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열왕기

[왕하18;4] 놋뱀을 부수고

'코이네' 2016. 3. 12. 20:49

놋뱀을 부수고....

(왕하18:4)

 

 

나는 두 아이들의 아빤데 우리집 식구들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요. 내가 가장 먼저 일어나는 건 가 장 먼저 자빠져 자기 때문이고 다른 식구가 아침에 나 보다 늦게 깨는건 저녁 늦게 자빠져 자기 때문이지 뭐... 나는 애들 보다 먼저 마누라 보다 항상 먼저 일 어나서 시간이 되면 애들도 깨우고 마누라도 깨웁니 다. 그런데 깨울 때 마다 전쟁이예요. 왜냐? 이 녀석들 이 한 번 깨워서 일어나 본 적이 없거든, 두 번 세 번 깨워야 하고 그래도 안 일어나면 치미는 신경질을 간 신히 억누르면서(아침 부터 신경질 부리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을 테니까...) 아양을 떨어야 하고 간지르기도 하고 라디오를 천둥소리처럼 갑자기 크게 틀어서 온 집안에 난리를 일으키고 그래도 안일어 나면 정말로 화가 나는데 그렇다고 차마 다 큰 딸내미 젖꼭지를 비 틀수는 없겠고 할수없이 넙적다리를 콱 꼬집는게 나의 아침 일과중에 하나입니다. 나 이러구 살아요... 왜 애 들이 나를 안 닮았는지 몰라....

 

잠 속에 깊히 빠져있는 사람을 깨우려면 깨우는 사람 자신이 깨어 있어야 하죠. 깨우는 사람 자신이 이불속에 누워서 입으로만 "야, 일어나 시간 다 됐 어..." 하면 절대로 자는 사람을 깨울수가 없어요. 잠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을 깨우려면 그 덮고 있는 이불을 확 걷어 치우고 잡아 흔들고 귀찮게 하고 그래도 일어 나기를 싫어서 " 아이구 조금만 더... 딱 5분만 더... 응...?" 하는 놈의 낯짝에 사정없이 찬 물을 쫙 끼얹기 까지 해야 겨우 깨어나게 할 수가 있는 거죠.

 

니고데모...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소위 지 식계층에 속한 엘리트야.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율법 을 꽉 잡고 열심히 행하고 가르치는 바리새인이란 말 이지. 그러나 이 율법이라는게 육체의 예법일 뿐이요, 세상에 속한 법이요 외모만 치중하게 하고 사람의 경 험과 사고능력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모순을 안고 있어요. 율법으로 사람을 착하다 혹은 악하다 판단하 는 것은 순전히 보여진 외형, 행위에만 의존한다. 그래 서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모조리 율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자기의 율법이 기준이기 때문에 이 기준에 따르지 않는 다른 사람의 행동이란 항상 불 만스럽게 보이는 거다.

 

이러한 육신의 생각에 깊히 빠져있는 사람 니고 데모는 예수의 하시는 말씀 "사람이 영으로 거듭나야 한다" 는 의미를 알수가 없다. 어떻게 알수가 있겠어? 자기네 들이 꽉 잡고있다고 자부하는 땅의 일을 말해 도 알지를 못하는데 하늘의 일을 말하니 어떻게 알아? 모르는게 당연해. 거듭난다는게 뭐냐? 깨닫는거야 깨 닫는거... 땅의 일만 생각하고 땅의 일만 알던 사람들 (율법적인 사람들)이 하늘의 일을 알게 되는게 거듭난 다는 거다. 땅의 일이 최고인줄 알고 거기에 매달려 있던 사람들이 아하, 그게 아니구나 하나님의 일이라 는게 있구나... 이게 더 귀한거 로구나! 하는 것을 말한 다. 저 아프리카 토인들, 식인종들에게 컴퓨터가 뭔지 깨닫게 해 봐라,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라야 할까? 직접 해 보진 않았지만... 뭐 아프리카 까지도 갈 것 없어요. 나는 우리 마누라에게 컴퓨터를 가르쳐 주는걸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어요. 인간이 만 든 최고의 재밌는 장난감, 그 컴퓨터에 왜 관심조차 없는지 도대체 난 이해를 못하겠어... 마누라들은 다들 그런가? 애구....! 그런데 그거 보다 더 힘든게 땅의 일 육신의 일만 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깨닫 게 해 주는 거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워? 인간의 능 력으로는 완전히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일을 위해 예 수께서 오셔서 죽으시기 까지 하신거다. 이렇게 육신 의 생각에 깊이 빠져서 깨어나지 못하는 니고데모가 백성들을 깨우는 선생짓을 해 먹고 있으니 백성들이 깨어날 수 있겠어? 그래서 둘 다 구덩이에 삐질수 밖 에 없는 거구...

