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역대기

[역대하32장] 신자의 천로역정 / 김창인 목사

'코이네' 2015. 7. 31. 23:10

신자의 천로역정(역대하 32: 20-33)

 

예기할 때 쓰는 글자이고, '程'은 '하나의 과정'이란 뜻입니다. 한 마디로 알기 쉽게 설명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하늘 나라 가는 길에 밟아 가야 할 과정이 무어냐 그런 말이 되겠습니다. 천로역정이라 하는 말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말입니다.

 

 

성도들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는 유명한 영국의 작가 존 번연의 '천로역정'인즉, 예수 믿는 어떤 사람이 장망성을 떠납니다. 장차 망할 성을 떠나는데 가족들과, 친구, 친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떠납니다. 떠나서 미궁이라 하는 곳에 가서 헤매기도 합니다. 온갖 유혹을 다 받아 가면서 그 다음에는 사망의 골짜기도 지나고, 허영이라는 도시- 즉 이 소설에서 사람은 허영에 들떠서 살아가는 일이 많다는 것. 예수 믿는 사람도 허영에 들떠서 살아가는 일이 많음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도시-를 거치면서 온갖 유혹, 시련, 고난을 겪은 끝에 마지막에는 천성에 이른다는 내용입니다. 많은 감동과 교훈을 주는 소설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천국에 가려면 이렇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어떤 과정을 어떻게 거쳐야 하는지 본문 중심으로 하나하나 알아보겠습니다.

 

 

I. 기도의 천로역정(20-23절)

 

 

1. 승리의 기도(20-21절)

 

 

기도로 승리한 말씀입니다.

 

 

앗수르왕 산헤립이 유대 나라를 쳐들어와 예루살렘 성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군대가 십팔만 명이 넘는 군대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포기하고 사자들을 보내서 얼마나 위협과 멸시를 하는지,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이 차마 듣지 못할 얘기, 히스기야 왕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온갖 수모를 다 당합니다. 그러나 나가 대항할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자를 통해서 편지를 보내왔는데 사실상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편지를 받아든 히스기야 왕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모욕, 자신에 대한 능멸, 백성을 경멸하는 내용의 편지, 이 편지를 들고 성전으로 달려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매어 달립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날밤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군대 십팔만 오천명을 전멸시키십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큰소리 치던 산헤립이 수치를 당하고 자기 고국으로 도망갑니다.

 

 

산헤립의 생각에 '히스기야왕이 자기 신에게 기도하여 그 신의 도움을 받아 이렇게 승리를 했으니 나도 내 신에게 가서 기도하겠다'하고 자기의 신당에 가서 엎드려 기도하고 있을 때, 자기 몸에서 난 자들 즉 자기 아들들이 와서 그를 찔러 죽이고 맙니다. 그리고는 자기네들이 왕이 되었습니다. 손 하나 대지 않았는데 앗수르 왕 산헤립은 멸망했습니다.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니 천사가 나타나 해결해 준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하나의 도구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 기도할 시간이 있으면 나가 일 해야지 하며 기도하는 시간은 아깝게 생각하고 기도할 시간을 빼앗아 오히려 일 하려고 합니다. 기도보다 일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만에 말씀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최소한의 시간에 최대한의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이.엠.바운즈라 하는 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는 것이다" 오즈왈드 스미스 목사도 그런 뜻의 얘기를 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놓으면 기도 시간에 하나님이 내 일을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쁠수록 기도 시간이 길어져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에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즉 기도로 승리한 것입니다.

 

 

2. 보호의 기도(22절)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의 대군을 무리치사 구원해 주신 다음에도, 이웃의 다른 모든 나라들이 자꾸 이스라엘을 침략했지만, 그 때마다 구원해 주신 다음 사면으로 막아 보호를 해주셨다는 것이요, 이것은 기도를 통해서 얻은 승리 후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계속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아이를 낳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기는 낳았는데 아이를 낳아서 버려 보십시오. 부모가 보호를 안 해 주고 키워 주지 않으면 차라리 안 낳는 것이 낫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안 태어나는 것이 낫지요. 하나님이 앗수르와 적국에서 구원만 해주고 '난 끝났다 난 너 모른다'하고 하나님께서 버렸다고 하면 그 다음 일이 어떻게 되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나라를 구원해 주시고 계속 보호해 주시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보호해 주신다는 것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그렇게 귀합니다. 하나님이 보호 안 해주는데 내 재산, 내 건강, 내 믿음, 지킬 방법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지켜 주실 때 안전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호하사 평안을 허락해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존대하게 하는 기도(23절)

