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9:1] 중풍병자를 고친 예수님의 권세

'코이네' 2016. 1. 8. 22:28

중풍병자를 고친 예수님의 권세

본문 : 마9:1-13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신앙은 모든 형편과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기를 소원합니다. 일단 세상의 것을 소유하는 것이 힘이 아니고 진짜 힘은 하나님을 아는 것임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가 자신의 모든 삶속에서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한 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하나님 나라에 거하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이런 신앙을 만들어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성공적인 삶을 바뀌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식으로 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고통이 있었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고통 속에서 세상의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은즉 오직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겠다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와 알지 못한 자의 믿음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십니다. 그러나 본문은 병자를 고치신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이 예수님께 어떤 태도를 보였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속으로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참람하다는 것은 신을 모독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권리를 침해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바람과 바다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서기관들에게 죄용서를 받았느니라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은 둘 중에 쉬운 것을 골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둘 다 어렵다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이나 전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실려온 사람에게, 그것도 자기의 믿음으로 온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믿음 때문에 오게 된 처지인데 그 사람이 일어나서 걸어가게 되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중풍병자 자신에게 어떤 가능성이 있어서 일어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죄사함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가게 되는 것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중풍병자를 일어나서 걸어가게 한다면 그 분은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도 있다는 것을 믿어라는 얘기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내가 누구냐’를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권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세라는 것은 우리가 요구해서, 우리의 정성과 노력을 보시고 그것이 가상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편에서 예수님의 권리로 예수님 마음대로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죄사함도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권세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권세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들의 제사, 십일조, 금식 등 종교 행위가 자신들은 신자되게 하고, 복을 받게 하는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안다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 소망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머지 모든 것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권세로 우리에게 일하실 분입니다.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 앞에서는 순종하는 것 같이 우리의 모든 것도 주님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권세를 인정하는 것은 결국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나머지는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걱정, 근심, 낙심들은 모두 예수님의 권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람과 바다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알고 믿는다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권세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 있는 그 자체를 가지고 기독교는 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복에 눈을 뜨지 못했습니까? 중풍병자 같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움직이지도 못한 그런 처지에 있던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다면 이것은 놀라운 주님의 권세 안에 내가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과 염려는 다 버려라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런 기독교에는 절대로 힘을 구축하기 위하여 신을 찾는 모습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왜 신을 찾습니까? 오늘도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습니까? 그냥 예수님만으로, 예수님만으로 모든 것을 만족한다는 그런 믿음에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권세에 의해서 신자되었고, 예수님의 권세에 의해서 죄사함 받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나에게 소중한 것이 아니고 목적도 아니며 오직 주님 안에서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며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제자 편에 서 있는지 바리새인과 서기관 편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