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출애굽기

[출1:8] 환란 속의 은총(1)

'코이네' 2016. 6. 5. 00:30

 

환란속의 은총 (1)

(출애굽기 1:8-14)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환난을 만나거나, 역경을 만나거나,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거나, 답답한 일을 당하거나, 핍박을 받거나, 꺼꾸러뜨림을 당하더라도 한겨울의 송죽과 같아서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 딸들의 위치를 지키고 늠늠한 모습을 과시하는 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민족적으로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이였으나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역으로서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전진했으나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가나안 땅, 축복의 상징인 가나안 땅, 생명의 상징인 가나안 땅인 하늘나라를 향하여 지금도 여정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계속했고 오늘도 계속하고 내일도 계속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목적하고 가는 땅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조상 전례대로 내려온 언약의 땅,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그러면 그곳으로 가는 길이 어떠했으며, 그곳으로 가는 길에 시련이 어떠했으며, 그 길의 축복이 어떠했으며, 저지른 시행착오는 어떠했으며, 또한 그 시행착오를 어떻게 해결했던가.....를 살피면서 우리의 신령한 땅 가나안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배울 것은 배우고 경계할 것은 경계하고 본받을 것은 본받으려고 합니다.

 

지난 한주간은 각 가정마다 개인마다 변화 무쌍한 한 주간이었던 같습니다. 크고 작은 변화가 개인을 엄습하고 가정을 엄습하고 직장을 엄습하고 사업을 엄습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에 처했다 할지라도 그래도 우리가 가는 길이 가나안이기에 이 모든 환경은 우리에게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으로 갑시다. 가나안은 축복의 상징이요 가나안은 행복의 대명사입니다. 그 가나안으로 갑시다. 가나안은 물론 지역적으로는 요단강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지금의 팔레스타인지역을 말합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가야 할 가나안은 영원한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나 먼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의 위치에 바로 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을 진정 우리의 아버지

로 모실 자리에 모시는 이 바른 관계를 가질 때, 우리의 안방이 가나안이 될것이요, 우리의 건너방이 가나안이 될것이요, 응접실이, 사무실이, 점포가, 공장이.... 가나안 될것입니다. 그 자리가 곧 젖과 꿀이 흘러 넘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이 후 여러분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축복이 여러분의 안방에(건너방에, 직장에, 사무실에, 점포에...)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1-7절까지는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가족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8-14절까지는 애급에 내려간후 요셉이 죽은 뒤 그 자손들이 억압받으며 노예생활하고 학대받은 기록이 시작됩니다. 15-22까지는 애급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죽이고 아들을 낳으면 강에 던지라고 하는 인간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잔인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멸종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니 그럴수록 하나님의 백성은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흥하기만 하고 마치 불이나서 두드리면 불씨가 사방에 번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은 더 더욱 번창했습니다.

 

1-5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에 내려간 수가 70명이란 사실이 나옵니다. 창46:27에 있는 그대로 말입니다. 이렇게 70명이 내려가서 얼마간 사는 동안 요셉이 세상을 떠나고 요셉의 형제들도 다 세상을 떠납니다. 요셉이 살았을 때는 나라에 국공자였기 때문에 요셉의 가족들이 대접을 받고 살았지만 요셉도 죽고 형제들도 죽고 요셉의 은공을 아는 세대들도 다 가고난 후, 세대가 완전히 바뀌어 지니 요셉의 은공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지라 이스라엘 사람에 대한 경계심과 아울러 학대와 잔인한 대접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6절을 보니 이스라엘 백성은 감소되지 않고 오히려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대하고 강대하여 온땅에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말살정책을 펴도 이스라엘 백성은 감소되거나 위축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습니까?

 

중다는 가을에 과일 나무 가지에 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린 것을 말하며, 번식은 물고기 같이 숫자가 얼마나 늘어 나는지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를 말하고 창대하다는 것은 대중을 이루어 개미떼와 같이 와글와글한 것을 말하고, 강대하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중 빌빌대는 사람이 없어 모두 건강하다는 것을 말하고, 온 땅에 가득하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어디를 가나 이스라엘 사람이 가득하다는 뜻이요 더 나가서 모든 사람중에 탁출해서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기고 몸도 건장하고 무슨 일을 해도 다른 사람이 못하는 일을 척척 해내니까 어디를 가나 화제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요 큰 일을 한 공로는 몽땅 이스라엘 사람이란 뜻입니다.

 

“아니 비돔에 그 큰 성을 누가 지었어?” “이스라엘 사람이 했단다.”

