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로마서

[롬1:2]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

'코이네' 2017. 12. 13. 18:16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1:2-4, 4:14-5:10)

설교 : 이승구 목사

 

 

 

우리는 지금까지 죄악에 빠진 우리가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죄악을 더해가는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하였습니다. 이런 논의로부터 우리는 철저한 절망속에서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누구신가?"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이는 우리를 이 지독한 절망적 상황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누구시냐고 묻는 것과 같은 질문입니다. 이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작성자들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중보자와 구속자를 추구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으로 묻고 있습니다(15). 이에 대한 대답으로 "참되고 죄없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모든 피조물보다 더 강력하신 분, 즉 동시에 참되신 하나님이신 분이어야만 합니다"라는 진술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18문답에서는 "그렇다면(그와같이) 동시에 참되신 하나님이시고, 참되고 죄없으신 사람이신 중보자는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한 후에 "온전한 구속과 의를 위하여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중보자이십니다"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그 뒤에(16문답과 제17문답에서) 이것을 설명하는 방식은 과거 11세기에 영국 켄터베리의 주교였던 안(Anselm, 1033-1109)이라는 분이 이 문제를 설명하려고 했던 것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라는 그의 글속에서 이 질문을 사용해서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왜 예수 그리스도가 왜 온전하신 하나님(vere deus)이시면서 동시에 온전하신 사람(vere homo)이셔야만 하셨는지를 설명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신성을 가지고 계시면서 인성을 취하신 것을 우리의 구속의 성격과 연관해서 설명하는 이런 설명을 안적인 논의(Anselmian argument)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안적인 설명 방식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를 어떤 논리적 근거를 마련하는 논의로 보지 않고 그저 역사의 한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어진 구속자의 어떠하심을 설명하면서 그가 왜 그런 존재이실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우리 나름의 지난한 설명의 시도라고 본다면 그런대로 의미있게 생각하고 활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설명 방식을 따라서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어떤 분이시고, 왜 그러한 분이셔야만 했는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왜 우리의 중보자는 참되고 죄없는 사람이셔야만 합니까(16)

 

)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범한 그 같은 인간성이 죄에 대해서(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고, 또한 사람들은 그 누구나 그 스스로가 죄인이므로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대답은 이중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우리의 중보자가 왜 참된 사람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것이고 둘째로는 기존의 사람들 가운데서는 이런 중보자들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므로 특별히 죄없는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하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우리의 구속자는 반드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말하는 바와 같이 "죄를 범한 같은 인간성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 만족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만 하는 영예를 범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겼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범한 이 죄악에 대해서 마땅히 벌하시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그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또한 사람이 범한 죄에 대해서 다른 피조물인 천사나 동물을 벌할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영예를 마땅히 드리지 않고 그 영예에 손상을 가한 것은 동물들이 아니고 선한 천사들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범한 죄에 대해서 인간이 하나님께 드린 손상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우리네 인간과 같은 인간성(human nature)을 가진 존재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그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가진 존재만이 우리의 구속자가 되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성을 가진 분만이 우리를 구속할 수 있습니다.

 

2) 우리가 지난번에 잘 살펴 본 바와 같이 모든 인간은 다 철저하게 부패해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 공의를 만족시켜야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선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인 한 여기서 예외적인 인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인간일 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들 가운데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가 하나라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어디엔가 "죄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구속자는 그의 인성에 관한 한 참된 인성을 가지고 있되, 죄가 없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이런 무죄하고 완벽한 어떤 한 사람의 인간이 있다면 그가 과연 우리의 모든 죄 문제를 다 해결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과 함께 우리는 다음 문답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2. 우리의 구속자는 왜 동시에 참된 하나님이시기도 해야 합니까?(17)

 

