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이사야

[사 26:1] 평강에서 평강으로 _김창인 목사

'코이네' 2025. 3. 20.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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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에 평강으로

이사야 26: 1-7

설교 : 김창인 목사

 

 

오늘은 이사야 261절에서 7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평강에 평강으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그대로 평강에 평강으로라고 제목을 정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들의 생활을 아주 편하게 해 주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 생활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은 돈입니다. 예를 들어 좁은 방에서 여러 식구가 함께 산다고 해 봅시다.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그러나 돈을 벌면 넓은 집 넓은 방에서 널찍하게 살아갈 수 있으므로 편합니다. 이것은 돈이 주는 편안함입니다. 돈이 없어서 버스만 타고 살다가 돈을 벌어서 자가용을 사서 타게 되면 참 편안합니다. 이것 역시 돈이 주는 편안함입니다. 그러나 평안은 절대 돈이 주지를 못합니다.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도 마음이 평안해서 찬송을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승용차를 타고도 그렇게 불안에 떠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평안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오직 예수님만이 주시고 하나님만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27).

본문에 나오는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라는 말씀은 평안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따라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평강에 평강을 주시는가, 어떤 사람에게 평안에 평안을 더하여 주시는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평안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첫째,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 (1-2)

우리의 믿음은 내가 만들어서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 믿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만약 내가 친구를 믿는다 혹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남편을 나는 믿는다 할 때 즉 너를 믿는다, 친구와 남편을 믿는다 할 때의 믿음은 성령과 상관이 없는 믿음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아도 남편을 믿고 친구를 믿습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남편이 믿어집니까? 성령을 받아야만 친구끼리 믿습니까?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을 때에는 성령 없이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 할 사람이 없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아버지로 믿습니까? 2000년 전에 십자가에 죽으심 즉 오늘날에 볼 수 없는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이 2000년 후에 내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 어떻게 믿어집니까? 이것은 친구를 믿듯이 남편을 믿듯이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인 성령을 받을 때 그 성령이 믿게 하심으로 하나님도 아버지 이상으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죽었다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내 죄 까닭에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은 내가 절대 만들어 믿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받아 믿는 것도 아니요, 공부해서 믿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들을 감동하사 주셔서 믿게 하시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받은 믿음을 굳게 지켜야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조상 적부터 오는 재산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재산은 우리가 사기 당하지 않고 도적 맞지 않고 잘 지켜야 하는 것도 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가하면 우리의 가정도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또한 직장에서 일 할 때 내 자리를 지킨다고 하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지키면 좋고 못 지켜도 상관이 없습니다. 믿는 사람은 그것을 지켜야만 성공이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은 그런 것을 지키면 좋고 못 지킨다고 할지라도 믿음만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믿는 자의 승리가 있고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데 다른 것을 아무리 지킨다고 해도 믿는 자로서의 성공이 아니기 까닭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말년에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나의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키었으니 이제 후로는 면류관 받는 일밖에 없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은 달려갈 길을 다 갔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달려갈 길을 다가야 합니다. 달려갈 길을 다 가면서도 믿음을 못 지켰다고 한다면 달려갈 길을 다 갔다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믿음을 지킨다는데 의미가 있고 믿음을 지켰다는데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한지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욥과 솔로몬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욥은 세상에서 좋다는 것은 다 가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욥은 결국 그것을 못 지켰습니다. 건강도 못 지키고 가정도 못 지키고 재산도 못 지켰습니다. 다 가졌지만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고 가정은 파탄이 되고 건강을 다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을 때 욥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이 세상 태어날 때 적신으로 태어나서 적신으로 돌아갈지라 그 사이에 나에게 주셨던 분도 하나님이요, 내 것이니 다시 취해가겠다고 하신 분도 하나님인데 내가 왜 하나님을 원망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욥은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평강이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을 보십시오. 욥 이상으로 몇 배나 더 가진 사람입니다. 욥에게 없던 것까지도 가졌던 사람입니다. 즉 없는 것 없이 다 가졌던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처음에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으며 칭찬을 받았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이방 여자들을 많이 왕후로 맞이했다는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아름답고 예쁜 여자가 없습니까? 그런데도 이스라엘 여자보다도 이방 여자를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남자들이 좀 그런가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남편 혼자 외국에 내 보내지 마십시오. 자꾸 이방여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저도 처음에 외국에 한번 다녀오고는 몇 달 동안 혼이 났습니다. 그러다가 나와 상관이 없는 그림의 떡이라 생각하고 정리하기까지 몇 달이 걸렸는지 아십니까? 절대 혼자 내 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 사람에게는 한국여자가 최고로 좋습니다. 솔로몬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이방 여자를 왕후로 맞이하다 보니 이방 여자들이 전부 우상을 하나씩 다 가지고 옵니다. 그렇데 들어온 이방 여자들이 솔로몬을 유혹했습니다. 솔로몬이 우상의 전각을 하나씩 다 지어주었습니다. 우상의 전각을 세워주다 보니 시온산 건너편의 아름다운 산이 그만 우상 천지가 되고 맙니다. 후세 사람들은 그 산을 가리켜 멸망 산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왕의 자리와 부귀영화를 끝까지 지켰으나 자기 아들 대에 가서는 나라가 갈려서 6분의 1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명맥만 이어가는 아주 불행한 왕통이 됩니다. 믿음을 지키지 못했기 까닭입니다. 솔로몬은 화려하게 시작했으나 믿음을 지키지 못함으로 이렇게 불행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킨다는데 이런 큰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에서 2절을 보면 그 날에 유다 땅에서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너희는 문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나라가 멸망하기 바로 전에 나타나 활동하고 예언했던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나라는 아직 망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럴 때 이사야는 이 나라가 망한다고 예언을 했습니다. 망할 짓을 하니 망할 수밖에 없는데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그 나라에 가서 포로생활을 하리라는 겁니다. 포로생활을 하는 중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킨 남은 자들로 말미암아 반드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선민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을 반드시 그 나라로 들어오게 하겠다고 하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않은 사람들은 그 때부터 흩어져 제 살기 좋다는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평안하고 자유롭게 살던 그들이 포로생활 중에서도 믿음 지킨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로 다 문을 열고 들어오게 하신다는 것이 본문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살면서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믿음 지키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다 인도하신다는 뜻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평강에 평강이 있다면 하나님 나라의 평강 이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마틴이라고 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한 명의 아들과 아내와 함께 목회를 하면서 열심히 교회를 돌보고 있었는데 아내가 병들어 아주 위독해 졌습니다. 때마침 뉴욕에 있는 성서신학원에서 오셔서 설교해 주십시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곳까지 가야되고 그곳에서 설교를 하고 돌아오려면 하루 종일 걸리는데 아내를 그냥 두고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못 가겠습니다” “왜요? 시간을 좀 내주시지요?” “내 아내가 상당히 위독하기 때문에 제가 그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그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아들이 아버지, 가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너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느냐?”하고 묻자 아들이 아버지 보다 열배 백배 귀하고 훌륭하신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데 왜 아버지께서 가시지 않습니까? 가십시오그 말을 듣고 마틴 목사가 지금까지 무엇을 어떻게 믿고 목회를 하였는가?’하면서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신학교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돌아오면서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어려워 낙심될 때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주 너를 지키리 너 쓸 것 미리 아시고 주 너를 지키리 구하는 것을 주시며 주 너를 지키리 어려운 시험 당해도 주 너를 지키리 구주의 품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라고 찬송을 지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찬송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432장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없어도 열배 백배 천배 더 잘 지켜주신다는 그 믿음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뿌리째 흔들렸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목사님은 끝까지 믿음을 견고히 지켰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찬송의 가사처럼 주님께서 끝까지 꼭 지켜주실 줄 믿고 흔들리기 쉬운 여러분들의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3-4)