 

인류역사 수 천년이 지나는 동안 과학과 문화는 발전해 왔지만 인간의 영적수준은 조금도 발전되지 않 았어요. 사람들의 생각은 여전히 육의 생각, 육의 쾌 락, 육의 삶, 땅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더욱 더 악 해지고 범죄가 심해지고 타락의 심도는 더욱 깊어만 간다. 미국에 먼저 이민온 선배들의 말을 들으면 30년 전의 이 L.A는 지금의 L.A 보다 훨씬 평화스럽고 조 용했고 살만 했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갈 수록 더 어려워 지고 갈수록 더 더러워 지고 있어요. 왜 그럴까? 인간은 날 때 부터 율법적인 개념 즉 육신 의 법과 육신의 생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고 교육 과 훈련이라는 것도 육신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영생을 가르치기 위해서 십 자가의 사건을 언급하신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없 으면 결코 영생이 있을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건 데 이 십자가 사건을 묘사하기 위해서 민수기 21장의 불뱀과 놋뱀의 사건을 인용하신다.

 

애급에서 430 년 동안이나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 엘 백성들은 드디어 애급을 떠나게 되요. 바로왕과 애 급백성들을 10가지 재앙으로 속 시원하게 혼내주고 내 일 날이 밝으면 애급을 떠나게 된다는게 얼마나 신나 는 일인지... 그런데 이 애급을 떠나기 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하는 일이다. 이 피를 바르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도 죽음의 사자 가 방문할 것이요, 이 피를 바르면 애급백성이라고 해 도 죽음의 사자는 넘어간다. 그래서 이를 유월절이라 고 한다.

 

피는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구원의 절대적 요소이 다. 그래서 구원의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이냐 애급백 성이냐는 구원과 전혀 관계없다. 아무라도 좋은데 단 한가지 하나님이 보시기 원하시는 피를 소유하고 있느 냐의 여부가 기준이 된다. 그래서 이 피가 묻은 문설 주는 바로 구원의 문설주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 유월절의 피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는 거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구원의 문설주를 넘어서 드디어 홍해를 건너갔다. 애급 최 정예의 특수부대가 추격을 해 왔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눈 앞에서 몽땅 수장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백성들은 또 한 번의 구원을 실감 하고 애급의 병사들의 시체가 둥둥 떠 다니는 홍해의 건너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러나 그런 이스라엘 백성의 기쁨도 잠시 잠깐, 광야로 들어서자 마자 백성들은 온 갖 불평 불만, 시 기와 질투, 거역과 타락의 못된 성깔을 부린다. 바로 몇일전까지 애급의 종살이를 할 때, 그때도 그렇게 애 급인들에게 반항하고 거역하고 못되게 굴었을까? 아마 그때는 애급인들에게 그렇게 심하게 반항하지 못했을 꺼야. 아들을 낳으면 모두 죽이라는 명령에 (삼개월짜리 믿음) 찍 소리 한 번 못하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어쩌구 하 면서 눈물을 머금고 자기 친 아들을 죽이거나 당국에 신고하는 그런 비겁한 놈들이 하나님은 아주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야, 홍해를 건넌지 몇일이나 지났다구 엇따대구 성질이야 성질이...

