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이사야

[종려주일 설교] 사 53:4 십자가를 바라보자

'코이네' 2024. 3. 23. 15:55

십자가를 바라보자

본문 : 53:4-6

김해양문교회/박병지목사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의 고통을 기억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명상하며 십자가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 고난주간의 의미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인 동시에 기독교의 본질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오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점차 멀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십자가는 소홀히 여기고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만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멸시 천대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셨으니 우리는 부활 영광만 취하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의 중요성을 백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십자가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부활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없는 십자가는 또한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십자가와 부활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초대교회는 오직 십자가와 부활만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교회안에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십자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잃어버린 것은 고사하고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와 전혀 관계없는 신앙의 생활을 하기도합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자타가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와 관계없는 신앙은 무익합니다. 마치 서울 가려는 사람이 광주가는 버스표를 10장을 가졌다 하더라도 서울가는 차표 한 장 없으면 서울을 갈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 1:18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신앙을 가졌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신앙이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이 시간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듣는 중에 십자가의 신앙이 여러분께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TV를 통해서 종종 텔런트의 목걸이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신앙적인 사람들이 걸고 다니기도 하지만 마치 부적처럼 걸고 다니는 사람, 악세사리 정도로 생각하고 자기 멋을 드러내기 위해서 차고 다니는 사람, 가지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의 십자가를 영광의 십자가로 생각하고 차고 다닐 뿐 거기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조차 십자가를 영광의 십자가로만 생각하고 십자가에 담겨있는 참뜻을 외면하려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거기에 담겨있는 제자도의 의미를 다시한번 새겨보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있어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다시한번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우리의 생명은 구원받고, 영적인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십자가에 대한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중요성을 깨닫고자 합니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거룩한 희생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줍니다.

 

구약시대에는 1년에 한 번씩 속죄의 절기가 있었습니다. 속죄일이 되면 제사장은 두마리의 염소를 준비하여 하나는 여호와를 위하여 속죄제사를 드립니다. 속죄제사는 죄지은 사람이 용서받기 위해서는 짐승을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짐승이 희생되었던 것입니다. 희생제물을 드려서 그 짐승이 불에 탐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가 불살라 없어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또하나는 아사셀을 위하여 모든 백성들 앞에서 수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어 백성들의 죄를 염소에게 지운 다음 광야로 쫓아 버립니다(16:10). 염소는 광야에서 맹수의 먹이가 됩니다. 이로써 백성들의 죄가 사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종교행위 모습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인간의 역사는 죄악의 역사였습니다. 죄는 사망을 낳습니다. 사망은 곧 인간을 지옥으로 이끄는 멸망입니다. 이처럼 죄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가게 된 온 인류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악을 등에 질머지시고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은 동물이나 사람의 희생과는 다르기 때문에 거룩한 희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어린양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들의 무거운 죄악의 짐을 벗겨 주었습니다. 광야에 장대위에 달린 구리뱀을 바라본 자가 죽음에서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못박힌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바라 볼 때에 죽음에서 벗어나 살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피와 살로 우리의 생명을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살과 피를 희생하심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리신 것입니다. 북미 일대에서 사는 고기 가운데 King Salmon이라는 연어가 있습니다. 연어는 매년 2월을 전후해서 알을 낳고 분화하게 됩니다. 새끼가 부화하게 되면 어미 연어는 곧 죽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어린새끼가 어미의 살을 먹고 자라 나게 하기 위해서 어미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어디에선가 어미 거미의 잔등에 달라붙어서 어미의 살을 파먹고 있는 수십마리의 새끼 거미를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미물이지만 새끼를 위한 어미의 지극한 사랑의 발로로서 거룩한 희생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영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어린양,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보혈로써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 있었고, 그분의 살의 찢음을 인하여 우리는 마치 연어가 제 어미의 살을 먹듯이, 거미가 제어미의 살을 파먹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서 영혼이 살찌고 자라고 사는 것입니다. 벧전2:24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느니라"

성도 여러분, 그러기에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떼어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는 너희를 위한 내 살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잔에 포도주를 잔에 나눠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나와 여러분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살이 찢기셨고, 피를 흘리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나와 여러분의 영을 살리셨고, 지금도 생명으로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보는 사람은 오늘도 그분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고 생명이 구원받습니다.

