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고린도서

[고전7:22] 주님께 속한 자유인

'코이네' 2016. 4. 20. 17:33

 

주께 속한 자유인

 

고전 7:22-23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부터 억압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아니면 질병과 기타 운명적인 모든 괴로움이든, 누구나 자유를 만끽하면서 살 수 있는 존재는 못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이기도 합니다. 창세기를 읽어 보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만들고 마지막 사람을 지을 때, 자유인으로 지으셨지만, 그 자유는 제한된 조건하에서의 자유이었습니다. 즉, '동산의 모든 나무의 과실은 먹되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먹지 말라. 먹는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이것이 조물주와 피조물의 경계선이었습니다.

 

1. 자유를 제한하는 것 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컨대, 전쟁으로 인한 피 정복국의 국민이 당하는 것이 그렇고, 천재지변으로 재난으로 인한 경제적 빈핍이 그런 것이라고 봅니다. 특히 우리 민족은 나라 잃은 슬픔이 얼마나 컸던가? 를 몸소 체험한 민족이었고, 가난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가?를 모두 경험한 민족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정치적으로 자유를 뺏기고 억압속에 있는 북한의 감금되어 있는 납북인사들이나, 그쪽 체제에 반동으로 몰려 수용소에서 죽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저들이 산것은 산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최소한 인간의 기본권 마져 빼앗긴채 인간 이하의 학대를 받으며 산다는 것, 이 얼마나 죄악된 모습이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지금 아프리카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심한 경제적 가난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영양도 보충할 수 없어 죽어 가는 저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지난날의 가난으로 인하여 받았던 고통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질겨서 살은 것 뿐! 벌써 다 죽어서 없어져야 할 존재들이 였음을 상기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잠언 30:8절에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고 기도한 줄 압니다.

사람에게 제일 어려운 것이 가난의 멍에 입니다. 배고픔의 멍에처럼 처절한 속박은 없습니다. 배고픈 중에는 세상의 좋은 것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질병의 멍에도 마찬 가지 입니다. 사람이 제몸 앞으면, 아무리 경치 좋은 것을 보아도 그것이 좋아 보이지를 못합니다.

우리의 지난날의 일이기도 한 줄 압니다.

 

2. 자유는 소유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발견함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려면 무엇이든 소유해야 하는 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즉 가난했던 사람은 물질만 소유하면 자유를 누릴 줄 알고, 권력만 소유하면, 아니면, 지식만 소유하면, 모두 자유로워 질 줄 그렇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자유는 소유에 있지않고 발견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집나간 탕자의 생각이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로 부터 유산을 넘겨 받으면 자유롭게 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앞당겨 소유 했습니다. 마치 얼마전 우리 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부모를 죽인 패륜아 처럼, 부모가 죽어 자기에게 유산이 넘어오면 자유를 누리며 멋대로 살 것 같았던 것과 꼭 같습니다. 그래서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 그 많은 소유를 가지고 허랑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현대인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라고 봅니다. 저들은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가난을 극복해 냈습니다.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소유했습니다. 옛날에 비하여 엄청난 것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입니다. 사실 가정에 들어가 보면, 옛날 임금님들도 보지 못하고 갖지 못했던 물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TV, 라디오, 전축,전화,세탁기, 냉장고,에어콘,핸드폰,전기밥솟, 보온밥통, 자동차 등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까.사람들은 이런 것만 가지고 있으면, 자유를 누릴 줄 착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그런데 사실이 그렇습니까?

옛날 사람들에 비해 과연 자유를 누리고 있느냐? 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밴틸 박사가 지적했듯이 오늘의 현대인은 그 많은 유산으로 탕자의 문화를 이루어 놓았다고 한 말은 깊이 생각을 던져주는 말이라고 봅니다.

 

자유란 먹고 마시고 춤추고 환락으로 빠겨가는 것이 아닌데...오늘의 현대인의 모습이 마치 탕자처럼 허랑 방탕으로 날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돈 벌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 의식이 없습니다. 돈을 벌면 아버지의 집을 떠날 생각들만 합니다. 그래서 막연히 손짓하는 향락의 거리에서 자유를 누릴 줄 그렇게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젊은 세대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결혼 상대를 어떤 사람으로 이상에 그리고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가정을 어떤 가정으로 꾸며 가려고 하십니까? 지식 많고, 재물 많고,지위 높고,명예 많은 그런 사람입니까? 그 많은 소유가 여러분을 진정 자유인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까?그 많은 것을 가진 사람에게 시집 장가를 가면 자유를 누릴 것 같으냐? 말입니다. 탕자의 소유는 사치와 낭비와 향락으로 빠지게 하였고, 결국 돼지 우리에서 죽게 된 지경에 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오늘의 삶의 모습이 바로 이런 지경이 아닌가! 모두들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해야 행복하고, 자유를 누릴 줄 착각속에 살고 있습니다. 도리어 그 많은 탐심으로 인하여 눈이 어두워져 감추인 보화를 보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우리 주님은 가장 쉬운 비유로 진리를 설명했습니다.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통하여 자신의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산 사람에 비유하여 천국을 소유할 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느냐? 하면 자기의 갖고 있는 소유만 소중하게 여길 줄 알고, 자기의 것을 팔아 보화를 사내야 하는 영적 시야가 열려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자유인인 것 처럼 살고 있지만, 결국 욕심의 노예들, 욕망의 포로들, 죄의 종들이란 말입니다.