 

바로 이렇게 하늘 무서운줄 모르고 성깔을 있는 데로 부리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킨게 불 뱀과 놋뱀 사건이다. 불뱀에 물려서 픽픽 죽어 나자빠 져 시체가 되는 백성들이 수두룩 했다. 백성들이 크게 당황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급히 구원요청을 했다. 이 때 제시된 하나님의 치료방법이 바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으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이 놋뱀을 보기만 하면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 사건 역시 예수의 십자가에 달리시는 사건을 예표한 것이며 누구든지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사역의 예표가 되는 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구원의 문제는 지금 우리 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거나 호락호락한게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홍해를 무사히 건 넘으로 죽음의 두번째 위협에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 고 이번엔 불뱀에 물려서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이다. 불뱀에 물려서 죽은 놈이나 홍해에 빠져 죽은 놈이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아서 죽은 놈이나 그 놈이 그 놈이라는게 문제다.

 

애급에서 피를 바르지 않아서 죽은 놈은 제일 악 질이고 홍해에서 죽은 놈은 쬐금 좋고 불뱀에 죽은 이 스라엘 백성 놈들은 불쌍하고 또 불뱀 때문에 죽지는 않았지만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하다가 죽은 애급출신 1세들은 아주 많이 불쌍한가? 그게 아니고 모두가 다 구원에 이르지 못한 똑같은 그렇구 그런 놈들이라는 거다. 왜 그런지 알어?

 

놋뱀을 보고 살아난 이스라엘 백성놈들이 한 짓 거리가 뭔지 아셔? 이 놋뱀을 우상으로 섬기는 거예 요. 이 놋뱀을 섬긴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민수기 21 장에서 만들어진 놋뱀을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도 죽은 뒤에도 계속 섬기고 사사시대가 지나고 통일 왕국시대 가 열리고 다윗왕 솔로몬왕을 거치는 동안에도 이 놋 뱀은 없어지지 않았고 히스기야때 까지 놋뱀에게 분향 하고 섬기다가 히스기야가 개혁을 단행하면서 이 놈에 놋뱀을 사정없이 박살을 낸다(왕하18:4). 율법책도 잃 어버리고(나중에 간신히 찾기는 했지만) 만나가 들어 있는 병도 어디갔는지 모르고 아론의 지팡이도 분실했 는데 그 놈에 놋뱀은 어떻게 된게 잃어 버리지도 않고 끈질기게 섬겨대는지...인간들은 왜 이럴까?

 

애급을 떠났으면 다시는 애급을 바라보지도 말고 홍해에서 구원을 받았으면 홍해에 미련을 버리고 홍해 를 과감히 떠나서 광야로 들어가야 하고 놋뱀으로 구 원을 받았으면 놋뱀을 팽개쳐야 하건만 백성들, 우리 인간들은 애급을 떠나기 싫어하고 홍해근처에서 텐트 치고 싶어하고 놋뱀도 버리기 싫어한다. 모세에게 향 한 백성들의 불평의 내용이 뭐지? 애급에 있을 때 고 깃가마 옆에서 참외와 수박과 부추를 먹었다는 거다. 이렇게 먹거리가 없는 광야에서 방황할 바에야 차라리 다시 노예신세라도 좋으니 애급에 되 돌아가고 싶다는 거지...

 

애급은 세상을 의미하고 광야는 세상으로 부터 구별된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간 쩔어 있었던 애급의 습관, 문화, 우상숭배사상, 노예근성...을 말끔히 씻어내 야 하는 과정이요 동시에 성장하도록 훈련과 징계를 받는 과정이다. 어린 양의 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으 면 거기서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 홍해를 건너서 광야 로 들어가야 한다. 광야는 먹을 것 마실 것이 없고 불 뱀과 독충들과 뜨거운 태양과 추운 밤이 교차되는 곳 으로 구름기둥 불기둥 그리고 만나와 반석의 물이라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 곳이다. 그래서 바로 이 광야생활은 백성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 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일상생활에 서 절감하는 최고의 기회를 누리는 거다. 이 후에야 비로써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복지로 가게되는 것이 고....

 

그런데 이 인간들은 도중에서 놋뱀을 섬기는 거 야. 즉 광야생활의 지겨운 훈련과정을 슬쩍 건너뛰어 서 편하게 복을 얻자는 거다. 바로 이 심보로 놋뱀을 섬긴다. 이스라엘이 놋뱀만 섬긴게 아니다. 무수히 많 은 우상들을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섬긴다. 육을 떠나 지 못하는 사람들이 육의 생각 육의 감각 육의 일에 사로잡히고 육에서 떠나지 못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변함없는 인간들의 모습이다.

