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민수기

[민12:1]나를 더 온유하게 하소서

'코이네' 2020. 10. 8. 21:32

나를 더 온유하게 하소서

(민 12:1-16)


우리는 모세라는 인물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출생과 성장,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민족의 지도자가 되기까지, 더 나아가서는 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눈에 바라보이는 지점에서 죽었던 마지막도 알고 있으며, 심지어 그가 죽었을 때 공중권세 잡은 마귀와 하늘의 천사들이 영혼을 차지하기 위하여 쟁탈전이 벌어졌던 사실도 유다서의 기록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 매우 준수한 아이였습니다.
그리고 동족을 매우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젊을 때 자기동족을 학대하던 애굽인을 돌로 쳐죽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까닭에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망명을 해야 했으며 광야의 40년 생활을 장인  이드로와 함께 양을 치며 보내야 했습니다. 그는 특별히 돋보이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민족의 지도자로 삼으셨으며 그를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게 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어느 날 그는 호렙산 불타는 가시덤불 숲속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후 그는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였고 그의 정하신 섭리를 따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앞길은 대접을 받는 영웅적인 길도 아니었으며 명성을 얻거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선택의 길을 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기 수중에 있는 지팡이 하나만을 들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흠과 티도 많았으며 또 혈기를 내기도 하는가 하면 율법적으로도 허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하나님이 들어 쓰셨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했을까요?

 

1.하나님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지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사랑의 화살에 맞으면 사랑의 포로가 되어 상대방의 허물과 단점을 보지 않고 장점만 보아서 그와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원했으며 역시 하나님께서는 외적으로 나타난 그의 허물을 보시지 않고 사랑의 눈에 비춰진 모세가 마음에 들어 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포로가 된 이 모습이 우리를 은혜 가운데로 나아가게 하며, 이 힘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타나는 능력의 한 부분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사랑의 포로가 된 모세를 사용하셨습니다.


모세의 온유한 성품이 마음에 들어 그를 능력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실망도 안겨준 인물이지만 실망을 극복하려는 열심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들어 썼으며, 바울은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을 냈기 때문이며, 예레미야는 안타까운 일을 보면 마치 자기일 인양 눈물 흘리는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을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경우는 그가 겸손했기 때문이며, 이사야는 그의 입술은 부정한 자였지만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만들어내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며,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으며, 야곱은 불타는 야망을 가졌기 때문이며, 요셉은 불의와 타협치 않는 그리고 낙심치 않는 강직함이 하나님의 마음에든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들어 쓰실 때 애굽의 학문과 무술을 보고 그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포로가 되어 전적으로 의지하고자하는 그 마음과 또 순종심과 온유한 마음으로 인하여 쓰임 받게 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2. 모세는 자신을 무시하며 항변하는 무리 앞에서도 온유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백세가 넘은 모세가 과거에 저주를 받은 함족의 혈통인 구스(에디오피아)여인을 자기 아내로 취하자 그 누이 미리암과 그의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요세프스”에 의하면 에디오피아 사람은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전하여 지기는 하는데 모세가 어떤 연유에서 구스여인을 취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함의 후예인 구스 여인을 모세가 취하였다는 사실은 민족 지도자로서,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종된 자로서 위치와 입장을 헤아려 볼 때에 도무지 용인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백세도 넘는 그 나이에 이방여인을, 그것도 저주받은 검은 여인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지도력도 어떤 지위와 신분에 국한되는 지도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지도력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하게도 본문 2절의 내용이 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하고만 이야기하였느냐 우리하고도 이야기하셨느니라"는 내용을 통해서 보면 아론과 미리암도 모세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들을 가나안으로 영도할 수 있다는 자부심과 대단한 긍지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사회제도적인 면에서 보면 모세는 비방 받을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잘못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민족 지도자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해 나가는 책임을 진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요, 백세의 나이가 된 노인으로서 구스여인을 아내를 맞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지론이었습니다.
특별히 미리암의 생애를 통하여 모세를 조명해 본다면
남동생인 모세 자신을 위해 생명 내건 모험을 걸었던 미리암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한다면 모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놓은 인물이 바로 미리암인 것입니다. 핏덩어리 모세를 역청을 칠한 갈대 상자에 넣어 애굽인의 눈길을 피해 나일강에 띄운 여인이요, 행여나 그 어린 생명이 죽을세라 끝까지  갈대 숲을 따라 살핀  여인이요, 바로의 딸에게 모세가 발견되자 재빨리 달려가 유모를 필요로 하느냐고 묻고 대답이 나오기가 무섭게 친어머니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고하고 어머니를 유모로서 데려다 줌으로 모세는 진짜 어머니의 품에서 기적같이 성장하여 애굽 궁중에서도 히브리 교육을 어머니에게서 배우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길을 터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인이 동생 모세를 나무라듯이 비방한다는 것은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판단되지만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하여 추호도 용납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세가 비록 실수와 잘못을  통해 그의 성직과 영적 권위를 비방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러한  비방을 받고도 모세는 구차한 변명을 하거나 자기 신분에 대한 권위로 자기를 합리화하거나 오히려 아론과 누나 미리암의 잘못한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어 비방하는 공격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의  온유한 성품이었던 것입니다.