 

 

여기 보니 기도한 결과로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너무너무 크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얘기하면 히스기야가 저렇게 위대해진 것은 기도한 후에, 하나님이 되게 해 주시니 되었다는 말입니다. 앗수르 왕의 대군을 물리치고 적국이라는 적국은 다 물리치고 나서 모든 사람들이 보물, 자기 집에 숨겨 놓았던 것을 다 가지고 나와 히스기야 앞에 내어놓고, 그 다음에는 이웃에 있는 나라 왕들이 히스기야 왕을 바라볼 때, 히스기야왕을 대항했다가는 망할 줄로 알고 두려워하게 됐습니다. 히스기야가 그렇게 크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대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토리 목사님은 아주 유명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토리라고 하는 사람이, 미국을 비롯해서 전 세계에 한 번 공황이 굉장히 크게 일어났을 때에, 정말 굶어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어려웠을 때 태어나 소년기를 지냈습니다. 공황이 조금 벗어나게 되면서 어머니가 독실하게 믿음 생활을 훈련 시켰습니다. '성경 봐라, 기도해라, 주일학교 가라' 하면서 강요하는 것이 그만 싫어서 곁길로 나가더니 그만 '나는 집을 나가겠다 정말 내 소신껏 살아보겠다'고 했습니다. 자꾸 나가겠다는 아들 녀석을 어떻게 할 것입니다. '가긴 가라. 그러나 내가 너 돌아 올 때까지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네가 벽에 부딪힐 때마다 반드시 어머니의 하나님을 꼭 찾아라.' 그 말을 들려주는데 그 말이 귀에 들어올리 만무하였습니다. 큰 뜻을 품었고, 어머니의 믿음의 강요가 귀찮다고 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다 자기의 뜻대로 됩니까? 안됩니다. 술 먹기 시작하고 크게 방탕해지기 시작하고 나중에 타락해 버리고, 일터가 있어도 일감을 안 찾습니다. 고생 고생 너무 어렵고 힘이 드니 견디지 못하고, 세상 만사가 다 자기에게는 끝장이다 생각하고, 모텔에 들어가서 이제는 죽으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는 모텔마다 성경이 놓여 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에 어머니 생각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네가 벽에 부딪히는 날 기도해라.' 어머니 부탁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내 어머니의 하나님이 계시면, 내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이 계시면 내게 응답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마음 속으로 응답이 오기를 뭐가 걱정이냐 네 어머니한테 돌아가지 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밤새도록 기도한 다음 아침에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어머니는 참으로 반갑게 아들을 맞으며 말합니다. "네가 돌아오기를 내가 늘 기도하고 있었다. 꼭 돌아올 줄 알았다"라고. 그때부터 그 사람이 마음 잡고 대학교를 가고 신학교를 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지 성령의 은사라는 은사는 몽땅 다 체험합니다. 토리 박사의 성령 은사 체험에 대한 간증은 참 들어볼 만한 것이고 너무 유명한 것입니다. 그 분은 기도로써 평생 목회 잘하고 성공하고 너무 유명한 목사로 알려져 심히 존대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렇게 형편없던, 그렇게 방탕했고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던 그 젊은 사람이 어머니의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자신의 회개 기도를 통해서 그렇게 존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면 기도가 나를 존대하게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남편이 휼륭해지기를 바랍니까? 아들딸들이 잘 되기를 바랍니까? 훌륭한 사람의 뒤에는 아내의 기도가 있든지 어머니의 기도가 있든지 꼭 있는 법입니다. 이 기도의 과정이 우리가 하늘 나라 가기까지 곡 있어야 할 과정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II. 회개의 천로역정(24-31절)

 

 

