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창세기

[창25:27] 장자권

'코이네' 2016. 6. 4. 17:40

 

장자권

 

창 25:27-34

 

 

야곱의 출생기사는 상당히 중요하다. 출생 사건이 이해된 후에야 다음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곱은 형을 속여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다. 야곱이란 말의 의미는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이지만 직역하면 ‘약탈자’란 뜻이다. 하나님은 왜 에서보다 사기꾼이요 약탈자인 야곱을 더 사랑하신 것일까?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하시니라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라고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7-13)”

 

태어나기 전, 선악을 행하기 전에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셨다고 하였다. 성경이 진술하는 것은 야곱을 하나님이 택했기 때문에 그의 인생을 놓아 기르지 않고 간섭해서 기른다고 하셨다. 이는 야곱이 에서보다 나아서 하님이 야곱을 택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야곱을 택했기 때문에 그에게 그의 인생을 맡기지 않으시고 택하신 하나님이 이루시겠다는 것이 택함이다.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끌고 오시려고 하는 것이 야곱의 인생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야곱의 불순종 간에 일어나는 갈등이다. 그러나 에서에게는 이런 갈등이 없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형으로부터 빼앗았다. 장자의 명분을 빼앗는 것은 결코 유산을 많이 물려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장자의 명분을 빼앗는다는 것은 사실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뺏겠다는 욕심을 가진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이고 자기가 어린 자이지만 큰 자가 자기를 섬기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확신이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빼앗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구약에서 언제나 가문을 잇는 사람은 장자이어야 한다. 마태복음 1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에서가 들어가지 않고 야곱이 들어갔다. 장자권을 뺏은 사건을 신약식으로 푼다면 ‘나는 예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이다. 에서는 무엇이라 하였는가?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창 25:32)”하였다. 먹고사는 문제가 급하지 예수 그리스도는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 장자의 명분을 빼앗은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고백은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중요한 것이다. 유산을 받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장자의 명분을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평생에 걸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장자의 명분을 돌려주지 않았다. 32장 얍복강가 자신의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도 이것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는 것을 성경은 두고두고 상징화시킨다. 성경에서 드러내 놓고 언제나 저주하는 대표적 인물이 에서이다.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다. 구약에서 이사야, 예레미야, 오바댜, 말라기 등이 몽땅 에돔을 욕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이스라엘은 항상 얻어 터지지만 저주받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야곱만큼 이스라엘을 대표하기에 적절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 민족 자체가 그의 이름으로 불림받고 있고 개인적으로도 신자가 야곱같고 이스라엘 백성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편할 날이 하루도 없었고 야곱에게도 칭찬받을만한 날이 하루도 없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목표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칭찬이 없다. 그러나 반대로 이스라엘이 잘못을 인하여 아무리 하나님 앞에 큰 꾸중과 징계를 받는다 해도 저주를 받은 적은 없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니라(말 1:2-5)”

 

신앙 문제에 있어 야곱과 에돔이야 말로 가장 대표적으로 신앙인과 불신앙인으로 갈라서는 상징이다.“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와 “필요치 않다”는 상징의 대표적인 두 인물이다.

 

“오바댜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소식을 들었나니 곧 사자가 열국 중에 보내심을 받고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날찌어다 우리가 일어나서 그로 더불어 싸우자 하는 것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를 열국 중에 미약하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 바위 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찌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 내리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혹시 도적이 네게 이르렀으며 강도가 밤중에 네게 이르렀을찌라도 그 마음에 만족하게 취하면 그치지 아니하였겠느냐 혹시 포도를 따는 자가 네게 이르렀을찌라도 그것을 얼마쯤 남기지 아니하였겠느냐 네가 어찌 그리 망하였는고 에서가 어찌 그리 수탐되었으며 그 감춘 보물이 어찌 그리 수탐되었는고(옵 1:1-6)”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내리실 멸망과 진노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다음을 보자.

 

“오직 시온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며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의 위에 붙어서 그를 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은 남은 자가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옵 1:17-18)”

에서와 야곱은 분명한 영적인 분깃점이다. 둘이 얼마나 틀리는지를 알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는 사람이 천국에 가서 알게 될 것이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우리가 얻고 있는 이 축복과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신분의 소중함을 언제나 기억하고 감사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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