여러분 변덕부리는 사람을 만나 보셨습니까? 변덕을 부리는 사람은 좋다고 할 때는 모두 다 줄 것처럼 그렇게 좋아합니다. 그러다가 저녁때가 되면 마주 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말도 안하고 인사도 하지 않습니다. 몇 일이 지난 후에는 밥을 떠 먹여 줄 것처럼 좋아합니다. 그 다음 날에는 꼴을 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내가 그 집에 돈을 떼어먹었습니까? 그 집을 향해서 욕을 했습니까? 자기 혼자서 변덕을 부리는데 손바닥 뒤집듯이 변덕을 부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피곤합니까? 이런 사람은 왜 이렇게 변덕을 부리는 줄 아십니까? 변덕을 왜 부립니까? 사람에게 싫증을 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싫증이 나면 거들떠보기도 싫지 않습니까? 말하는 소리를 듣기도 싫고 함께 있기도 싫습니다. 싫증나면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린아이를 키워 보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장난감을 주면 처음에는 누구에게 빼앗길까봐 꼭 쥐고 놀다가 저녁때가 되면 팽개칩니다. 그 장난감을 그 다음날 어린아이에게 다시 주면 팽개쳐버립니다. 새것을 가져다주기 전에는 받지 않습니다. 싫증을 내서 그러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싫증이 나면 반드시 변덕을 부립니다. 믿음에도 변덕을 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께 싫증이 나고 예수님께 싫증이 나서 그러는 것입니다. 싫증이 나기 전에는 내가 혼자 다 봉사를 해야되는 것처럼 그러다가 어느 날 보면 예배당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또 언제가 보면 자기가 앞장을 서서 다 해야된다고 그럽니다. 이런 사람은 변덕쟁이입니다. 말만 들어도 정말 골치 아픈 존재 아닙니까? 그런데 심지가 견고한 사람은 한번 생각했으면 또는 한번 이것이 옳다 싶으면 끝까지 변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이 변함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좋습니까?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한결같은 사람을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한 후에 죽을 때까지 그 뜻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심지가 견고한 사람입니다. 왕족이었던 그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하루아침에 몰락한 왕족이 되었을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심지를 굳게 가졌습니다. 마지막에는 시대가 바뀌고 왕조가 바뀌어도 그에게는 평강에 평강이 있었습니다. 끝까지 변함 없는 사람을 심지가 견고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도 자기를 향해 이런 사람에게 평강에 평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3절에서 4절을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심지가 견고한 자는 나 자신도 믿을 바가 못되고 너도 믿을 바가 못되나 내가 진정으로 믿을 바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죽으나 사나 오직 하나님이라는 생각과 뜻에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 없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신도 변함 없이 심지가 견고한 자가 되어야 평강을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정직하게 사는 자에게 (5-7)

