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창세기

[창25:27] 붉은 죽으로 장자권을 거래한 에서와 야곱

'코이네' 2016. 6. 4. 17:54

장자권

 

창 25:27-34

 

팥죽

오늘은 먼저 팥죽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우리네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동짓날이 되면 이 팥죽을 먹었습니다. 여러분 왜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먹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귀신들이 붉은 빛을 두려워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팥죽을 먹으면 병이나 불행을 가져오는 귀신이 접근을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혼례 예식을 행할 때 신부의 볼과 이마에 연지 곤지를 찍는 것도 바로 이런 믿음 때문이었고 집 둘레에 민드레미나 봉선화를 심는 것도 바로 이런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춘기가 되면 아가씨들의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드리게 되는데 이것 역시 귀신들의 접근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가 아들의 옷 안쪽에 붉은 천을 붙여 주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네 선조들은 귀신들이 붉은 색을 싫어한다는 믿음 때문에 때로는 붉은 꽃으로 때로는 붉은 천으로 때로는 팥죽으로 귀신들에게 공갈을 치며 위협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기록되고 있는 에서는 이 붉은 팥죽을 먹고 그만 인생을 망쳐버린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관점에서 보면 에서는 귀신들을 내어쫓고 멋진 성공을 해야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성공을 하지 못한 것을 보면 우리 선조들이 믿었던 그 믿음이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아뭏튼 에서는 팥죽을 먹은 것이 원한에 맺힐만한 그런 사람입니다. 30절 말씀을 보면 에서의 원한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에돔이라는 말입니다. 이 에돔이라는 말은 에서의 별명으로 붉다라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에서가 이처럼 에돔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25절에 설명되어 지고 있습니다. 25절 말씀을 읽습니다. “......................” 이 말씀은 왜 에서의 이름을 에서라 붙이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이죠? 그렇습니다. 그의 피부가 붉고 털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0절을 보면 그의 별명이 에돔이라고 붙여진 이유가 바로 이 붉은 팥죽 때문이었음을 밝혀 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에서가 붉은 사람이라고 불려진 이유는 그의 피부가 붉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팥죽에 얽힌 기구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 팥죽의 사건은 에서에게 치명적인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의 별명을 에돔이라 불리게 할만큼 이 사건은 그에게 뼈아픈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에서는 이 팥죽 한 그릇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을 망쳐 버린 사람이었을까요? 제가 이렇게 질문을 드리면 여러분 중에는 어리둥절해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지금까지 에서를 소개하면서 팥죽 이야기도 하시고 에돔이라는 별명이야기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팥죽 한 그릇으로 인해 에서가 자신의 인생을 망쳤기에 그런 것 아닙니까?” 하고 반문을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제가 이것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좀 자세히 살피다 보면 그렇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표면적인 이유는 팥죽 한 그릇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을 망친 것처럼 보여지지만 좀더 말씀을 세밀히 관찰을 하다보면 그것보다 더 깊은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제 오늘 본문을 살피면서 바로 이것을 함께 살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야곱의 출생 배경과 그가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야곱이 어떻게 태어났었죠? 그렇습니다.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야곱이 어떻게 삶을 살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발꿈치를 잡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라 그랬죠? 그렇습니다. 속이는 자 등쳐먹는 자라는 뜻을 지닌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그는 속이는 자로서 살게 될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이제 오늘 본문은 이 야곱과 에서의 인생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이전에 이들의 인격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던 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함께 27, 28절 말씀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에서와 야곱의 성격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의 부모들인 이삭과 리브가에 대한 사실입니다. 먼저 다시 28절을 읽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구절을 읽으시면서 어떤 것들을 느끼셨습니까? 뭔가 좀 문제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문제가 있죠?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부모들의 편애입니다. 아버지는 에서를 사랑하고 어머니는 야곱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사랑하게 만들었을까요?

