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요한123

[요한일서1장] 신앙인의 신앙 / 김창인 목사

'코이네' 2015. 7. 31. 23:03

신앙인의 신앙 (요한일서 1: 1-4)

 

신앙인의 신앙이라면 믿는 사람의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을 조금 더 설명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나는 이렇게 믿는다." 혹은 "내 믿음은 이것이다."라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내 보일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믿음이 없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천국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사람의 행동을 가만히 살펴보면 절대로 천국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생활을 보면 죽음을 극히 무서워합니다. 전혀 부활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이 모든 것은 믿는 사람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열두 제자 가운데 아홉 제자는 산밑에 두고 세 제자를 데리고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밤이 맞도록 기도하는 중에 산꼭대기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더니 천국의 세계가 이루어졌습니다. 거기에서 세 제자들은 바로 천국을 체험합니다. 그런 다음 아침이 되어 예수님이 세 제자를 데리고 내려왔습니다. 내려와 보니 나머지 아홉 제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구경거리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내용인즉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주기를 요청했으나 아홉 명의 제자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전에 주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냈을 때는 병도 잘 고치고 귀신도 잘 쫓던 훌륭한 제자들이었는데 지금의 상황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 아버지에게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고 아버지는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고 하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이 없으니 도와달라고 한다면 곤란한 일입니다. 나는 이것을 믿습니다. 나의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라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이 가르쳐 주는 대로 우리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믿음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I. 체험적인 신앙입니다 (1-)

 

 

예수님께서 어느 날 아침에 베드로를 찾아 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얕은데서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는데 그 날 따라 고기잡이에 실패했습니다. 베드로의 가정은 조상 대대로 고기잡이하는 집안이었고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기 까닭에 고기잡이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실패하는 일이 별로 없는데 그 날 따라 고기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실패 끝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처음에는 제 마음대로 해보도록 내 버려 두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없어도 충분히 잘 할 수 있다고 우리는 자만합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어느 순간, 또는 평생에 다시없을 실패를 했을 때 주님은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그 때 주님을 놓치게 된다면 진짜 실패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찾아오심이 기독교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찾아 오셔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하실 때 베드로는 즉시 순종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복은 고사하고 죽도 못 먹을 말씀이었지만 베드로는 그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르치는 교훈입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믿고 살았더니 되더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된다 또는 성경 말씀대로 살면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체험적인 신앙입니다. 우리도 말씀을 배우고 듣는데서 끝나지 말고 그 말씀이 내 생활 속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될 때 비로소 그 말씀이 나에게 축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신앙이 참 신앙입니다.

 

 

본문을 보면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사도 요한 자신이 체험한 바를 그리고 자기가 변화된 과정을 간단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 자신은 베드로처럼 갈릴리바다의 어부, 즉 고기잡이하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서 역시 베드로처럼 고기잡이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한 번은 세례 요한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요즘말로 표현하면 예수님께 배울 것은 다 배웠고 눈으로 볼 것은 다 보았습니다. 눈으로 보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베푸시는 어떠한 기사 이적과 능력들을 체험했다는 뜻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예수님은 이런 분 이시요 그 분의 말씀은 이런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난 후에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다시 옛날로 돌아갔습니다. 즉 갈릴리 바다의 어부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다시 찾아 주셨습니다.

 

 

요한은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몸을 만져보고 부활의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인생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으나 죽음 건너편에 부활의 세계, 영화로운 세계, 복된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장담을 하다가도 예수님이 붙잡혀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겁이 나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쓴 요한은 십자가 밑에 까지 따라오지 않았습니까?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요한은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옆에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있었는데, 예수님은 요한에게 내 어머니를 잘 모시라고 부탁을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는 친동생이 있었지만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 어머니로 알고 잘 모셨습니다. 끝까지 십자가를 따라 갔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베드로보다도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의 빈 무덤에 달려가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다 배웠고 능력을 보았고 십자가의 죽음을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까지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본문을 통해서 체험 신앙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요한의 인생관과 믿음의 질을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여러분들도 말씀을 배우지만 마시고 이런 주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생활 속에 체험하셔서 여러분들의 믿음의 질이 좋아지고 인생관이 달라지고 목숨을 걸고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체험신앙이 신앙인 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신앙입니다. 믿음은 생활이요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II. 사명완수의 신앙입니다 (2-)