 

예수의 피는 인간을 죄에서 구원한다. 그래서 그 피로 죄사함을 받은 자는 구원의 일차 관문을 통과했 다. 그렇다고 구원이 완성된게 결코 아니다. 이 세상 으로 부터 벗어나고 육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서 광야로 들어 가야한다. 그런데 이 광야는 정말 지나기가 힘들 어, 그렇지만 예수를 믿는다는게 그래서 힘든거야, 그 렇다고 불평하고 거역하면 불뱀을 만나서 기껏 예수의 피로 구원을 얻은게 아무짝에도 소용없게 될 위험이 얼마든지 있단 말야. 이 광야를 지나기가 싫어서 다시 육의 세계, 애급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무지무지 많이 있어요.

 

비록 육신적으로 애급에 되돌아가지는 않아도 광 야에서 놋뱀을 섬기는건 애급으로 돌아간거와 본질적 으로 다를바가 없는 거다. 그런데 봐라,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을... 밤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타고 김 포공항을 내려다 보라. 아래가 빠알게... 빨간 네온싸 인의 십자가가 수없이 많은 교회 지붕마다 빛나고 있 다. 십자가 사건이 구원의 필수인걸 누가 모르냐? 그 러나 십자가 밑에서 기도하고 십자가를 찬양하고 십자 가를 만들어서 교회지붕에 달고 목거리 귀거리로 달고 자동차 스티커로 붙이고 다니면 정말로 믿음이 있는건 가?

 

십계명에 도둑질 하지말라 해서 도둑질을 하면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간음하지 말라, 거짖증거하 지 말라고 해서 그런것들을 하면 않돼는 것으로 다 알 고 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해서 지키고 있고 부모를 섬겨라해서 부모를 섬겨야 하는 것쯤은 아무리 나이롱 이라고 해도 안다. 그런데 똑같은 십계명에 아무 형상 도 만들지 말라, 땅위 하늘에 있는 새의 형상, 땅에 있 는 짐승의 형상, 땅아래 물속에 있는 물고기의 형상, 해와 별의 아무 형상이라도 만들지 말라고 명했는데 왜 성경에서 시키지도 않은 짓, 저주의 형상인 십자가 는 죽자고 만들어서 교회에 붙이고 그도 모자라서 귀 에 목에 붙이고 다녀 다니길...

 

놋뱀을 섬기던 백성이 놋뱀만 섬긴게 아니구 바 알신 아스다롯신을 섬기고 사사 기드온이 만들었던 제 사장의 제복 '에봇' 을 음란하듯 섬겼고(삿8:26) 기타 무지 무지 많은 우상을 섬겼다.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우상제작으로 돈 벌어 먹고 산 사람이라 그러대... 예 수의 부친 요셉이 목수인데 그때의 목수란 바로 우상 제작도 포함된 직업을 말하지.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서 사역할 때 우상제작회사 사장들의 모함에 걸려 지 독한 고생을 했다(행19:24-41). 이런 인간의 악함과 어 리석음이 어딜가겠수? 이 습관이 여전히 변하지 않고 전해져 내려오는 꼬락서니를 지금도 본다. 오늘날 가 구를 생산하는 업자들, 비지니스의 사활을 걸고 시장 확장에 열들이 올라있는 판인데 그들의 눈에 '교회' 라 는 시장을 발견했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놋뱀없이 는 못사는 사람들이 교회에 여전히 많이 있다는 걸 포 착했다. 그걸 왜 그냥 두겠어? 적극적인 시장공략에 나서서 '성구' 라는 미명하에 수 백만원 수천만원을 홋 가하는 가지가지의 많은 놋뱀들을 만들어 팔아서 짭짤 한 재미를 보고 있는 중이다. 교회가 사당이냐, 교회 가 사당이야? 성구좋아하네... 이게 거듭난 거야 이 게...?