) 왜냐하면 그의 신성의 능력으로 그의 인간성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시고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의와 생명을 얻고 회복시켜 주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저 한 사람의 인간이기만 하면서 무죄한 한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어떤 다른 한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고 형벌을 감당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과연 그럴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모든 형벌을 다 감당한다는 것과 관련해서도 이 형벌은 무한한 형벌이므로 상당히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아무리 무죄한 인간이라도 그가 단순히 인간인 한 그것을 다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를 다 감당한다는 일은 아주 심각한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왜 그렇게도 심각한 것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사형 선고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비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주 당당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던 소크라테스에 비해서 겟세마네에서 고뇌에 찬 기도를 올리며 십자가를 바라보던 그리스도는 너무나도 연약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어떤 죽음을 죽어야 한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한 비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비록 그가 기소당한 그 죄로는 죽을 이유가 없는 억울한 죽음을 사형으로 받는다고 해도 그는 그저 한 사람의 인간이 죽는 그런 죽음을 죽을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인간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진노를 다 짊어지고서 죽는 죽음을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하면서, 그런 형벌과 저주의 죽음은 참으로 하나님에게서 저버림을 받는 죽음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도 고뇌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그가 그저 한 사람의 인간이기만 하였다면 그는 이 무한한 진노의 부담을 견뎌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잘 깨달은 안셈이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작성자들은 그가 신성의 능력으로 그의 인간성 가운데서 이 진노를 감당하실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에게 신성이 있어야만 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신성으로 그의 인성 가운데서 우리의 죽음을 대신 죽으셔서 우리를 위한 생명을 얻어 주신 것입니다.

 

또한 그가 그저 한 사람의 무죄한 인간이었다면 그는 다른 죄 있는 한사람을 대신해서 그의 자리에서 그의 형벌을 받아 대신 죽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죽음을 많은 사람을 위해 대속의 죽음으로 여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 그들의 자리에서 대리 속죄의 죽음을 죽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이를 우리들을 위한 대리 희생의 죽음으로 바르게 해석해 주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사도들의 영감된 해석을 가지고 있기에, 그의 죽음이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10:45)이며, 그리스도는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셔서"(9:26),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로 드리시고"(10:12) 승천하셔서 온 세상을 다스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많은 사람들, 곧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런 죽음이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그리스도 한 분의 죽음이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일 수 있겠습니까? 그의 죽음이 무한한 가치의 죽음이 아닌 한 이는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의 죽음이 무한한 가치의 죽음일 수 있습니까?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인성이 신성과 함께 하시던 인성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신성이 죽으시거나 고난을 당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인성은 처음부터 신성과 함께 하는 인성이었고, 그 신성의 인격 안에서 그 인격을 가지신 인성이었기에 그런 인성이 신성과 분리되고 그의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죽음을 죽으신 것은 아주 큰 값을 지불하신 것이므로 그 인성 안에서의 죽음은 무한한 가치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뿐 아니라 전 생애를 걸친 그리스도의 수난, 교의학자들이 흔히 "그리스도의 소극적 순종"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를 위한 무한한 가치의 수난이 될 수 있는 것도 그의 인성이 항상 신성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다는 것은 주어진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므로 아무리 무죄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자신이 그 자신의 삶 가운데서 만족시켜야 할 하나님의 공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죄한 사람이라고 그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만족시켜 드릴 하나님의 공의가 있으므로 다른 이를 위하여 그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온전하심에 또한 온전한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심으로 그가 얻으신 의를 우리에게 적용하여 주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그의 전 생애를 통한 율법의 뜻과 요구를 온전히 다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것, 흔히 교의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순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성과 함께 하시는 그의 인성이 이룬 의이고 그러하기에 그는 이 적극적인 순종으로 얻은 이 무한한 가치의 의를 자기 백성의 칭의의 근거로 제시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3. 결론적인 말

 

우리는 이상에서 왜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을 한 인격에 가지셔야 했는지를 그가 이루신 구속 사역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가 이루신 구속의 성격을 생각할 때 그는 반드시 인성을 가지셔야 하고 또한 아무리 무죄하고 흠없는 인간이라도 그저 인간이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때 사용한 말에 주의를 기울여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그가 한 사람의 인간이었는데, 그는 또 하나님의 인격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는 두 인격, 즉 인간의 인격과 하나님의 인격을 가진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속자는(옛날에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이) 이렇게 두 인격을 가시진 분이 아니시고 단일한 인격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의 두 성질이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답게 용어 사용에 있어서도 세심한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신 "-"(the God-man)이신 분입니다. 그의 하나님으로서의 성질은 온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인간으로서의 성질도 온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참된 인간의 몸과 인간의 합리적인 영혼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격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이었고 그의 인성은 이 성자의 인격 안에서 그 인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단순히 사람이기만 하신 분이 아니시고, "-"(the God man)으로 우리 가운데 계셨던 것입니다. 그 밖에는 이 세상에 그런 존재는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상한 생각을 하고 그를 오해하고 나가려고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런 독특하신 존재로서 우리 가운데 계셨던 것이 과연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면서 그의 무한하신 가치의 존재에 대해 끝없는 감사를 드리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를 드려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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