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도
마 9:35-38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신자라면 자기의 뜻대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일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가장 많이 실수하고, 또 가장 많이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하나님은 무조건 환영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이니까, 목사가 하라고 하는 일이니까, 기독교와 연관된 일이니까(물론 진짜 기독교는 아니지만)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결론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반대하거나 협조하지 않은 사람은 자연히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요,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들은 이 일이 성경적인가, 아닌가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단지 교회에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무조건 하나님의 일로 간주하고 거기에 복종해야 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전도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도를 위해서 힘쓰는 신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부르셔서 추수를 위해서 보내시는 내용입니다. 먼저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12제자를 부르셨느냐 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쉽게 전도를 위해서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도록 하기 위해서 12제자를 불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런 의문이 있습니다. 12제자를 부르신 것이 단지 우리가 생각하는 전도를 위해서라면 왜 하필 12명이냐는 것입니다. 좀 더 많은 수의 제자를 부르셔서 빠른 시간에 많은 사람을 예수 믿도록 하면 더 효율적일 것인데 무엇 때문에 열 둘이라는 적은 수를 택하셨는가라는 의문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모두가 아무 생각없이 하신 일이 아니라 예수님 편에서의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를 굳이 열 둘이라는 숫자로 부르신 것도 이유가 있으며, 그 제자를 어딘가에 보내시는 것도 예수님 편에서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마음에 맞는 전도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37절과 38절을 보면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금은 추수할 때인데 추수할 일군이 없으니까 너희가 추수하는 주인, 즉 하나님께 청해서 일군을 보내어 달라고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그대로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지금 추수할 일군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일군을 위해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제자들은 일군이 아니라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일군을 달라고 하라 해놓고 그 제자들을 부르셔서 보내십니다. 결국 일군으로 보낼 자들에게 추수할 일군을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청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바로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추수할 일군을 위해서 하나님께 청하라는 말씀을 먼저 하십니까? 그 이유는 추수할 일군은, 현재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군이 적은 것에 대한 애타는 마음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군이 할 일은 추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개념을 깨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도를 내가 씨를 뿌려서 내가 거두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내편에서 상대방을 설득하여 교회로 오게 하는 것으로 목적을 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단지 한사람을 교회인 만드는 것이고, 내 교회의 숫자가 한 사람 늘어난 것 외에는 그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전도는 내가 뿌려서 거두는 것이 아닙니다. 뿌리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단지 그 뿌려진 것을 거두는 일에 부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추수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10:1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실 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권능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이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추수할 일군의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주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합니다. 왜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까? 8:17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 즉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후에 곧 병자를 고치신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우리에게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선포하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이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병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질병에 붙들린 자, 즉 저주에 붙들린 자이지만 예수님의 긍휼 하심을 입어서 구원받았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병고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셔서 예수님과 똑같이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게 하는 것은 제자들을 통해서 세상은 저주 아래 있고, 자신의 선함과 양심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죄인’이라는 것을 산상수훈을 통해서 알게 함으로, 결국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요,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 누구의 긍휼도 사랑도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그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이라고 하십니다(36절). 자신의 죄인 됨을 모르고, 예수님의 사랑도, 긍휼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던 그들은 목자없이 유리하는 그런 신세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 스스로는 자신을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분명히 하나님이라는 목자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자는 자기들의 전통과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진 목자였지 참된 목자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여러분은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자신이 목자 없이 유리하는 양의 모습이 아닌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이제 더 이상 죄를 용서받는 긍휼과 사랑보다는 세상 것을 누리고 복을 받는 사랑 아닌 사랑을 원하는 그런 내가 아닌지를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자없이 유리하는 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참된 목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양을 위해서 대신 희생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아는 양은, 자신이 목자없이 유리하는 양인 것을 발견한 양은 이 참된 목자를 따를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이 할 일은 ‘너희들은 목자없이 유리하는 양’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신앙이 있고,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말씀에 순종한다고 떠들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참된 목자를 따라가는 것이 아님을 산상수훈을 통해서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목자가 없다. 너희는 유리하는 양이다. 여기 너희를 대신해 희생하신 참된 목자가 있다. 긍휼과 자비로서 오신 목자가 있다. 이 목자를 따라 오라’고 선포하는 것이 제자들의 할 일이고 이것이 곧 전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습니다. 5절, 6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데나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라면 사람이 있는 곳은 다 가야 마땅한데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라는 말씀을 하십니까? 예수님은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참된 목자를 원하는 자를 찾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자라고 하고, 예수님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긍휼과 사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을 살리는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은 사람들에게 외면 당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에게 세상의 복아닌 복을 주는 거짓 목자의 사랑에 목말라 하고 있는 것이 지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리신 그 이유를 모릅니다.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을 무시해 버립니다.
예수님은 목자없이 유리하는 잃어버린 양을 찾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잃어버린 양의 모습으로 주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지금까지 주님의 긍휼과 사랑보다는 세상을 더 원했던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고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죄 때문에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꼭 필요하다고 간절해 하는 사람에게만 목자입니다.
보냄 받은 제자들의 할 일은 천국 복음을 그대로 전파해서 잃은 양을 찾는 것입니다. 설득하는 것도 아니요, 예수님을 믿겠다고 작정하고 교회 나오는 사람을 모으는 것도 아닙니다. 철저하게 천국 복음, 즉 모두가 죄 아래 있음을 선포하고 복음은 우리를 세상에서 잘 살게 하고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떠나도록 하고, 많은 어려움이 있게 한다는 것을 선포해서 예수님을 목자로 영접하면 그 자가 곧 잃어버린 양이고 거절할 때 그 자는 구원과 상관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14절).
전도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제공해서 교회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파함으로 ‘당신은 죄인이고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아니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전도는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에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15절). 세상에 두고 있는 희망을 끊도록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이 아니고, 교회 부흥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 만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곧 전도입니다. 예수님은 그 말을 듣지 않거든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합니다. 미련둘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열 둘인 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 땅에 보내신 예수라는 참된 목자를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열 두 제자를 보내시는 일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이고, 참된 복음 아래서 자신이 잃어버린 양임을 알고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를 기대하며 나오는 자를 하나님은 새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여기시는 것입니다.
by 코이네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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