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자료

[어린이주일] 성경에 나타난 어린이들

'코이네' 2015. 4. 30. 21:08

성경에 나타난 어린이들


신구약 성경에는 허다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어린이들의 모습을 정리하여 오늘의 바람직한 우리 어린이상을 그려보도록 하자.


1 . 구 약 에 나 타 난 어 린 이 들

 

히브리 사람들의 가정에서 애기를 분만하게 될 때에는 산파를 부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애기를 낳으면 탯줄을 끊고, 몸을 씻어준 다음에 소금으로 문지르고(수리아에서 지금도) 기저귀에 싼다(겔 6:4). 산모는 아들을 낳았을 때면 7일간, 딸을 낳으면 14일 간의 부정한 기간을 두었고, 아들은 33일, 딸은 67일을 지내야 산모의 피가 깨끗해지는 줄 알았다(레 12:1-5).

 

아기의 이름은 대개 어머니나(창 4:1, 29:32) 아버지가 지었다(창 5:29, 16:15, 출 2:22). 자녀는 아버지의 계통을 따랐으며 아내가 임신할 수 없을 때에는 그 계집종을 남편에게 주어 그 몸에서 난 아이를 자기네 아이로 삼아 이름을 짓고 키웠다(창 30:1-8). 자녀들은 모두 어머니가 길렀고, 2-3년 동안 젖을 먹였다.


 

아들을 더 귀중하게 여겼으며 어떤 문서에 보면 아들은 진짜 보물이요, 딸은 가짜 보물이라고 하였고, 맏아들이 젖떨어질 때 큰 잔치를 베풀었다(창 21:8).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사요(4:1) 자녀를 낳지 못함은 벌로 생각하였다(창 16:4-5, 눅 1:25). 한국에서도 옛날 자식없는 집을 울타리가 없는 집과 같이 여겼고, 마을 사람들은 은연중 멸시했었다. 히브리인 가정의 어린이들은 족장 시대에도 법적인 후사들이었다(창 15:2-3).

 

인류가 시작될 때부터 어린이들은 부모의 슬하에서 성장되었으므로 그 가족 제도와 전통, 풍습에 따라 그릇에 담기는 물처럼 인격 성장의 형태가 천태 만상일 수밖에 없었다. 스팔타에서는 7-8세의 어린이적부터 무사의 정신으로 키웠고, 헬라는 지식을 위주로 키웠으며, 히브리인은 유목 생활과 더불어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 선민의식 속에 키웠다. 그러나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세상에 갓태어난 어린 아기의 첫 교사는 바로 자기네 엄마요, 아빠였다.

 

모세가 그처럼 강렬한 민족 의식을 가지고 성장한 원인은 결국 어머니 요게벳의 감화력으로 볼 수밖에 없다. 애굽땅에서 나는 히브리 가정의 아이가 사내라면 당장 엎어 죽이던가, 나일강에 던져버리라는 바로의 엄명과 학대 속에 히브리 민족의 핏줄을 이어받은 사내로서 태어난 모세의 운명은 풍전등화격이요, 구사일생의 기적적 생존이었다. 그토록 강인한 아버이의 사랑 없었던들, 또 바로왕의 공주의 손길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없었던들 모세가 어찌 살아남아 있었으랴! 그러나 그 당시 긴박한 상황 속에서 당사자들이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섭리를 실감할 수 있었을 것인가? 그저 초조하고 전전긍긍했을 뿐이라고 본다.

 

민족과 국가가 재난을 겪을 때에 민감하게 피해를 당하는 층은 언제나 연약한 노인과 아녀자들이다. 서민층이 아닌 왕실의 자녀까지도 그랬다. 유다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가 한 살박이로 고모 여호세바 등에 업혀 난을 피해 성전 속에 숨어 6년간을 살아야 했던 열왕기(왕하 11장)서의 기록을 보면 언제나 어린이들의 피해상을 엿볼 수가 있다.

