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민수기

[민11:31] 기적을 바라는 마음

'코이네' 2020. 9. 25. 14:49

 

기적을 바라는 마음

11:31-34; 12:38-42

 

 

바울 선생께서 고린도 교회엣 편지를 쓰면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는 백성이며,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는 백성이라고 했습니다.(고전1:22) 오늘 우리들의 본문 마태복음 12:38-42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표적"이란 말은 우리 성경에서 번역할 때, 개역에서는 "표적"이라 했고,공동번역에서는 "기적"이라 번역을 하고 있으며, 현대어 성경에는 "이적"혹은 "표징"(고전1:22)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출판된 표준새번역에서는 개역에서 처럼 "표적"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토록 여러가지 말로 번역된 이 표적이란 단어는 또한 여러가지의 다양한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뜻하며(16:3,24:3, 살후 3:17), (2)입증, 증거, 믿을만한 표의 뜻(12:38, 16:1), (3)담보, 보증의 뜻(2:12), (4)놀라움, (5)기적적인 현상의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표적이란 인간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논리와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거나, 납득이 되지 않는 신적이고 아주 기이한 기적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같은 기이하고 신적인 기적과 표적을 구하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성경에서 증명이 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광야 40년간을 살아오면서 수없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a)홍해가 갈라져서 육지처럼 되는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 (b)그들은 바위 틈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표적과 기적을 보았습니다. c)쓴물이 단물이 되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d)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e)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표적을 보았습니다. 이토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없이 하나님의 이적을 보고도, 또다시 하나님을 의심하고 시험하는 일을 거듭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민수기에서 "이 백성이 어느때까지 나를 멸시하며, 내가 그들 중에서 행한 모든 이적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12:11)라고 탄식하시며,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것이라"(12:22-23)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적(기적)을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심하며, 하나님을 멸시하고 시험하는 불신앙의 백성들임을 정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적을 바라는 백성들을 징벌하셨습니다.(11:33)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의 본문 마12:38-42에서 표적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기적요구하는것을 원치 않으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문제를 삼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바라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기적을 구하는 것이 어째서 책망을 받아야 하는가? 오늘 예수님의 책망 내용을 보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기적을 구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기적을 바라는 것은 악하고 음란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기적을 바라는 것이 어찌하여 악하고 음란한 것인가?" 그 이유는 여기서 말하는 "음란한"이라는 말은, 성적으로 음란하다는 뜻보다는 종교적인 배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신앙의 정조를 지키지 못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신랑신부의 관계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정절과 정도를 지켜야 할 사이 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정숙치 못하여 정조를 다른 신에게 바치는 일을 했습니다. 이때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음란한 행위를 책망하였습니다. (3:6-11, 57:3-5)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적으로 하나님을 배신한 음란한 행위의 대표적인 것이 광야 생활에서 금으로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긴 일이었습니다. 그토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주시고, 보호해주시고 살려주신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것은 종교적인 음란행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고는 도무지 살아갈수 없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하나님의 기적에 의해서 광야에서 그들이 보전되고 생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다시 기적을 달라고 요구하고, 불평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져버리는 불신앙이였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바라는 마음 "은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지 않는 불신앙이며, 또한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음란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는 이같은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없습니까? 사실 우리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기적에 의해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기적을 행해주시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을 의심하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고 불신앙의 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것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악하고 음란한 행위를 일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토록 악하고 음란한 행위라고 규정한 기적을 바라는 마음을 현대적으로 분석을 해 보면, 몇가지 현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기적을 바라는 마음은기복적 신앙을 가져오게 합니다. 기복적 신앙이란, 무당종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주술적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추구하는 것은 병이 낳는 기적을 바라고, 물질적인 횡재를 통해서 물질의 풍요를 추구하고 모든 재앙이 없어지고, 개인소원성취만을 바라는 이기주의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이기주의의 기복적인 신앙은 물질주의적 욕심과 탐욕의 불을 끄지 못하고, 오히려 물질적 욕심을 정당화시키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기적을 바라는 욕심적인 기복신앙은 주님으로부터 받아내는데만 관심이 있고, 주님을 위하여 바치고, 헌신하는데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기복신앙에 젖어 있는 우리들의 기도는 주님을 위해서,이웃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내놓을 것인가를 위해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같은 이기주의적이고 탐욕을 부리는 기복신앙은 사회성이나 역사성이 결여되어있으며, 이웃이나 사회에 대한 책임을 잊어버리고, 기적인것, 이상한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둘째로, 기적을 바라는 마음은 성공주의에 빠지게 하고,하나님을 원하는 데로 무엇이든지 갖다주는 요술쟁이나 부자 방망이로 여기게 합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입니다. 성공지상주의에 빠져있고, 성공을 절대가치로 생각하고, 생의 최고목표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성공을 달성하기 위하여 성공하고 출세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방법따위는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사고를 합니다. 여기에서 부정이 행해지고, 변칙이 자행되고, 편법이 시행되며,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규칙을 무시하게 됩니다. 여기에 한탕주의와 사행심이 유발되기도 합니다. 사행심은 요행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요행을 바라는 마음은, 땀 흘리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성공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요행을 바라는 사행심은 도박과 투기를 하여 일확천금을 얻으려고 하고, 이같은 사행심이 때돈 벌어 부자가 될려고 합니다.이같은 사행심이 이 사회를 병들게하고, 부패케 합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바라는 마음은 악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셋째로, 기적을 바라는 마음은 안일주의에 빠지게 합니다. 일상의 안일주의는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힘들고,더럽고,위험한 것은 할려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신앙입니다. 십자가와 같은 어렵고 힘들고, 위험한 (목숨을 내 놓아야 하는, 죽음이 있는)일은 결코하지 않고, 그것을 피해서 갈려고 하는 신앙입니다. 이같은 안일한 신앙은, 하나님이 해주시거나, 다른 사람 누군가 해주기를 원하고, 나는 팔짱을 끼고 있는 신앙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안일한 신앙은 하나님이나, 다른사람들로부터 보호 받기를 원하지만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이같은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쉽게 제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명상하는 사순절에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그분이 가신 길을 명상하고 이 게절에 우리는 기적을 바라는 안일한 마음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에 기적을 바라는 성공주의를 십자가에 못박고, 개인주의, 탐욕주의,이기주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해야 합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무리들에 요나의 기적밖에 보일것이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입니다. 사실 십자가와 부활사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 선생님은 유대인들은 기적을 요구하나, 나는 십자가를 자랑하며, 십자가의 능력을 선포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땅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표적이며, 이적입니다. 이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보다 더 큰이가 없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불신앙의 세대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세대른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인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고 기적만을 바란다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3.1절 기념주일로 지키면서 동시에 주님의 십자가를 명상하는 사순절 둘째주일입니다. 민족의 고난에 동참했던 선열을 생각하며, 민족고난에 동참하며 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앙의 선배들을 생각하며, 우리도 오늘날, 이 민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에 동참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