 

27절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자 에서를 보십시오. 어떤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남성적이고 외향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단적으로 말하기를 “들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즉, 늘 들에 거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야곱을 보십시다. 어떤 인물로 묘사되고 있죠? 그렇습니다. 여성적이고 내향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 그에 대해서 말하기를 장막에 거하였다고 말합니다. 자 이런 것들을 토대로 해서 한 번 평가를 내려보십시다. 아버지 취향에 맞는 사람은 누구처럼 보여집니까? 그렇습니다. 에서입니다. 당시 사회가 힘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것을 감안할 때, 또 에서가 장자라는 것을 감안할 때, 에서는 아버지의 취향과 맞아떨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누구의 취향에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취향에 맞습니다. 그는 늘 장막에 거했음으로 어머니와 가까이 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필요로 했을 때 그는 늘 어머니 곁에 있었을 것입니다. 또 28절 말씀은 이삭이 에서를 사랑한 이유를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함으로”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서는 아버지의 식성에도 잘 맞아떨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에서를,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들로 인해서 이들은 두 아들을 편애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아이들을 이렇게 편애하면 어떻게 되리라 생각을 하십니까? 아이들의 인격이 정상적으로 자라나리라 생각을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정상적으로 자라날 수 없습니다. 서로 한 부분씩 커다란 구멍을 안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다. 에서와 야곱이 아버지 앞에 함께 자리를 한다면 에서는 항상 우쭐될 터이지만 야곱은 기죽을 것입니다. 또 반대로 이들이 리브가와 자리를 함께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대로 에서가 기죽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들은 서로 커다란 구멍을 지닌 체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 구멍을 매워 보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시기하고 다투며 서로의 것을 탐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팥죽의 사건도 사실은 여기서 출발을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있어질 여러 사건들도 사실은 문제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잘못 길러서 이렇게 왜곡된 인격을 갖게 된 것입니다. 편애했던 것이죠. 많은 사람들은 오늘 이 사건을 살피면서 어떤 사람은 야곱을 탓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에서를 탓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들 부모들에게 있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편애를 하지 않았다면 야곱과 에서는 훨씬 더 우애 있는 사이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서로 돕고 세워줄 수 있는 관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과 에서의 성격을 보십시오. 어떻죠? 예, 극명하게 대조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단점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잘만하면 이것은 서로에게 큰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에게는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보완해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보완해 주려 하기 보다 서로의 것을 탐냈습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부모의 잘못된 가치관이 이들을 이렇게 왜곡되게 했습니다. 서로 잘만 하면 멋진 모습을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오히려 이들을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부모의 굽은 모습을 그대로 닮게 되었던 것이죠.

 

이런 모습을 살피다 보면 섬짓한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바로 저도 이런 실수를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와 같이 잘못된 가치관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잘못된 가치관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가되어서 그것이 저들의 인생을 망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잘못된 가치관을 가져서 나의 삶에만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그래도 견딜 만 합니다. 그러나 나의 잘못이 나뿐 아니라 나의 아이들의 인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면 얼마나 조심스러운 지요.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여러분들도 이삭과 리브가와 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늘 여러분 자신을 살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우리들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잠시 맡겨 주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우리들의 아이들을 잘 못 양육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흥정의 시작

오늘 본문은 이렇게 왜곡되게 자란 이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29절을 읽습니다. “......................” 이 구절은 두 사람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두 사람이 비교가 됩니까? 그렇습니다. 에서는 들에 있다가 들어온 반면 야곱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팥죽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에서는 에서답고 야곱은 야곱답습니다. 자 여기서 에서가 들에 있다가 들어온 장면을 본문은 이렇게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이 말은 심히 시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냥 옆에서 보기에도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에서는 피곤에 지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보십시오. 만약 이삭과 리브가가 이들을 잘 키웠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야곱은 형을 다정하게 맞아들이면서 “형 배고프지 이거 먹어” 했을 것이며 형에서는 “그래 아우야 고맙다. 이거 내가 사냥해서 잡은 것인데 너 가져라” 했겠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정상적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30, 31절 말씀을 읽습니다. “......................” 30절 에서의 반응은 그래도 정상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야곱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극히 비정상적인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형의 시장함을 이용해서 자신의 탐심을 채우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왜 갑자기 형 에서에게 팥죽으로 장자권에 대한 흥정을 시작했을까요?