사라가 그랬고, 라헬이 그랬듯이 하나도 아들을 낳지 못해 애태우던 여자였다. 그녀가 아들얻기를 기도하면 소원한 바대로 사무엘을 낳아 키우게 되자 젓떨어지면서부터 성막 속에 거하도록 하였다(삼상 1:22). 사무엘은 거기서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자랐다. 같은 성막 안에 거하던 엘리 선지자와 그 아들들은 한 지붕 아래서 살아가면서도 생각과 생활 방식이 서로 달랐다.

 

한 어린이는 스승과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했고, 두 어린이는 자기네 아버지와 하나님의 말씀을 코웃음치며 귓등으로 받아넘겼다. 사무엘은 자라서 선지자와 제사장, 그리고 겨레를 인도하는 사사(왕과 같은 통치자)를 겸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뚜렷한 상징적 인물이 되는 반면에 스승 엘리와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삼상 4:17-18).

 

베들레헴에서 양떼를 몰고 다니며 피리를 불고 언덕에 올라 수금을 뜯으며 노래하는 목동이 바로 이새의 아들 다윗이었다. 서슬푸른 사울왕의 시야를 벗어 나기 어려운데 하나님은 사무엘을 베들레헴으로 가서 이새의 아들들을 만나보라고 하셨다. 그는 그 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물인지 알지도 못하고 가서 늠름한 일곱청년들을 만났고, 맨 나중에 들에서 데려온 홍안 소년 다윗을 보았다. 그 때에 하나님은 바로 이 어린이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셨다(삼상 16:12).우리는 보통 사람들을 외모로 밖에 볼 줄 모르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다윗을 향해 이렇게 선언하셨다.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 13:22).

 

그런데 성경에는 우리 인간이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키 어려운 대목이 수두룩하다. 그 중의 하나가 어린이의 문제이다. 어린이들이 여러 가정에서 자라는데, 어려서부터 조물주를 기억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받들 수 있도록 바탕지어진 훌륭한 인물들이 배출되는가 하면, 야심만만한 욕심을 품고 형의 특권마저 침범해서 억척스럽게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는 야곱같은 소년도 있음을 본다. 어디 그뿐인가?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출생하는 이스라엘과 또 그 추방사건, 아딸랴가 세운 몰렉 신상에게 제물로 바쳐져 지글지글 타죽는 수많은 유대국의 어린생명들이며, 늙은 야곱이 애굽에서 마지막으로 축복할 때에 요셉의 맏아들 므낫세보다 그 동생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고 보다 큰 자가 될 것이라고 기도한 것(창 48:17) 등등 왜 하나는 버리시고 하나는 택하시는가? 이루 다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제 구약의 배경을 정리해 보면 부계의 일부다처 생활이 용인된 대가족 제도 속에, 남존여비의 사상이 철저했고, 거기서 적자와 서자의 색채구별이 선명했으며, 자녀를 온전히 가정의 전속소유물로 여겼다(비상 전시에는 잡아먹을 정도로, 왕하 6:29). 그러나 온갖 시련 속에 어린이들도 선민 의식과 신앙은 살아있어 민족의 얼과 긍지를 샛별처럼 빛냈었다(모세, 요셉, 사무엘, 다윗, 에스더 등등). 히브리 민족사는 실향, 추방, 포로, 불안, 공포, 전쟁, 위로, 희망이 엇갈리는 희로애락의 교향곡 속에 강철 같은 신앙으로 망향가를 부르는 실향민의 대열로 사진 찍혀진다. 이런 대열 속에서 다듬어지는 어린이들이 자라나 오늘의 강인한 이스라엘을 이뤄놓은 것이 아닐까!


 

2 . 신 약 에 나 타 난 어 린 이 들

 

