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욥기

[욥11:7] 인간의 비극

'코이네' 2017. 9. 11. 22:23

인간의 비극

본 문 : 욥기11:7-12

 

 

들어가는 말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철학과 종교의 주제가 되어왔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성경에서 조차도 이러한 질문에 대한 관심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게다가 여러 가지 학문들 역시 직접 간접적으로 인간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교육학 등등 실로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측면에서 인간의 실존적 모습의 한 단편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보여 주는 인간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오늘은 욥의 친구 소발이 설명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욥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했던 소발은 피조물의 한계를,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완전함(7-9)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주권과 제재할 수 없는 능력(10)을 말하며서 인간의 연약함과 허탄함을 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한 일을 다 보고 계시며(11), 깨달음이 없는 인간은 야생의 나귀 새끼처럼 무지하고 허망하다고 말합니다. 소발의 神觀思想은 대단히 뛰어난 점 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발은 그릇된 선입견으로 욥을 죄인으로 단정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근거로 자신의 신관을 제시한 것에 불과했습 니다.

 

1.인간은 허망한 존재입니다.

 

소발이 욥을 공박하는 말 중에는 인간의 허점의 실상은 나름대로 예리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인간이란 <虛妄存在>라는 지적 입니다.(11) 문맥을 보면 소발이 욥을 지칭하여 했던 말인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은 사람은 누구나 허망한 존재라는 점의 정곡을 찌른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모든 것은 헛되다'고 탄식했던 일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것은 우선 그 생각부터가 허무하기 짝이 없 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늘상 허무한 것을 좇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누구나 한줌의 흙 밖에 남긴 것 없이 조용히 사라지고 마는 존재입니다. 인생 자체의 허망함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커다란 속임수 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예화>// 코끼리를 산채로 잡아 훈련 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궁급합 니다. 먼저 코끼리를 정글로부터 유인하여 미리 만들어 놓은 우리에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코끼리의 발목에 든든한 쇠사슬을 매어 놓고 한 끝은 튼튼하고 굵은 나무 기둥에 묶어 놓습니다. 그후 우리를 치우면 야생의 코끼리는 정글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러나 발목 에 묶인 쇠사슬 때문에 몇발작 걷다가는 저지를 당합니다. 처음에 코끼리는 쇠사슬로부터 놓여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있는 힘을 다 동원해 보지만 계속 실패를 하게 되고 결국엔 체념하며 비록 코끼리 가 끊고 도망갈 수 있을 정도의 기둥과 줄에 묶어놔도 조금만 줄이 팽팽해지면 힘쓰기를 포기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대로 줄을 잡아당겨 코끼리를 훈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체념은 소망을 포기하는 행동이며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입니다. 처음의 고통이나 고난이 비록 견디기 어려울지라도 믿음과 소망을 갖고 기다리며 노력하면 결국에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 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실존은 허망한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런 허 망에 압도되어 소망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삶인 것입니다. 신앙이란 곧 인간의 유한성과 죄성을 극복해 주는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4:4)고 말씀하셨습니다.

 

2.인간은 무지한 존재입니다.

 

소발은 인간의 무지함도 지적하였습니다.(12) 만물 가운데 체계적인 지식을 가진 존재는 인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금세기에 들어 첨단 과학을 발전시키고 있는 현실을 보면 인간의 지식은 참으로 놀랍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때는 유토피아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생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테크노피아란 말도 이런 맥락에서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그런 놀라운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면서도 구원에 이르는 참 된 지식에 있어서는 누구나 백지 상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 지식을 가지고 멸망을 자초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지식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무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머리에서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의 상반된 관계를 대조시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의 지혜를 멸하려고 하나님의 미련한 것, 곧 십자가의 도가 제시되었다고 피력하였습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쌓은 학문적 성과나 각종 도구적 지식들은 분명한 한계 아래서만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닐 뿐 인생과 삼라만상의 존재들 에 대한 궁극적 물음에는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지혜 앞에 엎드려 귀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하였습니다. ,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참된 지식을 전혀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3.인간은 완악한 존재입니다.

 

소발은 인간의 완악한 점도 정확히 지적했습니다. "그 출생이나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12) 짐승들을 길들이기란 어느 것이나 쉽지 않지만 들나귀처럼 길들이기 어려운 것도 흔치 않습니다. 사람이 재간을 다 부려 길들여 보고자 해도 그때마다 사정없이 모로 뛰면서 도망쳐대기 일쑤인 것이 들나귀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인간의 <고집불통과 완 악함>을 들어 들나귀 새끼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들나귀도 길이 들지 않는가'하고 반문하는 말로 옮겼습니다. 인간은 고집스럽고 완악하기가 들나귀보다 훨씬 더 합니다.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철벽이요 벽장 같은 존재입니다. 아무리 알아듣게 타일러도 '소 귀에 경읽기'인 것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특별한 재능이나, 업적보다는 당신의 말이면 무엇이든지 따르겠다고 하는 순종의 자세를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순종이 무엇인가를 근원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무릅쓰고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순투성이인 것이 인간입니다. 피조물 중의 최고 걸작이요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존귀가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천하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에게서 당연히 나타나는 모순점일 것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가 크셨던 만큼이나 어긋난 길로 들어선 인간의 실상은 더욱 암담하기 마련입니다. 이제 우리는 각자의 형편을 똑바로 직시하고 모순과 죄악으로 뒤덮힌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애당초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당신의 형상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