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아와 라헬
창29:31-35
김기석목사(청파교회 2010/6/6)
[주님께서는,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레아의 태를 열어 주셨다. 라헬은 임신을 하지 못하였으나 레아는 마침내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는 속으로 “주님께서 나의 고통을 살피시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 이제는 남편도 나를 사랑하겠지” 하면서, 아기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하였다. 그가 또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는 속으로 “주님께서, 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렇게 또 아들을 주셨구나” 하면서, 아이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하였다. 그가 또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는 속으로 “내가 아들을 셋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도 별 수 없이 나에게 단단히 매이겠지” 하면서, 아이 이름을 레위라고 하였다. 그가 또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는 속으로 “이제야 말로 내가 주님을 찬양하겠다” 하면서, 아이 이름을 유다라고 하였다. 레아의 출산이 그쳤다.]
• 오래된 이야기
지방 선거가 끝난 후 사람들은 민심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위해 분주합니다. 패배한 쪽은 당황스러워하고, 승리한 쪽은 기뻐합니다. 졌다고 낙심할 것도 없고 이겼다고 기고만장할 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정치적 손익 계산에 앞서 겸손히 지금까지 우리가 지향해 온 가치들에 대해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이번 선거 결과를 보면서 저는 대중 지성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거에 대중은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집단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께 환호를 보내던 군중들이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보면 대중들은 지성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고, 무질서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대중들은 지식인 못지않게 정보를 생산하고 해석하고 소통시키는 데 유능합니다. 정치인들은 이런 점을 무겁게, 그리고 무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갈등과 대결을 넘어 아름다운 세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에덴 이후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교류가 가능했습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아담은 자기 앞에 나타난 낯선 존재를 바라보며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창2:23)
이처럼 인간이 발설한 최초의 문장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 노래는 낯선 존재를 온 존재로 맞아들이는 사랑의 손짓이었습니다. 하지만 에덴 이후의 사람들은 ‘불안’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갑니다. 최초의 살인자가 된 가인은 땅에서 쫓겨난 신세가 되었습니다. 뿌리 뽑힌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주님 앞을 떠난 가인이 머물렀던 에덴의 동쪽 땅 이름은 ‘놋’(Nod)입니다. 놋이란 ‘떠돌아 다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스산한 마음을 이토록 절묘하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는 형제자매간의 경쟁(sibling rivalry)과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보게 될 라헬과 레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삶 속에 야곱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자매들은 경쟁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 낭만적 열정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 에서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챈 야곱은 형의 보복이 두려워 하란에 있는 외가로 피신합니다. 그곳 우물가에서 잠깐 다리쉼을 하던 야곱은 양 떼를 몰고 오는 외사촌 라헬을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집니다. 사람 사이의 감정의 흐름에 별로 주목하지 않는 성경이지만, 라헬을 향한 야곱의 사랑에 대해서는 자제력을 잃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라헬을 향한 야곱의 낭만적 열정을 여러 번 드러냅니다(창19:18, 20, 30). 그런데 야곱의 열정에 불을 붙인 것은 라헬의 조신한 몸가짐이나 품성 때문이 아닙니다. 그 용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도 이채롭습니다.
“레아는 눈매가 부드럽고(rakot), 라헬은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도 예뻤다.”(29:17)
레아의 눈매가 ‘부드러웠다’고 말할 때 사용된 ‘라콧rakot’이라는 단어는 ‘매혹적’이라는 뜻과 아울러 ‘약하다, 흐릿하다’ 혹은 ‘민감하다’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어느 쪽일까요? 성서 기자가 라헬의 용모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단어는 ‘아름답다’와 ‘예쁘다’ 둘입니다. 레아보다 뛰어난 라헬의 용모를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엿보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용된 ‘라콧’은 ‘매혹적’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흐릿하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겁니다. 뭔가 불길합니다.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야곱은 칠 년을 머슴처럼 일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렇지만 칠 년이라는 세월을 마치 며칠같이 느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기약한 날이 찼고, 라반은 그 고장 사람들을 다 불러놓고 결혼식 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어 줍니다. 이윽고 밤이 되자 라반은 라헬 대신 레아를 슬쩍 신방에 들입니다. 아침에야 그 사실을 깨달은 야곱이 항의해보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라반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큰 딸을 두고서 작은 딸부터 시집보내는 것은, 이 고장의 법이 아니라”는 말로 야곱의 항의를 일축합니다. 야곱은 라반을 위해 칠 년을 더 일해주기로 하고 초례 기간 이레가 지난 후 라헬도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성경은 그들의 결혼 생활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였다.”(29:30a)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이 한 마디 속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습니다. 말 뜻 그대로 보자면 야곱은 레아도 사랑했습니다. 다만 라헬을 더 사랑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레아도 만족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랑은 감정입니다. 영혼과 영혼을 맺어주는 끈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한다는 사실을 레아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거절당한 것 같은 느낌이 그를 사로잡습니다. 편애는 긴장을 낳게 마련입니다. 긴장은 갈등과 비극을 낳습니다. 레아의 질투심을 책망해야 할까요?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야곱의 시선에 동화되어 라헬의 편을 들고 싶어 합니다. 왜요? 예쁘니까요. 예쁜 사람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하하)
• 기우뚱한 중심
하나님도 그러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이야기꾼은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은 채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레아의 태를 열어 주셨다. 라헬은 임신을 하지 못하였으나 레아는 마침내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다.”(31-32a)
이것은 토라 이곳저곳에 등장하는 족보 이야기의 한 부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덜 사랑받는 자’, 소홀히 여겨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가슴에 멍이 든 여인의 처지를 헤아리시고 계십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은 모세에게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출3: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그늘진 곳에 머무는 이들에게 눈길을 던지시고,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보다’, ‘듣다’, ‘알다’에 주의하십시오.