 

아무리 작은 교회에 들어가 봐, 그 안에는 반드시 삐까뻔쩍하는 큰 강대상이 모셔져 있고 그 위에 '나 는 거룩한 목사요...' 를 알리는 '종' 이 놓였고 당장이 라도 예수가 와서 앉을 것같은 느낌을 자아내도록 분 위기를 쥐어짜는 의자들이 거룩하게 모셔져 있고 그리 고 그 뒤에 십자가가 떡 버티고 있다. 아니, 이게 없으 면 큰 일나나? 이게 꼭 있어야 정통이야? 그리고 어떤 목회자는 이 강단이 거룩하대나 어ㅉ대나 하면서 평신 도는 강단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한다. 절에 부처가 모셔져 있는것과 다를바가 없다. 히스기야왕이 깬 사 람이야 깬 사람... 수 백년의 전통이 있는 놋뱀을 부셔 버리다니... 오늘 날 교회에서 십자가와 강단을 왕창 부셔버릴수 있는 용기있는 히스기야가 있을까? 미국교 회에 가보라, 벌써 그런 교회가 있다. 강단에 강대상 대신에 뭐가 있는지 알어? 성경책을 올려 놀 외다리 스탠드만 달랑 있다. 그 뒤에 십자가 대신에 드럼과 키보드 등 악기들이 있구.... 그리구 거룩한 강단위에 아무나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는게 아니고 아무나 올라 와서 찬양하고 춤을 추게하는 그런 깨어있는 교회가 일어나고 있다.

 

십자가는 구원의 완성이 아니다. 구원엔 완성이라 는게 도대체가 이 세상에선 있을수가 없다. 구원은 진 행형이지 완료형이 아니다. 구원을 날마다 이루어 나 가야 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힘써야 하는 거라고 바울 이 주장했고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구원을 준다고 성 경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다, 찾아 봐... 성막론을 잘 아 시겠지? 짐승의 피를 번제단에서 뿌리고 끝인가? 아니 지, 번제단을 지나서 물두멍으로 물두멍을 통과하여 성소로 성소에서 휘장을 열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과정 을 다 통과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거죠. 그 렇죠? 그러니까 십자가를 체험한 이후에는 말씀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말씀을 가지고 훈련과 징계와 교제가 기다리고 있는 광야로 들어가야 하고 이 광야를 지나 요단강,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여리고 성을 함락해야 하는 등 등의 갈 길이 수만리가 남았는데 여전히 고 자리에서 십자가만 붙들고 늘어 져...

 

또 있어... 십자가를 믿는지의 여부가 이단을 가려 내려는 잣대 쯤으로 알고들 있지만 이단들이 그렇게 머리가 나쁠까? 누구든지 십자가를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 정통성을 인정하고 형제자매로 불러주고 교단에 가입시켜 주는데 이 때문에 정통파들은 오히려 역이용 을 당한다. 애매모호한 이단들은 정통파속에 다 들어 있는거 아셔들...? 이런 '치' 들이 총회때만 되면 수천 수억씩 뿌려가면서 총회장 해 먹겠다고 기를 쓰는게 당연하지 않겠어...?

 

그러지들 말고 교회 지붕위에 십자가를 마음속으 로 옮겨라. 목과 귀에 늘어져 있는 악세사리 십자가를 마음 속에 모셔 들이라. 십자가의 도를 깨달아 알면 십자가의 형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안다. 물건은 쓸 수록 망가지고 사람은 오래 살수록 더러워 진다. 성구 혹은 성자가 될 수 없어요. 물건과 사람을 성구, 성자 로 둔갑시키는게 다 육의 일이요 세상의 일이다. 복음 을 알면 하나님의 일을 알게되고 모든 눈에 보이는 형 상과 종교적인 의식들과 형식이 중요한게 아닌 것을 알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을 모르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일에 치중을 하게 된다. 마음속에 는 육신의 생각만 가득히 들어 차 있으면서 교회 지붕 꼭대기와 강단에 있는 십자가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행위는 놋뱀에 불과하다. 관심은 온통 세상과 육신과 땅의 일로 향해 있으면서 목거리 귀거리 십자가로 장 식만 한다면 바알을 섬기고 아스다롯을 섬기는것과 다 를바 없다.

 

이 놈들아, 이제 그만 일어들 나라, 넓적다리를 콱 꼬집기 전에....

히스기야는 일어나라! 놋뱀을 부셔 버려라!!!

  (설교 : 강기원 목사)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