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자료

방언의 은사 어떻게 봐야 하는가? / 이동원 목사

'코이네' 2015. 12. 2. 14:27

방언에 대하여

 

방언문제를 둘러싸고 신학자들 가운데도 신랄한 논쟁이 있습니다. 방언이 하난가 둘인가.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 두가지 유형이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한가지가 아니라 두가지로 보여지는데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 전서 14장의 방언은 좀 다르지 않은가 보여집니다.

 

사도행전의 방언. 2장의 방언은 외국어입니다. language예요.

 

그들이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연구해 보면 여러 지역에서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모르는 말이 자기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들어왔고 베드로가 설교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음에도 알아들었다는거죠. 그것이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방언이예요.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언어입니다. 구체적 외국어예요. 우린 이따금 선교역사에서 그런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선교사나 혹은 전도자가 다른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답답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데 갑자기 자기 입에서 자기도 모르는 말이 나오는데 거기 앉아 있는 사람은 자기들의 언어로 정확히 알아들었다. 이런 기적들을 종종 볼 수 있어요. 이런 방언. 이것은 분명한 외국어의 방언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 14장의 방언은 그런 외국어 방언이 아니고 이것은 흔히 영음 방언이다. 라고 불리워집니다.

 

왜 이런 표현을 썼냐면 14장 14절을 보면 내가 만약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래서 바울은 두가지 종류의 기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하는 기도, 영으로 하는 기도.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그냥 내 이성적 머리와 상식과 언어로 하는 보통 기도. 마음으로 하는기도...그러나 여기서 또다른 기도가 있는데 방언기도. 이것은 나의 영으로 기도한다..성령으로 말미암은 기도다. 그래서 흔히 이것을 영음방언 이렇게 표현을 하지요. 영음방언. 영으로 드리는 기도다.

 

그것이 14장 2절에서는 이런 방언의 특성을 2가지 특성으로 말합니다. 2절에 보시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합니까 하나님께 합니까 하나님께 합니다. 방언은 기도다 이 말이예요. 방언은 기도고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기도다. 그것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또 이런 영음 방언의 또 하나의 특성은 2절에 보면 알아 듣는다고 했어요 못알아 듣는다고 했어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알아듣지 못하는게 정상이다. 지나가다 보면 방언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못알아 듣는단 말이죠. 그렇다고 내가 못알아 듣는다고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게 정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방언하는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것을 기도의 유익이라고 하지요. 자기의 깊은 것을 사람들 앞에 영으로 비밀을 말하기 때문에 자기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 쏟아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방언의 유익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14장에서 방언을 예언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은 대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절 같이 읽어요.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고 안위하는 것이요. 어떤 의미에서 대조입니까. 방언은 누구에게 합니까 하나님.. 예언은 누구에게 합니까 예언은 사람에게 하는 거예요 예언이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사람에게 한다. 대상이 달라요 아까 방언은 알아듣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예언은 어떨까요 알아듣지요 알아들으니까 알아듣는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그래서 그것은 덕을 세운다 권면한다 안위한다 위로한다. 권면하고 때론 위로하고 때론 꾸짖고 책망할 수 있다. 권면한다..그래서 유익을 가져온다.

 

자, 방언이 전혀 무익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방언을 부인하거나 무익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4절에 보세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운다. 방언은 주로 기도의 영역이고 자기와 하나님 사이 일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굉장히 도움이 되나 알아듣는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도움이 안되다. 교회는 덕이 안된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5절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5절 읽습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방언이 이웃들에게도 유익이 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요? 통역하면 돼요. 그러니까 스스로 통역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통역하는 은사가 있어서 대신 통역해줌으로서 그 메시지를 듣게되는 경우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라는 얘깁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가 개인적인 기도시간에는 방언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 좋지만,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고 그렇게 해야겠지만 예배를 위해 모였을 때는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절제하는 것이 교회와 하나님 앞에 유익이다. 그런 얘깁니다. 그래서 은사는 예배의 덕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하고 예배 공동체인 교회의 덕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이 1절부터 5절까지의 가르침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 4장의 두 번째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는 예배에서 이해될 수 있게 전달되어야 한다. 은사가 예배의 장에서 사용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이해될 수 있는 방법으로 전달되어야겠다. 그래야 우리모두가 유익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다.예배는 공동체의 축제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축복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은사는 예배에서 이해될 수 있도록 전달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다시한번 6절에서 또 방언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6절 읽겠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오"

 

바울이 만약 내가 방언만 하고 다른 것을 안한다 방언만 하고 끝났다 그리고 계시가 없고 지식,예언, 가르치는 것이 없었다. 말을 아무것도 안했다면 나 혼자 방언하고 말고 내 말을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면 여러분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바울은 분명히 방언을 말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증거가 있지요?

