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고린도서

[고전12장] 신령한 은사에 대한 올바른 태도

'코이네' 2016. 11. 23. 19:20

고전12장  신령한 은사에 대한 올바른 태도

 

고린도전서12장부터 14장까지는 고린도 교회가 부딪쳐 있었던 또 하나의 문제를 바울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신령한 은사들의 문제 였습니다.

 

12장 1절에 보시면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신령한 것들---여기서 신령한 것들은 나중에 문맥을 보면 은사 들에 대한 얘기입니다. 신령한 은사들, 영적 은사들에 대한 문제를 바울이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은사 문제에 관해서 볼 때 항상 기독교 교회 안에는 역사적으로 언제나 두 가지의 극단적 견해가 있어 왔습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편지 속에서도 이 두 가지 극단적 견해에 대한 바울의 입장, 성경적 입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9절에 보시면 '성령을 소멸치 말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 어떤 사람들은 성령 소리만 들어도 이렇게 알러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예수 믿어도 별나게 믿는 사람, 신비적인 사람들이나 광신자들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예 성령이란 단어 그 자체를 거절하든지, 또 성령의 은혜를 향해서 마음을 닫아 버린 그런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성령소멸주의자라고 그럴까요? 혹은 메마른 이성주의자들 가운데 이런 성령에 관한 입장을 갖고 있는 교인들이 더러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9절 이하 21절에서는 또, 계속해서 말 하기를 너희가 범사에 헤아려라, 예언을 사모하고 범사에 헤아려라. 범사에 헤아릴 줄 알라는 말은 무분별한 신비주의자들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성령을 지나치게 사모한 나머지 에. 성령이 붙어있는 집회는 집회마다 다 쫓아 다니는 사람들, 은사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지나치게 성령이라는 단어만 보면 그 모든 것 속에 인생의 대답이 있다고 착각하고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없지않아 있습니다. 이것은 무분별한 신비주의자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죠. 아주 메마른 이성주의자의 입장에서 성령을 거부하는 입장이라든지, 혹은 분별하지않고 지나치게 은사에 집착하는 이 무분별한 신비주의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은사의 문제에 관한 적극적인, 성경적인 견해들을 피력하기에 앞서서 경고로 시작 합니다. 우리 12장 1절과 2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절과 2절을 다시 한번 함께 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 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고린도라는 도시에는 아주 우상이 많았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듣기 전에도 고린도 사람들은 아주 신비한 것을 탐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종류의 우상 신들에 대한 그런 사모하는 마음들이 있었고, 그래서 그들이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도 어떤 신비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또 신기한 것에 끌려 다니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상의 포로가 되었는데 이런 경향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에도 계속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신기한 것을 좋아 하는 사람들은 예수 믿고 나도 신기한 것만 좋아합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는 일반적으로 은사를 많이 경험한 것도 사실이지만 은사 때문에 과잉 은사로 말미암아서 혼란을 경험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런 현상들을 경고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바람직한 자세로 성령의 은사를 추구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는 은사 문제로 성도 상호간의 교제의 갈등조차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12장부터 시작해서 13장, 14장까지 한 패키지로 은사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다음 시간에 13장을 좀더 생각하겠습니다만, 고린도전서 13장도 사실은 사랑을 다루려고 했던 말씀이 아니에요. 그 은사 문제를 쭉 다루다가 은사를 사랑의 태도로 선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동원 목사의 설교 중에서 )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