입니다. 그런데 그 평안에 대해 13절과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무슨 말입니까?

 

평안을 전했더니 어떤사람은 그 평안을 받아들이는데, 또 어떤사람은 그 평안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했는데 어떤사람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 어떤 사람은 그 복음을 거절하더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평안을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평안을 거절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을 위해 빌었던 평안은 고스란히 우리들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뿐만아니라 복음을 거절하는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계하지 말고 '그 집에서 나와서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라고 합니다.

 

참 무서운 말입니다. 웬만하면 한번 더 설득을 해보라든지 사랑으로 감싸주라고 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은데 주님은 '발의 먼지조차도 떨어버리라'고 아주 강하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을 이제 더 이상 만나지도 말고, 같이 어울리지도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는 말은 원래 유대들이 주로 이방인들을 무시할 때 사용했던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들을 생각할 때, 그들의 발에 있는 먼지까지도 불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방지역을 여행하고 돌아오게 되면 그발의 먼지를 떨어 버림으로서 이방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떨어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잘못된 선민의식에서 나온 생각이며 행동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이 있다면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무시하고 저주할 때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입니까? 만약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유대인이라할지라도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전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방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하시는 말씀임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에 따라 제자들이 찾아가야 할 곳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으로만 따진다면 유대인도 이방인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모르기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해 이방인보다는 먼저 들은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결국 복음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주위에도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남들보다 먼저 듣고, 먼저 접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는 아내나 남편 때문에, 아니면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복음을 먼저 들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당신 나가는 것은 막지 않을테니 나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당신보다 내가 성경을 더 많이 아니까 나를 설득시키려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교회 보내면서 자신은 나오지 않습니다. 부모 때문에 어릴적부터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한번도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일도 없고, 그분이 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이런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임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어떤 것입니까? 15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니라"고 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심판의 표본입니다. 불과 유황불이 떨어져서 멸망당한 도시가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소돔과 고모라를 외쳐도 많은 사람들이 실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 심판을 내 눈으로 본것도 아니고, 경험한일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씨랜드 사건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우리모두 가졌습니다. 그것은 내가 경험한 일은 아니지만 그 참상이 얼마나 끔찍했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보다 더 크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땅에 거했던 사람중에 롯과 그의 두딸만 심판을 피할수 있었고, 그외에 사람들과 그 땅은 모두 불과 유황불에 의해 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한자들에 대한 심판이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욱 클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천국복음을 그들을 통해 전파하셨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는 평안을 얻게 될 것이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기를 주저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직도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일이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 시간에 주님앞에 나아갑시다. 주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되심과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고백하고 주를 만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