18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방언을 못하는 사람이 방언하지 말라고 그러면 지가 못하니까 그렇게 얘기 하겠지만 바울은 뭐예요. 방언을 하면서도 방언의 은사를 절제하라, 특히 공동체 예배에서는 사용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6절을 보면 방언하고 지식, 예언, 가르침, 말. 지식, 예언, 가르침, 말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이 뭐예요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알아들을 수가 있다. 구체적인 언어의 표현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것이 계시이든 가르침이든 선포하는 예언이든 가르쳐 알아내는 지식이든 알아들을 수 있도록 표현되는 것이다. 표현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그러나 방언의 문제점은 통역없이 사용되는 경우에는 그것이 표현되지 않고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유익이 없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표현의 중요성. 3가지 케이스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7절 이하에 보면 "혹 저나 거문고 같이 생명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 그 음에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것이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오."

 

악기를 예로 듭니다. 악기가 소리가 희미하면 올겐인지 피아노인지 피린지 알 수 없단 말이죠. 피리는 피리의 독특한 소리가 있고 피아노는 피아노의 독특한 소리가 있습니다. 자기소리 가지고 표현을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때는 악기 타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어요. 음악사는 자기 악기를 통해 표현을 하는 겁니다. 또 두 번째 실례. 특별히 그 중에서도 나팔의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8절."만약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준비하리오."

 

 나팔에도 요즘 우리가 신명기, 새벽기도에 공부하고 있는데 용도가 여러 가지 있었죠. 전쟁도 있고 소집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밥먹으라는 나팔도 있고 나팔의 용도가 많습니다. 전쟁이 날 때 특별한 나팔의 소리가 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분명한 소리를 내서 듣는 사람들이 준비해야겠구나.. 그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죠. 세 번째 실례는 뭡니까.

 

그 다음절 "이와같이 너희도 혀로서....."

 

이번에는 일상 대화의 예로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대화자가 대화하는 상대방이 분명히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겠느냐 저는 그 신학교 다니는 후배들이나 이런 사람들과 혹은 신학교 갈까말까 목사 될까말까 하는 사람들에게 표현력이 없으면 제발 되지 말라고 말립니다.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인데 제대로 표현을 해야지 혼자만 웅얼거리면 곤란하죠. 대화에 있어 표현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 악기이든 나팔이든 대화자이든 일상적 대화 이든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뭐가 중요하죠? 정확한 전달이 중요합니다. 정확히 전달될 때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 있고 의미를 느끼고 또 유익함이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13절 다시 방언의 예를 들고 있는데요 13절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는 자는 통역할 것을 기도할지니 "

 

만약 내가 방언의 은사가 있고 통역의 은사가 없다면 기도하라. 그러면 내가 방언을 통해 이런 기도를 하고 있구나 스스로 안다면 좋죠. 또 누구를 위해 기도할 때 통역까지 할 수 있다면 분명히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제 아내를 보니 통역 스스로 하더라구요 방언하며 통역하고 스스로 전달될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단 말이지요

 

19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

 

이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계속적인 강조. 그 초점이 분명합니다. 초점이 뭡니까. 전달되어야 한다. 표현되어야 한다. 은사들이 예배의 장에서 사용될 때는 반드시 이해될 수 있는 방법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유익하지 못한다. 방언이 기도의 유익. 유익이 있지만 방언이 또 하나 불신자들에게도 유익이 있을 수 있는 측면이 또 하나 있다고 생각됩니다. 계속 읽어보면 또 하나의 유익을 말하고 있습니다.

 

22절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의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때때로 방언은 불신자들에게 표적이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표적이 될 수도 있어요. 저 사람 분명히 말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말이 나올까 저걸 보니 분명히 하나님 살아 계시는구나. 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방언을 보고 다 예수 믿는 건 아니예요. 그렇다고 해서 방언하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보고 오라고 내가 하나님 살아계신거 보여준다고 방언을 하면 어 정말 뭔가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 하나 이렇게 오는 반응도 있어요.

 

23절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나 믿지 않는 자가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고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두가지 가능성이 다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때와 장소를 가려서 상대방을 보고 해야지 방언을 딱 했는데 남편보고 내가 방언 받았어. 하나님 살아계신걸 보여줄게 하고 방언을 했어요. 그리고 남편이 어떻게 나올까요 아..하나님 살아계셔 하는 사람도 있지만 미쳤구나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참 성경이 균형이 있어요. 저는 진시는 균형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까 서론에서 이론적 기독교와 감성적 기독교. 머리의 기독교와 가슴의 기독교가 있다고 했는데 진리는 어떤게 진리일까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해요. 한쪽으로 너무 빠지면 안돼요. 저는 우리 교회에서는 머리와 가슴이 잘 조화된 신앙. 이것이 바람직한 건강한 모습의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극으로 가지 마세요. 너무 극단으로 가지 마세요.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