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요한계시록

[계3:14]라오디게아교회, 더 고급스런 성숙을 이루자

'코이네' 2017. 2. 26. 00:55

[일곱교회 시리즈7] 라오디게아교회, 더 고급한 성숙을 이루자    

 

더 고급스런 성숙을 이루자

(요한계시록 3:14-22)

설교 : 이동원 목사

 

 

아마 대부분 자전거를 타보셨을 것입니다. 자전거의 특징은 서 있으면 넘어지고, 페달을 밟아움직이면 계속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Maxwell Maltz라는 심리학자는 “활동 면에서 사람은 자전거와 같아서 목표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진하지 않으면 곧 넘어진다”는 말을 합니다.

 

심리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는 136억 개의 뇌세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일주일에 100만 개의 아이디어를 추론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무한한 잠재적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은 136억 개의 뇌세포를2-5% 정도 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천재 아인슈타인이 15%를 활용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옛말에 내의명주(內衣明珠)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인도의 어떤 군주가 귀여운 자기 아들 옷 속에 값진 보배 구슬을 매달아 주었으나, 그 아이는 집을 뛰쳐나와 거지가 되어 유랑하면서도 그 값진 구슬이 자기 옷 안에 있는 줄을 몰라 쫄쫄 굶으며 지냈습니다. 몇 해만에 집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어째서 너는 네 옷 속에 값진 보배 구슬이 있는데도 거지 노릇을 하였느냐?”고 묻자, 그때서야 아들은 자기 옷섶에서 구슬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 내의명주가 있다는 좋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무한한 가능성을 부어주셨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음악을 너무 좋아하여 한 유명한 오페라 가수가 왔을 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초인간적인 큰 힘과 감동에 압도되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그런 능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그 성악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런 멋진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제가 사사한 교수님께서 이렇게 말해주셨습니다. 인간 속에는 ‘작은 나(little me)’와 ‘큰 나(big me)’가 있다. ‘작은 나’는 겁쟁이이고 미신적이며 약하고 욕심의 방향만을 좇아 다니는 자아인만큼, 무대 위에 올라서서 노래를 부를 때에는 ‘큰 나’가 밖으로 나오게 하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분,
당신은 작은 하나님을 믿는 자(Little - Godder)입니까, 큰 하나님을 믿는 자(Big - Godder)입니까?

이것이 곧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도전적인 메시지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지금 터키의 Pamukkale라고 하는 매우 유명한 온천 관광지입니다.
그 당시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금융도시였고, 양모산업의 본산지인 상업도시였으며, 또 안약 개발의 본부였던 의과대학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런 좋은 도시에 위치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무한한 잠재적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와는 전혀 반대되는 모든 좋은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가장 크게 화를 내시면서 책망하시고 도전을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처럼 좋은 조건의 위치에 있다면 얼마나 큰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현대인들이 가장 귀담아 들어야할 말씀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좋은 환경에 있나요?
우리는 얼마든지 지금보다 훨씬 더 고급한 신앙으로 성숙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아멘이십니까?


1. 미온적 신앙에서 열정적 신앙으로 성숙하자

 

이미 말씀드린대로 라오디게아는 부유한 도시이다보니 인근의 두 군데 도시로부터 물을 끌어다 썼습니다. 하나는 히에라볼리스로부터 온천수를 끌어왔고, 또 하나는 골로새로부터 생수를 수입해왔습니다.
그런데 약 10km 정도의 수도관을 통해 물이 흘러오다보니 그 뜨거운 온천수도 열이 다 식어 미지근하게 되었고, 또 골로새의 좋은 생수도 여름철이 되면 뜨뜻 미지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물맛이 오죽 하였겠습니까?
우리가 더운 음식이나 찬 음식은 먹을만 하지만, 미지근한 음식은 정말 죽을 맛입니다.
예를 들어 설렁탕은 뜨거워야 맛이 있는데, 미지근한 설렁탕은 먹기가 얼마나 느끼하던가요?
특히 한 여름에 미지근한 콜라나, 미지근한 사이다 맛은 정말 구역질이 날 정도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이 이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활이 편안하고 안정되다보니 신앙생활에 어떤 생동감이 없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뜨뜻 미지근하였습니다.
오늘 나의 신앙이 이렇게 변질되거나 퇴색되지는 않았는지요?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열심을 내는 것도 아니고 안내는 것도 아니고, 헌신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알송달송 신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당신의 신앙은 어떤 상태인 것 같습니까? 뜨뜻 미지근하지는 않는지요?
①무관심입니다
세상 모든 것 중 가장 싸우기 힘든 것이 무관심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떤 사물에 대하여 한 방향으로 고집을 부린다면 적어도 그를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게 움직일 가능성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진지하게 생각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면 그와는 아무것도 하기가 힘듭니다.
무관심이란 마치 아무것도 문제시하지 않는 일종의 찬 죽음입니다.
무관심이란 모든 장벽 중에 가장 깨기 힘든 오리무중의 장벽입니다.