1. 건강하게 한 회개(24-26절)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이사야서 38장에 보면 본문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한 기록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히스키야 왕에게 보냈습니다. '정리 할 것 다 정리하고, 자손들에게 유언하라.' 말하고는 선지자는 떠나 버렸습니다. 그럴 때에 히스기야왕이 벽을 향해서 기도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벽에 부딪혔다는 뜻입니다. 살아 나가다가 담벽에 부딪히듯이 갈 곳이 꽉 막혀 버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히스기야처럼 눈물로 기도하는 길밖에는 없다는 뜻입니다. 히스기야가 눈물로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그 성읍도 다 지나가기 전인 이사야 선지자에게, 다시 명령을 내렸습니다.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삼일만에 건강 회복해서 성전에 가서 예배드릴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 왕이 그 말씀 믿을 만한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해 그림자가 앞으로 나가는 것은 쉬운데 뒤로 물러나는 것은 어려우니 뒤로 물러나게 해보라고 했습니다. 당장에 물러나가는 것을 보여 주고 그리고 삼 일만에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완전히 회복한 것입니다. 본문은 죽을병에 들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고 또 기적을 보이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병 고침 받고 은혜를 받았으면 그가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고 더 충성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교만해졌습니다. 은혜란 은혜는 모두 받고 자기 혼자 하나님 잘 믿는다고 하던 그가 그만 믿음의 교만에 빠졌습니다. 교만 교만해도 돈푼이나 가졌다고 하는 부자의 교만, 글 좀 배웠다고 하는 지식의 교만보다 제일 무서운 것이 믿음의 교만입니다. 혼자 잘 믿는다고 다른 사람 없신여기는 교만, 제일 무서운 교만입니다. 히스기야가 그만 이런 교만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눈에 보이는 듯 했습니다. 다행히도 히스기야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교만을 뉘우치니 그 진노를 하나님께서 다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가 죽을 뻔한 것입니다. 즉 그가 병들어 죽을 뻔한 것입니다. 회개함으로 그가 건강해졌습니다. 우리가 병이라는 것을 죄로만 결말을 연결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나의 병을 통해서 나를 구원할 경우도 있고 내 죄 값으로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히스기야는 처음에 병들었을 때는 죽을병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로 건강함을 얻은 것입니다. 그것은 죄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보니 교만의 죄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 때 회개하고 나니 건강을 다시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날마다 짓는 죄에서 회개를 통해서 늘 건강을 지켜 나갈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 부요하게 하는 회개(27-29절)

 

 

회개한 히스기야에게 하나님께서 어마어마한 부귀 영화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성도는 물질적 부요함 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더 중하고 귀한 영적 부요함을 추구하는 믿음과 은혜가 필요합니다.

 

 

일본의 북해도 지방에 처음 교회를 개척하고 성공한 유명한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그가 젊었을 때 좀 편하게 사는 방법이 없을까? 쉽게 사는 방법이 무엇일까? 궁리하다가 다른 사람과 반대의 생활을 해 보기로 했습니다. 낮에는 실컷 자고 밤에는 일하고, 그러나 뚜렷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별수 있습니까? 밤에 할 일 찾은 것이 결국 남의 물건 훔치는 도둑질 밖에....... 정신 없이 일(?)한 어느 날 훔쳐 온 물건을 살펴보니 오버코트 하나와 낡은 책 한 권이 전부였습니다. 헌책 팔아야 값도 안나가기에 구석에 던져두고 오버코드 팔아 하루 살고...이렇게 방탕하게 살던 어느 날 심심하고 답답해 무심코 방구석에 던져진 책을 잃어나갑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삶을 뉘우치고, 깨닫고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 책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책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목사가 되고 결혼을 합니다.

 

 

목사의 아내가 남편 책상을 정리하다 보니 낯익은 성경책이 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소중히 여기며 읽고 은혜 받던 자기의 성경책, 어느 날 오버코트와 함께 도둑맞은 성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둑 맞은 그 날부터 "얼마나 어렵고 힘들면 이런 일 했을까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성경 읽고 회개하여 예수 믿게 해 주세요"라고 하루도 빠짐없이 자기 물건 가져간 자를 위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 도둑이 자기 남편이 되고 기도가 이루어져 목사가 된 것이지요.