 

 

우리들이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그 사람의 사명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살아 있으니 할 일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죽으면 그 사람의 사명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다니엘이라고 하는 청년이 얼마나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는지 우리들은 하루에 한번 기도하기도 힘든데 하루에 세 번 씩 기도했습니다. 또 다니엘이 얼마나 출세를 했던지 바벨론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출세하려면 기도하시면 됩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자식을 성공시키는 원동력이 됨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간신배들이 다니엘의 출세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흑막이 있는 상소를 왕에게 올렸습니다. "왕이여 이제는 왕이나 왕의 신 외에 다른 신 앞에 기도하는 사람은 사자굴속에 던져 넣어야 합시다." 왕으로부터 어인을 받아 냈습니다. 다니엘은 그것을 알고도 기도하다가 간신배들에 의해서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자 굴에 던짐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천사가 먼저 와서 다니엘에게 달려드는 사자의 입을 봉해 버렸습니다. 밤새도록 좋은 구경을 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 살아서 보라는 듯이 나옵니다. 왕이 상소하던 못된 간신배들을 사자 굴에 집어넣었더니 사람이 굴속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사자가 달려들어 목을 물고 뼈를 부셔 놓았습니다. 사자의 밥이 되었습니다.

 

 

똑같은 사자 굴이지만 어떤 사람은 살아남고 어떤 사람은 죽습니다. 죽어야 될 사람이 있고 살아야 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략적인 상소나 올리고 이웃을 음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보신 겁니다. 더 이상 살아있어도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경우는 천하만민이 다 죽는다고 생각했으나 그는 죽음의 자리에서 살아 나왔습니다. 사자도 다니엘을 죽일 수 없고 간신 배들도 죽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외에 기도하는 사람을 누구도 죽일 수 없습니다. 다니엘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습니다. 구약의 계시록이라고 하는 다니엘서를 기록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큰 사명을 감당하기 전 까지는 천하만민이 죽이려고 해도 다니엘을 죽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살다가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 줄 압니다만 그런 때에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사명이 있어서 살려주신 것으로 아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망각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아니하십니다. 딴 사람을 시켜서 그 일을 대신하게 하십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2절을 보면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에게 전하노니". 분명히 체험한 다음의 사명은 전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 신바 된자니라" 여기에서 요한이 전하는 것은 분명히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이며, 그 분의 기적과 능력 그리고 죽음과 부활까지 분명히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요한은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밧모섬에 정배를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도 받은 은혜가 있고 증거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았으면 구원받은 것을 증거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축복을 받았으면 어떻게 축복 받았는지 전해야 할 사명도 있습니다. 사명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간에 동신교회 산상부흥회를 인도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 기도원은 상당히 큰 기도원이었습니다. 기도원의 터가 9만6천 평이나 되었습니다. 그렇게 큰 기도원을 그 교회 장로님 한 분이 1년을 쫓아다니면서 매입하여 교회에 기증한 것이라고 합니다. 기도원을 지을 때도 교회에 있는 돈에다가 나머지는 자기의 돈으로 기도원 숙소도 지었습니다. 그리고 중강당은 그 장로의 형님이 지어 놓은 거라고 합니다. 이 분의 이름을 말하면 알 만한 분은 다 알 것입니다. 한국에 자동차가 몇 대 없을 때 벌써 자가용 타고 살던 분입니다. 굴지의 재벌입니다. 그런데도 교회 올 때는 교인들이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부터 차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오는 분입니다. 갈 때도 걸어나가다가 교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동차를 타고 가는 분입니다. 교인들 앞에서 잘난 체 하고 유세 부리는 법이 없습니다. 교회의 덕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1,2,3,4,5부 예배 때 자가용 가지고 오시는 분들은 걸어다니는 교인들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자동차로 교회 정문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교인들의 걸어가는 것이 거추장스럽게 생각해 본적은 없습니까?

 

 

그 장로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살았느냐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이북에서 피난 올 때 맨손으로 왔습니다. 처음에 피난생활 중에서 판자촌에 살면서 노점을 했습니다. 그 날 벌어서 십일조를 떼어야 하는데 한달 뒤에 떼려면 못하는지라 그 날 떼서 십일조 통에 갖다가 넣곤 하였습니다. 나중에 회사를 설립하고 기업인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당을 지을 때 큰 몫을 담당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업을 그렇게 잘하느냐고 물으면 십일조를 하라고 권하곤 한답니다. 자기는 그렇게 해서 축복 받았다고 증거 하면서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구원받았으면 그것을 증거하고 축복 받았으면 그것으로 예수님을 전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예수 자랑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전도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 줄을 명심해야 합니다.

