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고린도서

[고전5:1] 현세의 장막과 내세의 장막 그 차이는?

'코이네' 2017. 5. 31. 22:02

현세의 장막과 내세의 장막

본문 : 고후 5;1-10

설교 : 이동원목사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짐

 


본문 1절을 보십시오.“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이 구절에서 “장막집”은 우리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우리의 육체가 무너질 때 하늘에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집이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아다시피, 바울 사도가 이 세상에 있었을 때 가졌던 직업은 천막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보다도 이 천막에 대해서 아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천막은 보잘것 없었을 것입니다. 천막집, 즉 장막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깁고 깁고 또 깁지만, 낡아지고 낡아지다가 마침내는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천막이었습니다.

 


성지(聖地)를 방문해 보면, 1세기의 유대인들처럼 지금도 텐트를 짊어지고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거주지를 옮기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낡아빠진 천막집,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집입니다.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꿈이 있다면, 이제 이 유랑의 삶을 끝내고 견고한 돌집에서 살아 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갖고 바울의 말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개역 한글성경에는 장막집이나 영원한 집이나 똑같이 집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전혀 다른 단어가 쓰였습니다. 장막집은 문자 그대로 “텐트(tent)”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집에서의 집이라는 단어는 “빌딩(building)”이라는 의미입니다. 텐트와 빌딩의 차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낡은 장막집 같은 우리의 육체,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이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운동도 하고 보약도 먹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장막집이 낡아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장막집은 무너집니다. 또 무너져야 합니다. 이 사실을 빨리 인지할  때, 우리는 거기에 맞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무너지게 될 장막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세에 대한 확신입니다. 바울의 고백도 이 내세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입니다.“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질 때,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영원한 집이 나를 위해서 예비되어 있다는 그 사실을 나는 안다”여기에서 “안다”라는 단어는 확신에 대한 최고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확신을 표현할 때 “믿습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를 향해서 이렇게 고백한다고 해 봅시다.“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줄로 확실히 믿는다오”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믿어지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라고 말한다면, 앞의 경우보다 목소리의 톤은 낮을지 모르지만 훨씬 더 강한 확신을 표현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그 영원한 집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을”이 땅에서 나의 삶이 다할 때, 구원받은 내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하늘에 예비되어 있음을 안다는 고백입니다. 주께서 이 땅을 떠나가시기 직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약속하신 그대로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해서 그 영원한 집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확신, 그 확신 때문에  비록 내 육체가 무너져 가는 것을 보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내게 주어진 삶의 길을 달려가며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내세를 사모함

 


본문 2절을 보십시오.“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개역 한글성경에는 “오는”이라는 단어가 작은 글씨로 씌어 있습니다. 그 단어만 특별히 작은 것은, 그것이 성경 사본에 확실하게 기록된 말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저는 사본에 “오는”이라는 단어보다는 “하늘로부터 예비된”이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C.S.루이스의 『악마의 편지』라는 유명한 책에 보면, 사단이 부하들에게 자신의 전략을 설명하는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내세를 인정하게 하라. 그러나 그것을 믿고 사모하지는 못하게 하라”내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과 그 내세를 믿고 사모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내세를 참으로 사모한다면, 그 내세를 준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거룩한 삶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동기는 바로 내세를 사모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하늘에 나를 위해 예비된 영원한 집이 있으니까 이 땅의 삶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부끄럽지 않게 정직하게 살아야지”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갈등과 고뇌는, 천국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혹은 천국을 사모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읽어 보십시오. 믿음으로 살아갔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 그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며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갔던 그들의 삶의 승리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한번 신앙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딘 이후에 다시 옛 삶을 향해서 돌이키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소위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욕심꾸러기들이 많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가진 신앙의 내면에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참으로 내세를 믿고 내세를 사모한다면, 그들의 삶은 지금과는 다를 것입니다. 조금 큰 집에서 살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집이 예비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검검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내세를 사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내세가 이 세상보다 더 좋고 더 아름다운 나라이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우리의 사랑하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우리는 주님을 영접했을 때,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 혹은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육체적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6절 말씀도 그 의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열망 중의 하나는, 2,000년 전 제자들과 함께 거니시며 말씀하시며 위로하시던 그 주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당연히 그런 열망을 갖게 됩니다. 바울이 “그렇다. 아직은 주님과 따로 거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6절 말씀에 이어 8절에서는 어떻게 고백하는지 보십시오.“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거기에 가면 그분과 함께 거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원한다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갑자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어떤 부인의 집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 부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제게 아주 인상깊었습니다.“목사님, 제 남편이 세상을 떠나간 후 천국이 가깝게 느껴져요. 천국이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희미하고 추상적인 의미로 밖에 다가오지 않았었는데, 사랑하는 남편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천국이 너무 가깝게 느껴져요”

 

사랑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곳이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천국이 천국인 이유는, 내  찬송의 주제요 내 소원이요 내 믿음이요 내 사랑이신 주님이 거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세를 사모하는 열정, 그곳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열망, 그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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