죄가 지배하는 한,참 자유인은 아닙니다. 죄가 끄는대로 끌려 다닐뿐입니다.

술에 종들을 보십시오. 술이 끄는대로 끌려 다닙니다.욕망과 쾌락의 종들을 보십시오. 자신을 제어할 수 없어 끌려 다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보면, [죄를 짓는자 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나는 무엇에 끌려 다니는지 한번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정치적 해방을 받았다고는 하나, 내 자신으로 부터 해방을 받은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자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자기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봅니다. 자기 마음을 자신이 어쩔 수 없어 고민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직도 종의 멍에를 멘 자유인이 많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정신 질환을 보면 대부분 자기를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어 생기는 일들입니다.

이것은 물질을 많이 소유했다고 해서 자기로 부터의 해방이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세상적인 것들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해방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런 것들로 인하여 더욱 자기로 부터의 속박을 느끼는 경우들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이 자기라고 하는 것, 참으로 떨쳐 버리기가 힘듭니다.

불교에서는 결국 진리의 깨달음이란 자기로 부터의 해방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연을 끊고, 심지어 자기로 부터도 모든 일체의 욕망을 끊어 버리면 그것이 곧 성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것을 추구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의 싸움을 하고 있는줄 압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십자가로 인한 대속의 진리입니다. 자기로 부터의 스스로의 해방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죄로 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라고 하였습니다.

 

3. 참 자유인은 자신이 종인 것을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은자들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의 종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을 부인하거나, 모르고 있을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자유인인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유인이 아니라 종들이란 말입니다. 종이란 자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죽는순간 까지도 자기를 포기할 수 없는 자존심의 종들입니다. 구제불능의 죄의 종들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남에게 간섭을 받지 않는 것 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신의 욕망으로 부터는 해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다는 크리스챤들도 마찬 가지입니다. 자기를 포기하기 까지는 아직도 멀었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느라고 하지만 얼마나 자신을 죽이고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를 높인다고 하지만, 얼마나 나의 명예보다 더 높이고 있습니까? 주께서 이후에 심판할 때, '이 불법을 행한자들아!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할 때가 있겠다고 하신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말이겠습니까? 바로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한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현대 신학자들이 하는 말 처럼,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스스로 구제 받을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구원은 일생동안 단 일회적인 순간의 믿음에서 뿐이란 말이 실감 있게 들려 집니다. 사실 우리가 믿는다! 믿는다! 하고 있지만, 아직도 여유를 가지고 있는 믿음인지 모릅니다. 아직도 자지를 포기하지 못하고 믿는 믿음이기에 주를 따라 사노라 하면서도 자존심을 위하여 얼굴을 붉히고, 복음 때문에 희생한다 하면서도 자기를 높이는 일에 도 좋아하는 그런 존재들이 아닐까?

 

저는 지난번 동구권과, 유럽,특히 영국을 방문해 보고 느낀 점은 초대교회의 스데반과 바울은 전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면서 복음을 위하여 자기를 다 받쳤는데, 그 중간에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드린 왕족들과 귀족들, 그리고 그런 시대에 복음을 위한답시고 나선 많은 상류층의 사람들이 정말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른 자들이었는지 생각해 보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에게 자문해 보군합니다.

 

과연 나는 저들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깊이 반성해 보군 합니다. 저들은 모두 예수 때문에 성공한 사람들이었고, 예수 이름으로 권세를 누리며 살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명예를 얻고 간 사람들이었음에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고 봅니다. 물론 그 중에는 알려지지 못한 그야말로 숨겨진 희생자들이 있었겠지만, 그러기에 천국에서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상이 예비 되었으리라고 봅니다.

 

이제 우리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구제불능한 인간이지만,'주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란 말에 한 없는 감사와 감격속에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은 죄의 종이지만, 주께 속한 자유인이란 말입니다. 주님만이 나를 궁극적 자유인으로 만들어주실 구세주란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광복 49주년을 맞으며, 궁극적 의미의 자유인은 주께 속한 자유인임을 깨달아, 그 은혜 속에 감격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끝.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