②헌신없는 중립입니다
사실 우리 기독교 신앙에는 중립적인 태도가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방해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안믿는 것보다, 잘못 믿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Between christian!(회색 신앙)
밖에 나가면 교회가 생각나서 불편하고, 교회에 나오면 세상 생각이 나서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오늘 아침을 시점으로 다시 열심을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더 이상 미온적인 신앙에 머물지 마시고, 열정적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16절 참조).
불타는 열정의 사람이었던 바울 사도는 이렇게 권장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이제 당신도 훨씬 더 고급한 신앙으로 올라설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참 간단합니다. 열심을 품으십시오. 하나님은 열정을 품고 사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2. 일차원적 신앙에서 전인적 신앙으로 성숙하자

 

라오디게아 교회는 모든 것이 넉넉하고 풍족하다보니 물량주의적 신앙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자기들이 사는 도시가 그 당시 은행과 재정의 중심지인 금융도시이다 보니 일차원적 신앙수준에
머물러 버린 것입니다.
또 Wool의 생산지로서 양모산업이 발달하다보니 부유한 상업도시가 된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안약의 개발과 안과의학의 발전으로 학문의 요람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 땅의 부요함 때문에 하늘의 빈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자아도취에 빠져버렸습니다. 본문 17절 앞 부분을 보십시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완전히 자아도취와 자만심으로 가득찼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영성이 결여된 일차원적 신앙수준으로 전락되어버린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 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이 땅의 부자가 하늘의 빈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나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인생인지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당신의 신앙수준은 어떤 것 같습니까?
이 세상의 껍데기 성공 때문에 자아도취에 빠지거나, 영성이 전혀 결여된체 형식적 신앙생활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이처럼 간곡하게 호소하시며 부탁하십니다(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특별히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도전적으로 당부하시는 것입니다(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일차원적 신앙에서 전인적 신앙으로 성숙하라는 당부의 말씀이십니다.
그것은 곧 영성회복입니다.


여기 18절의 세 가지 단어가 중요합니다.
『불에 정련된 금과 흰 옷과 안약』입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시련으로 연단된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가질 것이요, 또 지난 날의 그 어떤 실수와 잘못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 받은 성결의 은혜를 누릴 것이며, 그리고 과거에는 눈이 멀어서 잘못된 길을 갔었더라도 이제는 말씀으로 영의 눈을 밝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승리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고급한 전인적 성숙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어떤 아픔과 고통과 과거가 있더라도 당신의 미래는 전망이 밝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여전히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14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처럼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고급한 신앙으로 성숙하게 되면, 그 다음에 따라오는 축복이 얼마나 황홀한지 이 말씀을 생각해볼수록 가슴이 설레이며 흥분됩니다. 본문 20-21절을 보십시다.

 

1)주님께서 일평생 함께하여 주십니다
이제 마지막 결론의 클라이맥스는 이런 흥분된 절정을 이룹니다.
“볼지어다!”
내가 좀 더 고급한 신앙으로 성숙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베풀어주실지 내다보라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입니다. 주님이 함께해주시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좀 더 생동감 있게 느끼려면 로마 시대의 식사 문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침 식사는 아크라티스마라고 하는데, 마른 빵 조각을 포도 쥬스에 찍어 먹고 출근합니다.
점심 식사는 아리스톤이라고 하는데, 도시락으로 도로가나 가로수 밑, 또는 공원에서 먹습니다
그런데 저녁 식사는 데이프논이라고 하는데, 한 날의 주요 식사로 오랜 시간 식구들과 함께 앉아서 이야기 꽃을 피우며 함께 먹습니다.
여기서는 세 번째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고급하게 성숙해갈수록 주님은 우리와 평생을 함께 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간증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安慰)하시나이다”(시 23:4).

 

2)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해주십니다
본문 21절은 이렇게 멋진 결론을 내립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어는 누구도 현실적 상황에 주저앉지 말고, 모두 다 그 어떤 환경에서도 이기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그 동안의 일곱 교회를 통한 일곱 번의 메시지를 통해서 단 한번도 완전한 자가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그대신 이렇게 희망찬 말씀을 하십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이런 상을 주리라. 이런 복을 주리라”
우리 모두 다 승리하는 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오늘 마지막 절정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주신다는 가슴벅찬 축복입니다.
로마 시대에 마음씨 좋은 왕은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신하를 자기 왕좌 곁에 앉혀서 그를 영예롭게 해주었던 것처럼 우리를 하늘나라의 영원한 영광의 보좌에 함께 앉혀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은 오늘 아침에 저와 여러분에게 확고한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Holman Hunt가 그린 그림의 특징이 하나 있는데, 문고리가 없습니다. 결단은 당신이 내려야 한다는 교훈적 그림입니다.
미온적 무관심과 중립적 신앙에서 출애굽하기로, 그리고 땅 중심의 일차원적 신앙에서 하늘의 부자가 되고자 하는 전인적 성숙을 추구하기로 결단을 내리세요.

당신의 신앙이 고상하게 성숙하는 만큼 주님은 더욱 능력과 은총으로 함께하여 주실줄 믿습니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