 

3. 온유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온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바나>라고 하는데
그 뜻은 "마음을 굽힌다.""뜻을 굽힌다.""굴복한다,절한다,구부린다,낮아진다,마음으로 허리를 굽히다."라는 깊고 다양한 뜻을 가진 고유명사입니다. 이 말은 겸손,유순, 경건함이란 낱말들과 거의 같은 뜻을 지닌 낱말이지만 이 말이 쓰이는 상황은 독특하게 한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낱말은 성경에 불과 몇 번밖에 기록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이 온유라는 낱말이 성경에는 어떤 분들에게 씌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사실상 어느 누구에게도 이 “온유”라는 낱말이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겸손이란 낱말과 유순함이란 낱말은 그리고 경건함이란 낱말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에게 씌어지고 있지만  온유라는 낱말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씌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낱말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만 씌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경건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겸손한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없으며,
경건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하고 있지만 경건한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온유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타나고 있음을 시편이나 사무엘하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시편 18:35에서는
"주께서 또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여호와의 구원을 찬양할 때에 시편기자가 기록하고 있습니다.(사무엘하 22:36 참조)
마태복음 11:28에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는 기록의 내용입니다.
갈라디아서 5:22에 나타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성령님은 온유하신 성품을 가지고 계시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들은 온유한 성품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성품으로서는 온유한 성품이 나올 수 없으므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우리는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성품을 배워서 우리도 온유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온유라는 낱말이 성경에서 함부로 쓰이지 않고 매우 국한된 상태에서 그리고 특별한 경우에만 기록되고 있으나 모세는 이러한 온유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잘못을 저지른 모세를 비방하는 아론과 미리암을 오히려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비방을 할 수 있는데도 아론과 미리암을 향해 불평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모세의 온유한 성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온유는 강하면서도 스스로 약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놀라운 힘과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자처럼 허리를 굽히는 자세 바로 그것이 온유입니다. 그렇습니다. 겨우내 얼어붙은 굳은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그것이 온유의 아름다운 능력의 비유입니다. 손가락으로 문질러도 뭉개져 버릴 연약한 새싹이지만 그것은 힘이 있어서 굳어버린 흙덩어리를 제키고 무서운 힘으로 땅을 뚫고 올라옵니다. 
그렇다고 연한 새싹이 뭉개졌다거나 부러진  상태도 없이 연한 새싹 그대로 땅위에 나타난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지구촌에 많이 남아있는 짐승이 있다면 포악한 짐승들이 아니라 매우 온순한 짐승들입니다.
우리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약육강식의 피라미드 구조를 갖는 것이 짐승의 세계인데 실상은 약하게 판단되어진 온유한 짐승들이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 37:11)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온유한 자는 미련하게 느껴지고 바보스럽게 평가되기도 하고 무능력하게 보이기도하지만 그러나 강한 자가 차지할 것같은 땅을 그들이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축복된 기업을  이어갈 수 있는 자는 곧 온유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모세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온유한 삶을 살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무려 40년 동안이나 처가살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온유한 성품 때문에 어떤 불화나 굴복하는 일 한번없이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원래 아내가 매우 거칠고 억세어서 노년에 그가  위로 받을 수 있는 그리고 따뜻하고 정감이 넘치는 사랑으로  감싸줄 수 있는 아내를 얻고자 하여 구스 여인을 택하게 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모세는 40년간의 처가살이 중에서 정말로 온유하게 살았기 때문에 아무런 불쌍사도 없이 잘 지내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년에 얻은 아내 때문에 아론에게 비방을 당하였는데 아론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위해 40일 동안 모세가 산에 있을 때 금덩어리를 거두어 애굽우상의 상징인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며 모세를 대항하던  자입니다. 그런 일을 생각해보면 모세의 온유한 성품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용서해 줄 수 있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을 한마디도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일을 들추며 나는 형을 우상 섬기는 이해했는데도 나의 노년에 행한 이 일 하나를 이해하지 못하느냐고 대들지도 아니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진정한 온유의 소유자인 것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결론>


 성삼위 하나님 외에는 지면에 온유한 자가 없었으나 그러나 모세는 온유했습니다. 물론 지면에 온유한자가 있었다는 추측을 본문을 통해서 엿볼  수는 있으나 지면의 모든 자 중에 가장 온유한 자는 모세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온유할 수 있었던 힘은  남을 중상모략하는데 자기의  귀를 열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신의 눈과 귀와 입을 오로지 하나님에게로만 향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온유하면서도 자기의 길을 굿굿히  걸어갈 수 있는 불굴의 투지와, 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믿음의 큰 용기와, 어떤 비웃음과 조롱을 받아도 홀로 서있을 수 있는 강한 의지가 있었고  지면의 모든 자 중에서 가장 온유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고  능력의 종으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으며 비방을 받을 일을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변호하시며 비방하는 자를 물리쳐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유를 배우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온유의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