 

리브가에게 하신 말씀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들이 살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 리브가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무엇이라 말씀을 하셨죠? 23절을 보십시다. “......................” 여기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는 이야기죠.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아버지 이삭은 몰랐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바에 대해서 남편 이삭에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이삭이 이 일을 알고 있었던 흔적이 성경 곳곳에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증거가 그가 야곱을 에서인줄 잘 못 알고 축복을 해 주었다는 것을 그 스스로 알게 되었을 때 이삭이 크게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두려워했던 이유는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일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에서와 야곱에게는 이 일에 대해서 쉬쉬했을 까요? 이들이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뚜렷이 없지만 야곱이 취한 일련의 행동들을 보면 그는 분명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에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단정지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과 에서는 자라나면서 바로 이 이야기를 하면서 자라났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 때마다. 형의 자리를 탐냈을 것이며 에서는 비웃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러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야곱은 속으로 “형의 자리는 내것이야 언젠가는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하고 말겠어” 했을 것이며, 형은 “웃기지 마라 네가 아무리 그래 봤자 엄연히 법적인 장자는 아니 사실적인 장자는 나야 나” 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 얼굴만 마주치면 한 쪽에서는 “언젠가는” 했을 것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웃기지 마라” 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언젠가는 이라는 생각이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형 에서가 허기에 지쳐 들어왔을 때 그것을 바로 찬스와 연결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두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기회가 주어지자 확 나까체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야곱이 평상시부터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야곱이 이런 상황에서 장자권을 흥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호시탐탐 노리던 바로 그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때야” 하면서 잽싸게 에서의 장자권을 나까체려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약삭빠르고 용의주도한 모습입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이런 야곱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민족을 한의 민족이라 말합니다. 한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민족은 대부분 바로 이 “언젠가는” 이라는 생각을 하고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젠가는 내가 너를 잡겠어, 지금은 내가 이렇게 초라하지만 두고 봐 언젠가는 너를 잡을 날 있을 거야”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이렇게 언젠가 주어질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면서 언젠가는을 외치는 삶이 아니라 언제든지 다른 사람을 섬기리라는 자세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사십니까? 여러분들도 진정으로 이런 삶을 사십니까? 지금까지 그러지 못했다면 앞으로는 이런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서의 반응

자 그러면 이런 야곱의 흥정에 대해서 에서는 어떻게 반응을 할까요? 함께 32절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무엇이라 말하죠? 그렇습니다. 죽는 마당에 장자의 명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죽는 다면 다 장자고 뭐고 없을 터인데 우선 살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살아야 장자고 뭐고 있는 것이지 내가 지금 죽게 되었는데 이것이 뭐 그리 대단한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에서의 가치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장래의 장자권보다 당장의 배고픔이 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장자권을 단장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 서슴없이 내동뎅이 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에서의 문제였습니다. 사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을 탐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을 해 보십시다. 만약 제가 여러분들 집에 심방을 갔는데 여러분들이 맛있는 음식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집사님 그거 내게 주십시오. 그러면 내 목사직을 집사님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얼른 그 음식을 제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목사가 아니고 여러분이 목사가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목사가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목사입니다. 또 여러분들은 여전히 성도이고요. 그렇다면 보십시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목사직을 그렇게 하찮게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지금 에서의 문제는 팥죽 한 그릇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저에게 있어서 문제는 자신의 장자권에 대해서 하찮게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다. 에서는 동생 야곱이 자신의 장자권에 대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장자권을 지켰어야지 옳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그 일을 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장자권을 하찮게 여긴 것입니다. 당장의 배고픔을 면키 위해서 그는 장자권을 헌신짝 여기듯 걷어차 버리고 만 것입니다.

 

장자권의 중요성

그러나 이 장자권을 에서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찮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장자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가를 스코필드는 이렇게 정리를 해 놓고 있습니다.