 

 

그렇게 도둑으로 살다가 도둑으로 죽어야 될 그가 회개함으로 받은 그 생의 풍요로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아셔야 됩니다. 그 목사가 뭐 물질적으로 풍요하단 말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얼마나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까? 성공적이고 승리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얻어진 영육간의 부요이며 축복입니다. 히스기야와 같은 복을 받았습니다.

 

 

3. 형통하게 하는 회개(30절)

 

 

히스기야가 기혼 즉 기드론 골짜기 한 모퉁이에서 흐르는 샘물을 막아 다윗성 서편으로 물줄기는 곧게 한 결과로 물을 풍부히 얻어서 예루살렘 백성들이 먹고 쓰는데 불편 없도록 함으로써, 물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형통입니다. 지금 물 문제에 직면되어서 이것 때문에 난리가 날 지경인데 물줄기를 내고 길을 만들어 해결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일에 이와 같이 회개하는 사람에게만 형통이 있다는 것, 죄를 그대로 두고는 불통한다는 것, 통하지 않고 풀리지 않을 문제도 죄를 회개하게 되면 반드시 형통하고 풀리고 길이 열린다는 바로 그 말씀입니다.

 

 

III. 죽음의 천로역정(32-33절)

 

 

1.선한 일 많이 하고 난 뒤의 죽음(32절)

 

 

모든 사람에게는 죽음의 과정이 있습니다. 죽음의 역정,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하늘 나라 가는 데 반드시 죽음이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야지 죽음이라는 과정 없이 하늘 나라 가는 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살았느냐? 입니다.

 

 

선한 일은 하나도 안 하고서 죽으면, 비석 앞에다 학사 아무 아무개라고 만 기록됩니다. 나는 처음에 그 비석 앞에 배울 '학' 선비'사'자 새겨놓고 학사 아무 아무개라고 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굉장히 공부 많이 했던 사람인가보다고 생각했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먹다 죽다 바로 그 말이랍니다. 한 일 아무것도 없어서 먹은 일밖에 없고 죽은 것 밖에 없다는 소리가 학사랍니다. 세상에 먹다 죽다 가 내 일생의 전부라면 어떻게 합니까? 선한 일 많이 하고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선한 일의 표준은 무엇입니까? 수재의연금을 조금 낸 것이라면 그것은 믿지 않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수재의연금 일 억을 바치든 십억을 바치든 선하다 그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표준으로 살아 갈 때 선하다 하십니다. 하나님 표준에서 벗어나는 일은 아무리 천하 만민이 선하다 떠들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일을 선하다 쓰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 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표준으로 사는 사람이 선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항상 하나님 표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선한 일이 우리에게 정말 많이 있어야 됩니다. 죽기 전에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 많이 하고 죽는 죽음이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죽음입니다.

 

 

2. 함께 잠자는 죽음(33상반절)

 

 

성경 말씀에는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잠이란 피곤하고 지친 육신이 평안히 쉬는 것입니다. 그 후에 깨어납니다. 죽은 후에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것과 같은 죽음, 성도의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안식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겁낼 것 없고, 슬퍼할 필요 없습니다. 깨어남이 있는 영원한 안식, 죽음에 대하여 담대해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 누구나 언젠가는 맞이해야 하는 죽음입니다. 존경받는 자의 아까운 죽음이 있는가 하면 '그 사람 잘 죽었다'고 오히려 시원해 하는 죽음이 있습니다.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늘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양쪽에 강도가 못 박힐 때에 이 사람들 평생에 선한 일 하나도 못했습니다. 왼쪽에 있는 강도는 끝까지 예수님을 비난하고 원망하면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른편 강도를 보십시오.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그 날 해 넘어가기 전에 함께 낙원에 갔습니다. 죽음이 얼마나 멋집니까. 우리는 살아서 선한 일 많이 해야 되지만, 죽을 때 존경받는 죽음을 죽어야 하겠습니다.

 

 

이상에서 말씀 드렸듯이 우리 성도가 하늘나라 가기까지 해야하고 거쳐야 할 과정이 많이 있지만, 특히 본문 말씀을 통하여 기도의 과정 회개의 과정, 죽음의 과정이 있음과 그 중요성을 알았으니 잘 밟아 나가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김창인 목사(광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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