“그럼 라암셋에 있는 큰 성은 누가 지었지?” “역시 이스라엘 사람이 했단다.”

 

이렇게 어디를 가나 화제거리가 이스라엘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온 세계의 화제거리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까? 노벨상을 타도 이스라엘 사람, 제일 큰 부자도 이스라엘 사람, 정치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도 역시 이스라엘 사람...다윈도 유대인이요, 루즈벨트, 키신져, 쳐칠, 아인쉬타인, 폰브라운......세계 각국의 저명한 과학자, 정치가, 문학가, 예술가, 경제인.....모두 거의가 이스라엘 혈통인것 처럼 애굽에서도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나 온 애굽천지에 이스라엘 백성이 꽉찬것 같이 이스라엘 사람 천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애급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거 이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 이러다가는 주객이 전도 되겠어. 그러니 멸종정책을 쓰자.” 하여 그냥 노동을 시킨다, 자식을 노에로 판다, 그래도 안되니까 자식을 나면 나일강에 던지라며 죽이기 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백방으로 이스라엘 사람을 죽일려고 말살정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는 그럴수록 멸종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흥하고 창대하져만 갔습니다.

 

저는 환난속에 있는 각 가정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읽는데 갑자기 “아하, 이것이 바로 환난속의 은총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환난속의 은총’이라는 제목으로 두 시간에 걸쳐 말씀을 상고해 보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에서 당한 환란이 극심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의 손실이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당하겠습니까? 정권을 휘두른들 하나님을 당하리요? 칼을 휘두른들 하나님을 당하리요? 모략을 쓴들 하나님을 당하리요?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바위가 깨지겠는가? 인간이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대적한들 마치 게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어찌 당하리요? 그 하나님이 배후에 계시는 이스라엘 백성은 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아무리 말살정책을 쓰고 학대정책을 써도 말입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하는데 오늘은 시간 관계상 한가지만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백성의 환경은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환경이란 말속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좋은 환경, 나쁜 환경, 이 지역에 이사하고 저 지역에 이사하고, 이 모양으로 살다가 실패하고 저 모양으로 살다가 성공하는 모든 환경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이 조종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배후에도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의 가는 길을 지키시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당하는 일들을 막을 것은 막으시고, 열어 주실 것은 열어 주시고, 그 가는 길에 위태할 때는 다른 길을 열어 주시기에 내가 원하는 길은 못가고 원치 않는 다른 길로 간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의 배후에 계셔서 최선의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인도하신 다는 사실을 믿고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위시해서 이삭과 요셉의 생을 더듬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갈대아우르를 떠나라.” “가나안으로 가라.” “가나안에서 애급으로 가라.” “얼마 있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라.” “벧엘로 가라.” “브엘세바로 가라.” “애급으로 가라.” “또 다시 가나안으로 가라....” 정신 못차릴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꾸 이사를 시키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하시는 육성방법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자녀를 그 표준에 맞도록 육성시키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을 잘 아실 것입니다. 부모도 자식을 어떤 높은 목적과 분명한 내일을 바라보면서 양육할 때에 여기서 기르다가 적당하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그곳에서도 적당하지 않으면 또 이사가고 또 이사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사 시키시고, 이삭을 이사시키시고, 야곱을 이사시키시고 애급으로 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이사시키시는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기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육성방법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생각할 것은 오늘 우리가 당하는 변천하는 환경은, 기도하고 말씀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당하는 모든 생활 환경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때로는 가난하다가 부유하고 부유하다가 가난해집니까? 왜 우리가 때로는 성공하다가 실패하고 실패하다가 성공합니까? 왜 우리가 때로는 건강하다가 약해지고 약하다가 건강합니까? 왜 우리가 때로는 서울서 살게 하시다가 부산으로 보내시고 부산에서 살다가 인천으로 오게 하십니까? 왜 우리가 때로는 이 동네서 살다가 저동네로 이사하고 저동네서 살다가 이동네로 이사합니까?

 

이 모든 변천은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의 의지나, 인간의 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옛부터 사람 사는 것은 팔자소관이라, 운명이라고 했습니다. 보기에는 잘 살 사람 같은데 다 잘 사는 것이 아니고 못 살 사람 같은데 다 못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살 것 같은 사람도 못 살고 못 살 것 같은 사람도 잘사니 그래서 모두 제복은 갖고 태어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딸에게는 운명도 아니고 숙명도 아니고 더우기 팔자소관도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당하는 환경의 변천은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배후에 계셔서 이것이 필요할 때는 여기에 있게 하시고, 저것이 필요할 때는 저기에 있게 하셔서 우리의 필요에 따라 환경이 우리에게 와지는 것입니다.