 

첫째. 당시 아직 제사장 제도가 확립되지 않았을 때이므로 장자는 제사장직을 대신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당시 아직 제사장직분이 확립되기 전인 족장시대였으므로 제사는 그 집안의 장자의 주도하에 드려졌습니다. 따라서 에서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제사하는 일을 하게될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직분을 하찮게 여깁니다.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어느 정도로 별 볼일 없이 여깁니까? 그렇습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팥죽 한 그릇보다 더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이러한 행동은 지탄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스코필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 장자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어갈 자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에 별과 같이 바다에 모래와 같이 후손들이 많아 질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약속은 누구를 통해서 이어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장자를 통해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서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갈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이것을 하찮게 여긴 것입니다. 이삭은 야곱보다 에서를 더 사랑했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에서를 종종 불러내서 하늘의 별들을 보여 주면서 “에서야 저 하늘의 별들이 보이지 하나님께서 너희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저 하늘의 별들을 보여 주시면서 바로 저와 같이 자손이 많아지리라 말씀하셨단다. 바로 네가 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갈 자란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가문에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를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에서는 앞으로 자신이 어떤 인물이 되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 장자권을 하찮은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하찮은 것으로 여긴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하나님의 약속을 하찮은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 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배고픔이 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지금 죽는데 하나님의 약속이 무슨 소용이 있어”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귀한 특권을 헌신짝 차듯이 차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스코필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하리라는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획하셨으므로 장자는 바로 이 일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십시다. 에서는 또 무엇을 우습게 여긴 것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우습게 여긴 것이 됩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하는 아들을 아낌없이 보내신 그 놀라운 사랑 이것을 에서는 우습게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십시오. 에서의 문제는 단지 팥죽 한 그릇을 탐한데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자신에게 주어졌던 그 수많은 특권들을 그는 특권으로 여기지 않고 살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준 은혜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그의 이런 태도 결국 이런 그의 태도가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실 어린 시절 팥죽 한 그릇에 장자직을 팔았다고 해서 실제로 장자권이 팔린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렇게 귀하고 소중한 장자권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는데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에서를 향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히 12:16,17] “음행 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여기서 에서에 대해서 무엇이라 표현을 하고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망령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것을 위해서 영적인 것을 헌신짝 버리듯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망령된 자로 일컬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여러분들께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 여러분 중에도 이 에서와 같은 그런 인물은 없습니까? 육적인 것을 위해서 영적인 것을 버리는 그런 분들은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적인 것을 위해서 영적인 것을 버리는 것을 봅니다. 사실 영적인 것은 잘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육적인 것은 금방 표시가 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의 영적인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지만 나의 육적인 것에 대해서는 대단한 관심을 갖고 살핍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보려고 육적인 것을 위해서 영적인 것을 포기합니다. 바로 에서가 그랬습니다. 당장의 육적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소중한 특권을 헌신짝 버리듯 버린 것입니다. 바로 이런 에서를 향해서 히브리서는 망령된 자라 소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런 망령된 자가 아닙니까?

 

사실 우리들을 살펴보면 우리들도 많은 은혜를 입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중 가장 귀한 특권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성경을 한 곳 보겠습니다. [롬 8:16-17]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성령께서 우리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증거하고 있다고하죠?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들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어떤 아들입니까? 그렇습니다. 후사라 말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후사란 말이 어떤 뜻인 줄 아십니까? 여기 후사란 말은 상속자 대를 이을 자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이겠습니까? 한 가정의 대를 잇고 상속을 받는 자라면 누구죠? 그렇습니다. 아들입니다. 아들도 장자여야 합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이런 지위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을 받고 하나님 백성의 대를 이어갈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들이 이런 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의 과거에 대해서 에배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엡 2:11-12)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무엇이라 말씀하죠?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과거 약속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만한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약속에 대해서는 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들이 어떻게 장자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계속해서 에배소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엡 2:13-19)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 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무엇이라 말씀하죠?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외인이 아니며 하나님의 권속 즉,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장자가 되었다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들은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외인이며 이방인이었던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이제는 아들 장자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렇게 우리들을 아들로 불러 주심에 대해서 귀하게 생각하고 아들답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에서는 장자였지만 장자처럼 살지 못해서 망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들을 아들이라 장자라 말씀하시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사시고 계십니까? 진정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장자가 된 것에 감사하며 아들처럼 사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에서 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그 놀라운 특권을 헌신짝 버리듯 버린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아들이 엉망으로 살면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아들입니까? 에서와 같은 아들입니다. 아니면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귀히 여기며 사는 그런 아들입니다. 아들 다와 지십시오. 이를 위해서 노력하십시오. 그래서 걸음걸이도 닮고 말투도 닮으십시오. 얼굴 표정도 닮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를 꼭 닮은 귀한 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by 코이네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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