 

 

III. 영적 교제의 신앙입니다 (3-4)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마18:20). "내 이름"이라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 이름"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 내가 함께 있으리라."로 착각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아니라 2만명, 3만명이 모여도 예수 이름으로 모이지 않으면 예수님이 함께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여 술집에 가서 2차, 3차 하는데도 같이 있을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두 사람이 모여서 한 가정을 이룩하고 "여보 당신 없으면 못살아, 예수 없이는 살아도 당신 없이는 못살아" 하는 그 집에 예수님이 함께 하실 리가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하는 가정이라야 그곳에 주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사업일 때 그 사업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때 주님을 모신 모임, 주님을 모신 만남, 주님을 모신 사업, 이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제쳐놓고 주님 모르는 척, 못 본척하면서 사람끼리 아무리 모여봐야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나누는 영적인 교제가 믿음을 풍성케 하고 삶은 복되게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하지 말라는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십계명이 있고 광성교회에는 십일계명이 있는데 그 열 한번째가 바로 곗놀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광성교회에서 곗놀이를 하고 싶으면 사람은 아예 다른 교회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곗놀이를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서 권사가 계를 만들어 계주 노릇을 합니다. 집사도 모아놓고 권찰도 모아놓고 열두 명이 모여서 일년에 한 번씩 곗돈을 타고 일년 동안 잘 돌아가면 재미가 좋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모이니까 일년에 열 두번을 모이게 됩니다. 남편은 직장 가서 500원짜리 우동을 사먹고 열심히 일하다가 들어오는데, 마누라는 곗놀이 가서 1만5천원짜리 불고기와 냉면 먹고 들어온다면 어떻습니까? 일년에 열 두번씩 만나다가 이것이 3년 지나고 5년 지나면 그 계를 깰 재간이 없습니다. 똘똘 뭉쳐 패거리가 됩니다. 어느 권사님의 자제 분이 본 교회에서 결혼식을 해도 오지도 않으면서 같은 계원 중에서 결혼하면 멀고먼 부산까지도 찾아갑니다. 여러분 권사가 그래도 좋습니까? 집사가 그렇게 해도 됩니까? 이렇게 몇 명이 모여 패거리를 형성하게 되면 마귀는 이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어느 학교 출신이라고 뭉치고, 어느 지방 출신이라고 뭉치게 된다면 교회에는 아무런 덕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사조직은 곧 니골라 당입니다(계2:6). 오히려 백해무익한 모임이 됩니다. 그러다가 계가 깨지게 되면 곗꾼들끼리 싸우게 되고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곤 합니다. 그런 다음에 목사가 심방가도 회복되기가 어렵습니다. 계라는 것은 잘 되어도 교회에 손해, 잘못 되어도 교회에 손해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곗놀이를 할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래 전에 이처럼 계를 못하게 하니까 예배당 지을 때, 예배당 건축헌금을 위한 계를 하자 해놓고 유년부 부장이 주동하다가 다 떼먹고 멀리 도망간 일이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예수 없는 모임, 하나님 없는 모임은 잡음만 나고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모시고 모이는 모임이 귀한 모임입니다. 본문에 보게되면 3절, 4절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너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귐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보십시오. 4절에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고 하였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게 되면 "우리 기도하자", "우리 전도하자", "우리 성경공부 하자"라고 해야 귀한 모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교제가 참 교제요 영적인 교제입니다. 이런 사귐을 사귈 줄 알아서 모일 때 예수님과 함께 모임이 되고 고난을 받아도 예수님과 함께 받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신앙이 기쁨을 더욱 충만케 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신앙인이 가져야 할 신앙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신앙이 체험적인 신앙입니다. 사변적이며 사색적인 신앙은 무력하여 쓸모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명 완수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사명을 소홀히 하는 것은 이미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영적 교제의 신앙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교통은 반드시 영적이어야 합니다. 신앙인이 가져야 할 신앙을 바로 가질 때 신앙인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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