레아는 자기 태를 열고 나온 맏아들에게 르우벤이라는 이름을 부여합니다. ‘보다’라는 뜻의 ra'ah에서 파생된 말로 ‘보아라, 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고통을 살피시고 선물로 그 아들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레아는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합니다. 이 이름은 ‘듣다’는 뜻의 ‘shama’에서 파생된 말로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으시다’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는 이름을 레위라 짓습니다. 이 이름은 ‘연합하다, 결합하다’라는 뜻의 ‘lava’에서 파생된 말로 남편도 이제는 자기를 외면하지 못하리라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레아는 네 번째 아들을 낳고는 그 이름을 유다라 했습니다. 이 말은 ‘찬송하다’는 뜻의 ‘odeh’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라는 이름은 사랑받지 못하는 자의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보고, 듣고,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과 돌봄은 마침내 레아의 가슴에 심겨진 쓴 뿌리를 뽑아냈고, 넷째 아들 유다가 태어나자 레아의 탄식은 ‘찬양’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손길이 ‘덜 사랑받는 자’ 레아와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쓰라린 눈물을 기쁨의 찬양으로 바꾸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루 게릭 병에 시달리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교회 음악가였던 그는 7년 동안 계속된 아내의 극진한 돌봄에도 불구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의 1주기 추도식이 다가오자 남겨진 그 아내는 교회 공동체에 이런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남편에게 루 게릭 병의 징후가 나타나던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우리에게 사랑과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격려의 메시지, 편지, 카드를 지속적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전화도 주시고, 먼 데서 찾아와주시기까지 했습니다… 맛있는 음식도 보내주셨습니다. 집을 비운 사이 망가진 것들을 고쳐주셨고, 길도 내주시고, 편지도 챙겨주시고, 쓰레기까지 치워주셨습니다. 우리의 적막한 시간을 달래주려고 멋진 사랑의 선물도 보내주셨습니다…성경 구절을 적어 보내주시기도 했고, 호흡기 치료를 위해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이들을 위해 서도 기도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남편으로 하여금 자기가 여전히 찬양 사역의 한 부분을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진 여러분의 기도! 그 기도는 우리를 떠받쳐주었고, 특별히 절망의 자리에서 우리를 들어 올려 주었고,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불가능했을 힘을 북돋워주었고, 우리가 하나님의 원천에 잇대어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언젠가는 남편의 병이 이 땅에서 치유되지 않은 까닭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지금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나은 삶을 누리며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을 향한 감사의 마음은 사랑이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습니다.”(Philip Yancy, Grace Notes, zondervan, 2009, p.176)
신앙공동체는 이 여인에게 하나님의 현존의 징표였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이 여인처럼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하나님은 레아의 아린 마음을 헤아리시고, 그 여인의 마음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인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런 일을 우리를 통해 하고 싶어 하십니다.
• 해독제는 경청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라헬과 라헬이 낳은 요셉과 베냐민에 대한 야곱의 편애는 야곱 가문에 긴장과 불화와 갈등을 가져왔습니다. 결국에는 형들이 공모하여 아우를 종으로 팔아버리는 일까지 발생합니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다른 이들의 가슴에 남기는 그림자를 외면하면 안 됩니다. 모든 덕성은 그에 상응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용감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알지 못합니다. 지성적인 사람은 그렇지 못한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화해는 좋은 것이지만 정의가 전제되지 않은 화해는 피해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깁니다. 온유함은 좋은 것이지만 무기력해지기 쉽습니다.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데서 인간 세상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평화로운 세상은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발설된 말이든, 속으로 삼켜진 말이든,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하다 보면 우리 사이에 평화의 기운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레아의 아들들은 아버지 야곱의 따사로운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야곱은 레아의 아들들의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야곱은 르우벤의 성정이 거친 파도와 같고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기 때문에 으뜸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난폭한 무기처럼 그 노여움이 혹독하고, 그 분노가 맹렬하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유다만이 긍정적인 미래를 약속받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덜 사랑받은 레아의 아들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이 나왔음을 압니다. 레위 지파에서 모세와 아론을 비롯한 제사장 가문이 나왔고, 유다 지파에서 다윗 왕가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결국을 우리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들이 빚어내는 어둔 그늘을 흰 그늘로 바꾸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중심을 잡아가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매우 엄중한 진실입니다. 그렇기에 누구도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의 가슴에 그림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합니다. 레아처럼 ‘사랑받지 못하는 자’라는 생각에 쓰라린 눈물을 흘리는 분이 계십니까? 잊지 마십시오. 세상은 우리를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위해 멋진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 이 믿음이 우리 발을 절망과 원망의 수렁에서 건져줍니다.
평화 노래꾼 홍순관은 “참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마른 들판에 꽃을 피우는 일입니다. 오랜 가뭄에도 숨 쉬는 생명으로 살아 있는 일입니다. 망망 바다 한가운데 돛을 달고 바람을 기다리는 일입니다” 하고 노래했습니다. 참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시대, 우리가 참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귀로 세상을 듣고, 하나님의 손으로 세상을 보듬을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징표가 될 것입니다. 이 희망을 품고 6월 한 달 내내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by 코이네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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