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테스트
창세기 22:1~14
설교 : 박조준 목사
오늘 저녁 읽은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 중에 하나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백 살에 얻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명령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청천벽력같은 이 명령에 주저하거나 반항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순종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출발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충격적인 것입니다. 백 살이지만 아들을 가지게 되었던 아브라함의 기쁨은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같은 아들이라도 젊었을 때 얻은 아들하고 나이가 많아서 얻은 아들하고 비교하면 나이 많아 얻은 아들이 늙은 아버지에게는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경우야 말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기쁨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으리 만큼 컸습니다. 왜냐 하면 그의 아들은 그의 미래였고, 그의 상속자였고, 하나님과의 계약에 대한 성취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모든 것이 그 하나의 아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주신 말씀에서 이런 부분을 읽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너무 엄청난 요구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요구를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번제는 나무를 밑에 쌓고 제물을 그 위에 올려놓고 밑에서 불을 지르면 그 나무가 타면서 제물이 모두 불타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산 거시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동안 어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이번은 마지막 테스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와 아버지 데라를 떠날 때 그의 과거와 그의 친척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잘라 버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장래를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약속을 믿고 순례자의 길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미래까지 파괴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니 말 문이 막힐 뿐입니다.
희생 제물이 드려져야 하는 곳은 3일 여행길을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바로 그 다음날 아브라함은 그의 가정의 젊은 두 사람과 어린 이삭을 데리고 여행길에 오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3일간의 여행길이 어떠했겠습니까? 몇 해 전에 제가 제 아들과 함께 전도 여행으로 미국 여러 곳을 다닌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여행하는 일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고 인상에 오래 남는 여행이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깊은 인간 관계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하고 사흘 길을 여행하는 것은 제가 제 아들하고 여행한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우리는 그들의 여행을 상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에게 이 새로운 상황 전개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을까요?
“여보!” 하고는 말 문을 열지 못하고 사라의 얼굴만 쳐다봅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해서 말을 하라고 재촉합니다.
“왜 그러세요.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무슨 말씀인데요, 여보?” 아브라함의 안색이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상태고 그 표정이 무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착잡해 있으면서 눈에는 눈물이 글썽 고여 있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여자들에게는 육감이라는 게 남자보다 예민하지 않습니까? “여보, 어서 말해 봐요? 당신이 저한테 숨기는 것이 있어요?” 하며 졸라댑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뭐라고 말했을까요? “여보, 우리 아들 이삭을 죽여야 해요.”라고 말하니 사라가 “아, 그러세요?”라고 대답했을까요? 아니면 “당신 미쳤어요? 나이가 들더니 아예 돌아 버렸군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계신 거에요?”라고 말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상상해 봅니다. 아브라함이 아무 말도 못하고 “내가 이삭하고 모리아에 다녀오겠소.”라고만 말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러 가겠다고 하는데 사라가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분위기가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하나님께 예배하러 간다는 아브라함에게 잘 다녀오라고 전송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길을 가면서도 그 마음이 말할 수 없이 복잡했습니다. “내가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사라가 이삭에 대해서 물으면 내가 한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만일에 이삭이 반항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도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때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해를 받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어느 정도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열심히 신앙 생활하며 교회 봉사를 할 때 남편이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고, 부모가 자녀를 이해 못하고 자녀가 부모를 몰라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에게서까지도 오해를 받습니다. 어려운 지역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나서는 사람에게 가까운 사람들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네게 원하는 것이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진정으로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오해를 받습니다. 그것은 일을 어렵게 합니다. 예수님도 똑 같은 경험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님의 선교를 방해하려 했고 이해 못할 일을 했습니다. 친척들은 예수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를 불러 세우고 “너는 집으로 돌아와 착한 유대 소년이 되어라. 유대교 회당에도 가고, 목공소에서 일도 하며 아버지 대신 네가 어머니에게 좋은 아들이 되어다오. 그렇게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행동일랑 중단하여라.”라고 호소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머니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고 그 가족에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친구인 아브라함은 3일 길을 걸으면서 종종 하나님께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아브라함이 길을 가는 도중 우리처럼 많은 의심을 품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메시지가 분명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려다 보니 “그 분이 실제로 내게 말씀하셨을까?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과 걸어가면서 아브라함은 재차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괴로워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내가 아들 이삭을 죽여야 합니까? 그것은 2-3일 전의 말씀이신데 혹시 제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닙니까? 다시 한번 더 똑똑하게 말씀해 주실 수 없으십니까? 하나님, 제가 그날 밤에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에 정신이 몽롱해 가지고 잘못 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한번만 더 말씀해 주시면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다시 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도 그런 경우를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 제게 무슨 표시를 좀 주십시오.” 하고 졸랐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무런 표시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3일 전에 그가 인도 받은 대로 모리아 땅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평생 기다렸던 사랑하는 아들과 이런 마지막 길이 되는 여행을 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이삭은 살아 있는 아들입니다. 이 아들과 무엇에 관해서 이야기하겠습니까? 혹시 아브라함은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던 때의 모험담이라든가 롯을 적으로부터 구출한 이야기를 말하면서 이삭을 즐겁게 해 주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 다시 아들 이삭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입니다. 저는 아브라함이 겪은 어려 가지 어려움이 있고, 시련이 있었지만 이번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전 생애 중에서 가장 힘든 시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테스트였습니다.