신약 시대의 어린이는 역시 4복음을 중심하고 묘사된 어린이들이 확대되어 우리 눈앞에 어른거린다. 조국의 국권을 상실당하고 신민직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 무지한 무리들, 그 군종 속에 수없이 많은 불구자와 병자들, 배고픈 사람들, 얼마나 찌들게 가난했으면 한 벌 옷으로 3대나 내려가며 계속 입었다고 했을까! 유대나라에 파송된 로마 군병들마저 얼마나 궁쪼가 들었기에 사형수의 겉옷을 네 조각으로 나눠가지고 속옷마저 저마다 가지려고 제비를 뽑았을까?(요 19:24).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소년, 병으로 숨졌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간질병으로 귀신에게 시달림받던 소년 등등, 많은 어린이들 중에 벳세다 들녘에서 때묻은 수건에 싸왔던 오병이어를 주님께 아낌없이 바친 이름 모를 어린이를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어릴 때부터 교회 학교에서 너무나 많이 그 얘기를 들어왔기 때문이다.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배홑이불을 감고 신변이 위험해진 정보를 예수님께 알려드리려고 달려 나갔다가 로마 군병에게 붙잡혀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밤길을 달아난 다락방집 아들 마가 요한이라는 소년의 모습도 잊을 수가 없다(막 14:52).

 

여기에는 헬라 사람과 국제결혼한 유니게의 가정에서 혼혈아로 자란 디모데라는 소년의 이색적인 소개도 있다. 또 신약에서 대표적인 어린이 중의 하나로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 세례 요한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요한도 자녀가 없는 가정에 만득자로 태어났다. 모세는 주위 사정에 할 수 없어 나일강에 내다 버려진 목숨이었으나 요한은 부모의 교육적인 의도로 요단강 기슭 갈대 숲속의 자연 속에서 키워지는 어린이었다. 메뚜기를 잡아먹고 석청을 손가락으로 후벼내어 빨아먹는 야생아, 자연아였따. 세속에 물들지 않은 청순한 광야의 아들로 자라 주의 길을 예비할 심신 단련을 받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민중과 군인과 세리들의 가슴이 후들후들 떨렸다.


3 . 영 원 한 어 린 이 상

 

세계 모든 민족의 영원한 어린이 상으로 나사렛 예수를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가난한 목수네 가정에서 그는 소박하게 자라났다. 나사렛 동네 깊은 우물물도 긷고 톱과 대패질도 배웠을 것이다.아버지와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예루살렘으로 서울 나들이를 하며 신기한 구경도 했다. 회당 학교에 다니며 구약성경과 히브리 사람의 쉐마도 외웠을 것이다. 그러기에 훗날 어려운 질문을 받았을 때 척척 성경말씀(구약)을 인용해 대답치 않으셨던가!

 

신약 외경 중 도마복음에는 예수의 유년 시절의 얘기도 실려 있기는 하다. 그러나 유년시절, 소년시절을 그저 단 한 마디로 성경은 멋지게 예수의 어린이상을 피력했다. "예수는 그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그는 지식과 지혜를 배워가면서 자라났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 1:7)고 하였다. 성경은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준다(잠 1:3). 지혜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하게 마련이다. 키가 자라갔다는 것은 신체적 단련과 성장을 뜻한다. 어버이를 도와서 육체적 노동 내지 강건한 몸으로 나사렛의 어엿한 사내 어린이로 커갔다. 하나님과 그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갔다는 것은 바로 덕행(藁葫)을 뜻함이 아닌가?

 

예수는 어린 시절 지(葍)와 덕(藁)과 체(螤)의 원만한 교육을 거쳐 인격 선장의 완숙을 이루어간 것이다. 오늘 우리 한국의 어린이들도 지식과 체련에만 너무 기울어지지 말고 잘산다고 겉만 번지르르 해가는 실속없는 허영심에 뜰뜨지 말고 하나님을 우러러 섬기는 신앙과 겨레도 사랑할 줄 아는 덕행이 갖춰진 참다운 어린이의 모습으로 자라가기를 빌어 마지 않는다.

 

로마 교회의 화려하게 꾸민 그림과 조각과 천사에 둘러싸인 화려한 예수님만 바라보던 서양 사람들이 십자군 전쟁 때에 유대 나라에까지 와서 실지로 보고 깜짝 놀란 사실이 무엇이었던가? 예수님의 고향집은 가난했고, 소박하고 조촐하게 하나의 낮은 평민으로 자라고 또 두 발로 걸어다니시며 그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어부들과 농부들과 병자들과 함께 고락을 나누었다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한국의 참다운 어린이의 모습도 강원도 두메 산골이나 어느 낙도즈음에 가서야 찾아보게 될 날이 와서는 안되겠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