 

갈대아우르를 떠나라 하시는 말씀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고, 애굽에 내려가라는 말씀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고, 다시 가나안으로 가라는 말씀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표준에 맞도록 양육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활환경에 변천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시사철 변화가 하나님의 뜻이요, 장미가 붉게 피는 것도 하나님의 뚯이요, 백합화가 희고 향기롭게 피는 것도 하나님의 뚯이요, 겨울산천에 송죽이 푸르른 것도 하나님의 뜻인즉,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게 오는 환경변화에 어찌 하나님의 뜻이 없겠습니까?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고 그 희생을 댓가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인데 어찌 그 자녀에게 오는 환경이 우연이 있겠습니까? 공중에 나는 새 한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우연이 아니요, 들의 백합화가 피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된 우리에게 일어나는 환경에 어찌 우연이 있겠으며 팔자가 있겠습니까?

 

키가 크고 적은 것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떤 이는 남자로 태어나고 어떤이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때로는 가난하고 때로는 부유한 것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부자로 만드시기도 하고, 부자로 두었다가는 하나님을 버릴 것 같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하여 때로는 가난하게도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건강할 때 사회봉사하고 주님 일 하면 건강하게 두시지만, 건강때문에 죄짓고 범죄의 도구가 될 때에는 건강 빼앗아 병신 만들어서라도 지옥가지 않게 하시는 것이 환경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저 사람에게 닷냥 줄 필요가 있으면 닷냥 주시고, 두냥 줄 필요가 있으면 두냥 주시고, 한냥 줄 필요가 있으면 한냥 주시고, 주어서는 안되겠다 하시면 안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찌르는 가시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고, 십자가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고, 사자굴 속에도 하나님의 뚯이 있었고, 오늘 내가 이 동네 궁궐같은 집에 살다가 내일 저 동네 초가삼간으로 이사하는 것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생활변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 나를 오늘은 여기에 내일은 저기에, 아브라함을 갈대아우르에서 가나안으로, 가나안에서 애급으로, 애급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이주시키시는 것 같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최선으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섭리의 손길이 우리의 변천하는 환경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 “그렇다면 숙명이나 운명이나 팔자소관이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그까짓거 될데로 되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다 될데로 될텐데 우리가 애쓸것 뭐가 있고 노력할 것 뭐가 있겠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숙명이나 팔자소관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는 ‘될데로 되라’는 대답이 나올 수 있겠으나 우리 아버지인 하나님의 최선의 섭리요 간섭이라는 것을 믿을 때에는 될데로 되라가 아니라 그 섭리에 대해 믿음과 순종과 그 환경속에서 내가 최선을 다해야 되겠다고 하는 신앙의 반응이 반드시 수반되는 법입니다.

 

찌르는 가시속에 하나님의 최선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믿고 순종할 때 내가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다할 때 그 가시속에 능력이 사람에게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난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이 환경에서 얻어지는 유익인 것입니다. 내가 사자굴에 던짐당할 때에도 “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어 나를 사자굴에 던지셨겠지!” 하고 그 속에서 최선을 다 할 때에 하나님의 보호가 나를 죽지 않도록 보호하셨구나 하는 것을 다니엘이 경험했습니다. 풀무불 속에 있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마찬가지요,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요셉에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어서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내가 옥에가지 들어왔구나! 하며 믿고 순종하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 했을 때 그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풀무불이나 감옥이나 사자굴이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내게 밤과 같이 부딪쳐 오나 밤을 위한 밤은 없고, 하나님의 섭리가 때로는 내게 겨울과 같이 부딪쳐 오나 겨울을 위한 겨울은 없습니다. 밤은 아침을 위하여 있고, 겨울은 봄을 위하여 있는 것 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결코 우리를 망치기 위한 환경이 아니라 가나안을 향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는 환경변천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때에 우리가 당하는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믿고 순종하고 최선을 다하는 태도, 이것이 바로 신앙인에게 오는 환경의 변천에 관한 태도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어떠한 괴로움이 있습니까? 외로움이 있습니까? 슬픔이 있습니까? 고독이 있습니까? 멀리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에 배정된 우리의 환경,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주님의 기도와 같이 순종의 기도가 환란이 변하여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 가운데서 최선을 다합시다. 그러면 찌르는 가시가 오히려 성공의 지름길이 되어질 것입니다. -아멘-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