그들이 희생물을 드리는 장소에 도착하여 아브라함이 모든 제사 드릴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이삭이 “아버지, 제사 드릴 나무도 있고 불도 있는데 양은 어디 있어요?”라고 묻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제단 위에 나무를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그 위에 놓았을 때 아마 이삭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그를 말린 것은 그가 손을 들어 이삭을 죽이려 하는 바로 그때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손을 거둬라.” 얼마나 다급하게 들려왔는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칼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새로운 인도라고 부릅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는 새로운 계획을 가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중에 실패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장 위대한 자질 중의 하나는 하던 일도 그만둘 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에 계속 순응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시점에서 천사들이 “아브라함아, 멈추어라.”라고 말했을 때 여기에 응답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새로운 계획의 문이 열릴 때 그 자신의 문도 열었습니다.
가령, 아브라함이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인도함을 받았으니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일을 할 것이다.”라고 고집했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고집쟁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연했습니다
에릭 비엔스톡은 “이 아브라함의 유연함은 오늘 많은 훌륭한 지도자들 가운데 결여되어 있는 자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책 ‘중역실’(Board Room)에서 말하기를 “옳다는 것에 사로잡힌 경영자들은 사고의 엄격성을 초래합니다. 그것은 창조성을 질식시키고, 모험을 감행하지 못하게 하며 문제들에 대해서 사람들을 양극화시키며 낡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게 만듭니다. 자기 중심적이며 지위가 높은 아주 지적인 행정 간부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새로운 생각을 질식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역할을 합니다. 행정 간부들이 지적이고 유능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장점을 고려하지 않고 어떤 입장을 변호하곤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이와 꼭 같은 엄격성의 죄를 짓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로 합니다. 다른 말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위대함의 표시는 새로운 계획, 새로운 사상에 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00년 전 또는 10년 전에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지금도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런 변명 없이 새로운 방향을 직면하고 그곳을 향하여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의 생명은 구원받고 언약은 다시 세워집니다. 하나님은 게임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할는지 알지 못하셨습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의 완전한 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고, 그래서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지 못하십니다.
이 마지막 테스트 후에 천사는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아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믿음직스러움을 압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이 마지막 테스트의 결과로써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알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관해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왜 이러한 시험을 하시는지 그 이유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변두리에 계시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우리 삶의 중심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두 하나님께 집중시키는 예배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그가 인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것을 말하면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다시 말하면 아무런 미련 없이 버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생활 신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비교할 때 그의 생명과 그의 아들의 생명은 배설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 속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중심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는 유아를 희생물로 드리는 것이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특별한 시험을 하신 것은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돌 우상을 숭배하던 아브라함의 이웃들도 그들의 거짓 신들에게 그들의 아들과 딸을 희생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이웃들이 우상을 사랑했던 것만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했을까요?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기꺼이 그의 아들을 희생시키려 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마지막 테스트를 통과했습니다. 인생은 테스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시험을 치르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만 시험을 치는 것이 아니고, 직장에서 진급 시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용기가 테스트되고, 정직이 테스트됩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순례자의 길을 가는 동안 줄곧 시험을 받았습니다. 어떤 것은 통과했고, 어떤 것은 실패했습니다. 이 마지막 테스트는 궁극적인 테스트였고, 무엇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중심이 되기 원하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중심이 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목적일까요? 아니면 목적에 대한 수단일까요? 보세요.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를 따르라” 부르셨을 때도 위험이 있었습니다. 우선 그는 집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애굽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왕을 속이고 하나님은 그를 풀려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를 영화롭게 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마지막 테스트를 할 때까지 점점 더 많은 것으로 축복하십니다. 이 마지막 테스트 속에서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요구하십니다.
“네 삶에서 첫째 가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네게 준 것이냐? 아니면 나 자신이냐?”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꼭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테스트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테스트는 마지막 테스트입니다. 우리가 얻은 모든 것보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더 중요합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를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기를 원하십니다.
요한 웨슬레는 영국의 대부흥 운동에 선구적인 존재였습니다. 40년 동안 그는 말을 타고 대륙을 여행했고 매일 같이 하루 3-4시간 동안 광부들과 농부들, 그리고 영국의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불행한 결혼을 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폭력적이어서 어떤 때는 웨슬레의 머리채를 잡고 집 주위를 끌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에 머물러 있는 것보다 영국 전역을 설교하면서 다닌 것이 더 좋았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웨슬레의 열정적인 여행이 어려운 시험이었든 아니었든간에 하나님은 그를 통해 영국 전체를 변화시켰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기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가 받은 시험들 중 하나에 실패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나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몇 시간 안에 그 약속을 파기했습니다. 어떤 어린 하녀가 “당신은 그를 알지요?”라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나는 그를 본 적도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는 더 작은 시험에 실패했지만 그것이 베드로에게 있어서 마지막 테스트는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감정적으로 베드로는 그렇다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두번, 세번 물으셨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있어서 마지막 테스트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테스트에 통과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 주간에도 우리에게 유혹과 시험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 마지막 테스트가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고린도 전서 10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여러분, 우리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께로부터 테스트를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더 자라고, 깊어지고, 든든해지는 축복의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테스트를 받을 때, “아무개야, 됐다. 이젠 내가 네 믿음을 네 사랑을, 네 헌신을 알았다.” 하는 통과의 응답을 다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야고보 1장 12절에 주신 말씀처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하시는 말씀을 다 듣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by 코이네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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