부부가 결혼을 할 때 목사님께서 결혼식 마지막에 신랑 아무개와 신부 아무개가 부부가 된 것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짝 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선포합니다. 즉 이제는 부부가 짝을 지어 한 몸 되었다는 것을 선포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주례자가 이제는 둘이 한 몸이 되었다라고 선포하면 그 즉시로 하나가 됩니까? 돌아서서 신혼여행 가서부터 싸우기를 시작하는데 하나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신랑된 남편은 이런 가정 분위기에서 자랍니다. 신부된 아내는 저런 가정 분위기에서 자랍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하나가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나에게도 개성이 있고 너에게도 개성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주례자가 선포했다고 그 즉시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서로 조정하고 서로 맞추어 가면서 점점 하나가 되어 가는데 빨리 하나가 될수록 행복한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하나가 되지 못하면 그 가정은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생각도 하나가 되어야 하고 믿음도 하나가 되어야 하고 주머니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주머니를 따로 차면 안됩니다. 생활에 목표와 방법도 전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가 되기까지 세월이 걸립니다. 서로 서로 조정하며 맞추어가기 때문입니다. 빨리 맞출수록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그 하나님께 빨리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를 맞추라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맞추게 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맞추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수록 믿음의 생활이 행복해 집니다.

사진 찍은 것을 보게 되면 초점이 맞지 않은 것은 참 보기가 흉합니다. 사람의 윤곽이 흐리게 나와서 차마 봐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진은 얼마나 잘 찍었는지 당장 살아서 말을 할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초점이 바로 맞아서 그럽니다.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을 초점으로 하고 또는 예수님을 초점으로 하고 정확하게 맞추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보기 좋은 사진처럼 정말 보기 좋고 아름다운 믿음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5절에서 7절을 보면 높은 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로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첩경의 뜻이 무엇입니까? 첩경은 지름길이라는 뜻입니다. 왜 지름길이 생기는 줄 아십니까? 큰길은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돌아가다 보면 큰 길이 있고 큰길로 가다보면 돌게 됩니다. 이렇게 돌아가야 하다 보니 막바로 가로질러 가기 위해서 지름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가로질러 가는 그 길을 질러간다 해서 지름길이라고 합니다. 지름길은 얼마 험합니까? 지름길은 오솔길도 못되는 길도 많습니다. 지름길은 그렇게 험난한 길입니다. 본문을 보면 첩경을 평탄케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름길도 평탄케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어떠한 사람의 길을 평탄케 해 주시는 줄 아십니까? ‘믿는 사람 정직함이여라고 하였습니다. 믿는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갈 때 정직하신 하나님께서 첩경을 평탄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정직이 하나님의 정직과 맞아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직하면 우리도 그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직한데 우리가 정직하지 못하다고 하면 정직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서 하나님께서 좋다하면 우리도 좋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면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죽이고 싶도록 밉다하시면 우리도 죽이고 싶도록 밉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귀를 좋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초점이 맞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에게 주실 평강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하나님이라고 오늘 본문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우리도 정직한 길을 살아간다면 그에게 첩경이라도 평탄케 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나오는 정직하다는 말은 공자 맹자가 말하는 정직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 분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너는 세 마디 거짓말을 하는데 나는 한 마디밖에 하지 않았으니 너 보다 내가 정직하다라는 상대적인 정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정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직하면 나도 정직한다’ ‘하나님이 사랑하면 나도 사랑한다’ ‘하나님이 좋아하면 나도 좋아한다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진 것을 정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하는 말을 사람이 못 들을 수 있습니다. 돌아서서 욕하기 때문에 듣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는 일은 아무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일을 모르는 일이 사람들에게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르기도 하고 못 듣기도 하고 못 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고 다 듣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사람이 보든 보지 않든 다 보고 있는 것처럼, 듣고 있는 것처럼,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가지는 것이요, 정직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했습니다. 그 후손들이 정직할 때 다윗 같이 정직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평강이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아 평강에 평강을 더하여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립니다. 평강에 평강을 누리는 사람은 첫째, 믿음을 굳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을 지킬 때 평강이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향해 일편단심으로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하나님은 평강을 주십니다. 믿음에는 변덕을 부릴 자리가 없습니다. 변덕을 부리면 이미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셋째, 정직하게 사는 자에게 평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표준으로 삼고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평강에 평강으로 더하여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평강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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