일본의 삼포능자라고 하는 여류 소설가의 '양치는 언덕'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그 소설에는 나오미라고 하는 목사 딸이 나옵니다. 나오미는 료오이찌라고 하는 남자에게 반해 부모를 버리고 도망 합니다. 그러나 그 료오이찌라고 하는 사람은 술꾼이요 바람둥이이었기 때문에 원만한 결혼생활을 할 수가 없어서 결국 얼마 후 친정으로 돌아오고 맙니다. 그때 료오이찌라고 하는 사람이 폐병에 걸려 나오미에게로 옵니다. 나오미는 그 사람을 받아 들이기가 싫었지만 목사인 아버지가 그를 받아들입니다. 처가집에서 요양생활을 하는 동안 료오이찌는 처가집 식구들의 믿음에 감동을 받아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요양 생활을 하면서 료오이찌는 다락방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아무도 보지 못하게 흰 천으로 그림을 덮어 놓곤 합니다. 그리고 부인에게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선물로 그림을 완성하여 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고 그림도 다 완성 되었을 때 전에 사귀던 좋지 못한 여자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할 수 없어서 나가 만납니다.술을 권하지만 마시지 않습니다. 하룻 밤 자고 가라고 유혹하지만 그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몰래 술에 수면제를 탑니다. 그리고 이 한잔만 마시면 보내 주겠다고 속입니다. 술에 수면제가 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술을 받아 마신 료오이찌는 그곳에서 잠들지 않으려고 길을 나섰다가 길에서 잠이 들어 그만 동사하고 맙니다.

소설의 클라이막스는 료오이찌를 장사하고 그가 다락방에서 그렸던 그림의 천을 벗기는 것입니다. 힌 천을 벗기자 거기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발아래 한 청년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손등 위에 예수님의 피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료오이찌 자신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피가 자신의 죄를 씻어주심을 그는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와 같은 마음과 믿음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면 그가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든지 간에 상관없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능력이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게 된 우리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그 십자가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는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다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중보자란 중매장이란 말과 같습니다. 처녀, 총각을 중매하여 연결맺어 주는 중매장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매맺으신 분이시기에 중보자라고 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더라면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맺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바로 우리와 하나님을 관계맺어 주셨습니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인간은 양처럼 어리석습니다. 방향감각도 없습니다. 방어무기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산다고 목자를 떠나서 제길로 갔습니다. 제길로 갔다는 것은 목자를 따라가지 않고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교만이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모르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떠나 독립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인간의 정복하고 지배하여 자기 왕국을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인간이 교만의 바벨탑을 쌓습니다. 그렇게 자기 멋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고집만을 주장하고 자기 생각대로 주장하는 인간, 하나님이 보실 때 희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거기서 죄인의 구원을 완성시켜 놓으셨습니다. 십자가상에 예수님은 선포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인간의 구원을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값을 십자가의 보혈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 때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중보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4층 아파트에서 불이 나서 아래층에서부터 물이 윗층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윗층에는 미쳐 피하지 못한 여러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4층에 아버지와 세 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래 층에서 불이 타 올라오자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으나 출입구가 막혀 있고 불이 워낙 세게 타올라서 도저히 탈출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래 층에서 타올라 오는 불길과 연기로 세 아들은 질식할 것 같았고 기침을 하며 견뎌내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아들들을 데리고 옆에 있는 건물을 향한 창문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 창문에서 옆집 창까지는 불과 1m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향하여 건너 뛰라고 재촉했으나 아이들은 건물 아래를 내려다 보고는 그 높이에 질려서 떨고만 서있는 것입니다. 불은 자꾸만 타올라서 이제는 사층까지 번졌습니다. 더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된 아버지는 자기 편의 창문에 발을 걸고 건너편 건물의 창문을 향하여 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창틀을 붙잡고 몸으로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얘들아 어서 내 몸을 타고 건너라 어서!" 아버지의 외침을 들은 아들들은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몸을 밟고 무사히 옆집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세 아들을 살리고 자신은 결국 희생하였던 것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다리가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몸을 밟고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며 다리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예수님 자신이 선언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결코 가롯 유다의 배반때문은 아니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것은 우리들의 죄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오래 전에 이미 말씀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머리에 쓰시고, 양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는 창에 찔려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는 1)죄씻김을 받았으며, 2)그분의 살과 피로서 생명을 얻고 3)그분의 희생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이것이 바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 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뿐 만 아니라 밖에 나가서 십자가를 자랑해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는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나의 십자가를 확인하고 바로 지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